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
유기쁨 지음 / 눌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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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은 정령 신앙으로 이해됩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정령 신앙”을 원시인들의 사고로 규정하였습니다. 저자 유기쁨은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의 『원시 문화. 신화, 철학, 종교, 언어, 기술 그리고 관습의 발달』의 번역자로서 오랫동안 애니미즘과 생태주의를 연구해온 분입니다. 타일러의 책은 원시 문화에 대한 객관적 서술을 넘어서서, 역사에 등장한 제반 정령 신앙의 사고, 이에 대한 비판적 시선 등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관심사는 과거의 정령 신앙이 아니라, 오늘날 현대인들이 상실한 영혼의 가치 상실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자는 원시시대에 출현한 애니미즘을 “낡은 애니미즘”으로 명명하면서 (400쪽), 현대 사회에 요청되는 생태적 사고로서의 새로운 애니미즘을 추적하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인간과 동물 (제 6장), 인간과 식물 (제 7장) 그리고 비-인간과 결부되어 있는 애니미즘의 새로운 의미를 생동감 넘치게 서술해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독자가 책의 앞부분보다는 뒷부분을 먼저 읽게 된다면,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자연에 대한 참신한 시각에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책의 몇몇 문장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1. 인디언들은 "영혼은 희미하고 실체가 없는 인간의 모습을 띄는데, 그 본질은 수증기와 얇은 막 혹은 그림자의 일종이며, 육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89쪽)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을 “나비ψυχή”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육신에서 빠져나와 나비처럼 날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2. "데이비드 콰먼에 의하면 현재까지 알려진 전염병 중에서 60%가 인수 공통 감염병이다" (202쪽),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줍니다. 인간의 건강은 동물의 건강과 직결되며, 인간의 질병은 동물의 질병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닙니다.

3. "사람의 뼈가 안에 들은 것처럼 나무도 그러하며/ 사람의 골수는 나무의 진과 같다." (우파니샤드 3장 9편 28절) (286쪽) 오래 전부터 나무는 인간의 생명체로 여겨졌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나무 한 그루가 “물구나무선 여성”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무는 대지의 생명이며, 모든 축복을 부여하는 존재와 같습니다. 4.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받드는 것에 감사하라/ 자신이 취한 것의 대가로 선물을 주라/ 자신을 떠받치는 이들을 떠받치라. 그러면 대지가 영원하리라." (인디언 포타와미족의 격언) (301쪽)

사실 인간은 산업혁명 이후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간이 원래 견지했던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영혼적인 무엇 그리고 여성적인 무엇을 가리킵니다. 이로써 육체 노동은 정신 노동과 분화되었고, 자연은 마구잡이로 활용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처녀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나아가 여성의 존재는 전투적 수직적 남성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짓밟힐 수 있는 객체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사랑과 우정과 같은 영혼의 가치는 깡그리 사라졌고, 에로스는 무차별적으로 섹스로 변모했으며, 농업은 천시되고 상업이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관한 사항은 가령 카를 폴라니의 사회 경제 이론이라든가, 이반 일리치의 젠더 이론 그리고 여러 페미니즘에서 여러 관점에서 논의된 바 있습니다.)

합리적 사고는 애니미즘을 저열하고 원시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했습니다. 산업의 발전은 19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국가 이기주의와 세계대전을 부추겼고, 독점 자본주의와 함께 자원은 무한대로 착취당하게 됩니다. 생태 위기는 이러한 제반 사항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기쁨의 책은 자연과 인간 속에 자리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생태적 삶은 투쟁이 아니라, 평화이어야 하고, 파손이 아니라, 상생이어야 하며, 세계 앞에서 인간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애니미즘과 현대세계』 는 4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이지만, 결코 난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책에는 많은 문헌이 인용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어른을 위한 동화 그리고 웹툰 만화도 새로운 각도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책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며, 우리에게 절실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대립하는 동안 인류세는 종언을 고하려 합니다. 생태적 인간은 당면한 문제를 넘어서서, 원시안적으로 물질이 어떻게 서서히 파괴되는가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질 이후의 시대에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저자의 말대로 세계 속에서 영혼을 되살리려는 노력일지 모릅니다.

가령 특정 사물을 마치 신처럼 모시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페티시즘은 저열한 시각으로 치부될 수 없습니다. (359쪽) 왜냐하면 원시인들이, 혹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애지중지하는 사물 속에는 치유와 회복력을 찾으려는 마음가짐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인용한 그레이엄 하비의 문장을 예로 들까 합니다. 이 말 속에 저자 유기쁨이 추구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론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과 세계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세계와 함께 하거나, 자연과 세계 속에 내재하는 존재다."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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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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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기이하게도 저자가 아니라, 두 명의 번역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목수정의 사진이 버젓이 게재되어 있다. 각주 처리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으며, 원 저자의 의향보다는 현대인들의 저항을 축구하는 메시지가 강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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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 지식인과 실천 問 라이브러리 6
윤평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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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교수의 글은 논의에 있어서 명징하고 질서정연하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강한 논리적 견해가 때로는 사실적으로 적확한 내용 파악을 힘들게 만들 때도 있다. 이를테면 그는 송두율 교수의 사회학 내지 정치관을 비판한다. 송 교수에 대한 그의 비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소련 그리고 북한 등에 대한 부정적 시각 내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유형의 반공주의의 성향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신상초의 공산주의 비판을 반복하는지 모른다.

 

한반도의 정세의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 윤교수가 내세우는 것이 변증법적 이성 국가에 관한 믿음이다. 물론 이성적 국가를 정립시키고, 이러한 토대 하에서 혼란과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이성적인 정책에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 변증법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인데, 과연 실제 현실의 정치 전선에 직접 대입될 수 있을까? 과연 정치 철학의 이론적 논거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실천을 필요로 하는 현장 정치에 적용 가능한 것일까?

 

아니, 이론은 원래 과거의 현실적 토대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지나간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특정한 현실을 전제로 제기된 이론적 결론이 미래 현실의 정치적 난제에 있는 그대로 대입되고 적용될 수 있을까? 자고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다. 윤교수는 헤겔Hegel의 변증법적 국가 이론을 흠모하는데, 헤겔의 국가 이론의 저변에는 성장하는 수구주의 국가, 프로이센이 은밀히 자리하고 있다. 19세기 프로이센을 토대로 형성된 헤겔의 변증법적 국가 이론이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21세기 한반도의 정치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다.

 

윤 교수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서 다른 문헌들을 끌어들인다. 여기서 다른 문헌 속에 언급되는 견해의 역사적 현실적 맥락은 그에게는 별반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입장이다. 모든 객관적 자료는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원용되는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의 이론은 어떤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장소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것이 다른 시대 그리고 다른 장소에도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은 크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윤평중 교수가 추구하는 엄정 중립적인 합리성이 주어진 현실에서 공명정대한 수직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윤 교수의 책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극단의 시대에 중심을 잡는 일이다. 좌우의 도그마에 관계없이 자유의 합리성에 의한 엄정중립주의의 사고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엄정 중립주의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주어진 현실에서 90도 수직으로 바로 세워진 공평무사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주어진 현실적 토대는 변증법적 현실과는 달리 수평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한 시대의 정신은 다수 사람들의 견해에 의존하는데, 좌우 대칭의 견고한 구성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이 유동하고 움직이는 시계추를 방불케 한다. 가령 21세기 남한의 현실에 자리하는 시대정신의 경향은 수평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한의 정치적 지형도는 어떠한가? 한반도는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반일의 성향은 강하나, 반미의 성향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21세기 남한의 국회에는 중도 우파 그리고 극우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조중동과 같은 신문사 그리고 우편향주의적인 종편 TV 등의 수를 세어보면, 남한 사회가 얼마나 우 편향적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간파할 수 있다. 21세기 남한의 정치 풍토는 우측으로 심하게 기울여져 있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 상태와 관련된다. 625사변의 끔찍한 체험은 강렬한 반공주의라는 방어막을 형성하게 했는지 모른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치유되고 극복되어야 마땅하다. 언젠가 리영희 교수가 말했듯이, 새는 두 개의 날개로 난다. 그러나 남한의 정치적 판도는 마치 어설프게 비행하는 시늉 내는 날짐승을 방불케 한다. 날짐승은 좌측의 날개를 거의 잃었기 때문에 비탈길 위에서 우측으로 원을 그리면서, 하늘 위로 비상하려고 하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지구는 약간 기울어진 채 자전한다. 그렇기에 여름과 겨울의 밤낮의 길이가 다르다. 만약 누군가 지구가 기울어진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낮과 밤의 길이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 무리한 시도일 것이다. 한 가지 사항을 충고하고 싶다. 극단에서 중심을 잡으려면 땅위에서 무조건 90도 수직을 고수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어느 정도 기울어진 잣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말이다.

 

시대 정신이 우측으로 향하고 있는 현재 세상에서 올바른 중심을 잡으려면, 좌측으로 기울이진 기준과 잣대가 오히려 올바른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우편향의 시대정신을 용인하지 않은 엄정 중립주의는 그 자체 기울어졌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좌우 양측으로부터 얼마든지 비난 당할 소지를 지닌다. 오래 전부터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한신대학교의 교수 한 분이 조선일보에 여러 칼럼을 발표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좌우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당하는 경우를 지켜보는 필자의 마음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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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울력의 시 1
박현수 지음 / 울력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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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너:  “응”.

나: “응”이라는 대답 속에는 동의가 숨어 있군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에는 주종 관계가 자리하는 반면에 “응”이라는 대답은 이와는 다른 것 같아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그리고 동등한 관계를 연상시키니까요.

너: 요즈음 젊은이들은 카톡을 주고받을 때 응이라는 단어 대신에 그냥 동그라미 이응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응이라는 단어 속에는 수긍하고 동의한다는 의미가 은밀하게 내재해 있군요

나: 문정희 시인의 시 「응」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햇빛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너: “응”이라는 단어를 기호학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개의 이응 사이에 하나의 선이 그어져 있지요. 이것은 지평선 내지 수평선 위에 떠 있는 해와 달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합일은 해와 달의 결합으로 유추되고 있어요. 기호학적 차원에서는 시인의 지적이 매우 참신하지만, 사랑을 해와 달로 비유하는 경우는 이전에 참으로 많았습니다.

나: 예를 들자면, 어떤 게 있나요?

너: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해와 달의 삭망을 “성스러운 결혼식 ἱερὸς γάμος”라고 일컬었어요. 말하자면 해는 남성을 달은 여성을 상징하는데, 해와 달의 마주침은 그 자체 삭망으로서 사랑의 일치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그러니까 개기일식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너: 네 그렇습니다. 성스러운 결혼식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가 일직선을 이룰 때에 한해서 나타났지요. 성스러운 결혼식으로서의 삭망은 이교도에 의해서 하나의 축제로 영위되었는데, 기독교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축제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남자는 그리스도의 몸 corpus Christi이고, 여자는 교회Ecclesia로 상징적으로 추상화되었어요.

나: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은 신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면, 교회는 신의 비밀을 품는 자물쇠로 의미변화를 이룬 셈이로군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서동시집에서 과거에 횡행했던 잃어버린 결혼식을 재론한 바 있지요?

 

너: 괴테의 시편에서는 하템과 술라이카라는 두 남녀가 등장하지요.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폅기로 합니다. 일단 문 시인의 작품에 집중하기로 해요. 응이 “꽃처럼 피어난 문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자체 화답이기 때문입니다.

나: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은 그 자체 가장 평화로운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결단은 누구의 간섭이나 명령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사랑이 자연스러우려면, 모든 만남을 이끄는 주체는 여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너: 문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군요. "응"은 가장 뜨겁고 평화로운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시어라고 말입니다.

나: 그렇다면 “응”은 과연 언제 어디서든 간에 조화롭고 아름다운 두 연인의 관계를 표현할까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박현수 시인은 문 시인의 작품을 바탕으로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났다는 문자

너는 동그란 해로 내 위에 떠있고

나는 동그란 달로 네 아래에 떠있어

눈부시다는 그 말

 

그러나 너와 나 사이

저 차가운, 가로놓인 선은 어쩌나

서로 사랑할 때조차

가장 깊이 다가갔을 때조차

살갗과 살갗 사이에

얇은 막처럼

서로를 구분하고 있는

저 자명한 경계는 어쩌나

아무리 끌어안아도

지워지지 않은 저 금은 어쩌나

 

관객은 다 들어도

배우만은 서로 못 들은 척하는 방백처럼

사랑은 저 넘을 수 없는 담을

못 본 체하는

너무나 오래된 게임인 것을 어쩌나

이 뻔한 방백을 우리가

너무 진지하게 말해왔던 것을 어쩌나

끝내 기의에 닿지 못하는

기표처럼 떠돌기 싫어서

슬쩍 없는 것처럼 해 두었던 것을 어쩌나

 

해를 삼키고

바다에 비친 해그림자도 삼키고

어둠을 가르는

저 수평선, 달아오른 칼날

내 위에 뜬 해도

그 아래에 뜬 달도 무릎 꿇리며

저 홀로 빛나는

저 눈부신 불사의 군림 (君臨)

세계에는 오로지 한 줄기 선만 남는다

땅 위에서 들은 마지막

계시의 말

 

(박현수: '응'이란 말, 실린 곳: 박현수: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울력 2015)

 

너: 박시인은 사랑의 갈망과 완성으로 향하는 “응”을 패러디하고 있군요.

나: 네, 라캉을 위시한 수많은 심리학자들도 지적한 바 있지만, 완전한 사랑의 결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두 영혼이 하나라는 생각은 인간이 갈망의 차원 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일지 모르지요. 이 점을 고려할 때 영원한 사랑은 하나의 허상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은 라캉이 말한 바에 의하면 항상 상호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오로지 어느 짧은 순간 에 한해서 동시적으로 오르가슴을 맛볼 수 있습니다.

 

너: 따지고 보면 해와 달이 서로 겹치는 것은 불과 몇 분으로 제한되어 있지요.

나: 그렇습니다. 사랑의 합일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게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이 좌절하게 하고, 그럼에도 절망적인 시지포스로 하여금 사랑의 돌을 굴리도록 작동하는 무엇입니다. 박현수 시인은 연인 사이에 온존하고 있는 구분 그리고 간극으로서의 “”을 지적합니다.

 

너: 그렇겠지요. 사랑은 그 특징에 있어서 어쩌면 “방백”과 같습니다. 배우는 다른 배우가 곁에 서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발언을 관객에게 전할 때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방백입니다. 제 3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할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체 하면서 서성거리고 있는 등장인물을 생각해 보세요.

나: 그렇다면 사랑은 하나의 갈망의 차원에서 이해될 뿐, 성취의 순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엇일까요?

 

너: 주어진 현실에서 사랑은 시인에 의하면 “끝내 기의에 닿지 못하는 기표”일 뿐입니다. 사랑이라는 시니피앙이 사랑이라는 시니피에와 일치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바로 이러한 까닭에 박 시인은 두 개의 이응보다, 이응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정한 선, “수평선”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완벽한 사랑을 처음부터 가로막는 하나의 선 (線)을 “달아오를 칼날”이라고 표현합니다.

나: 박현수의 시 「‘응’이란 말」은 실제 현실에서 두 연인의 사랑의 성취를 차단시키고 가로막는 장애물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의 눈에는 “선”, “수평선”, “칼날”, “자명한 경계”가 안쓰럽게 비치고 안타까울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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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전홍준 지음 / 신생(전망)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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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전홍준 시인은 2020년 말에 시선집 『흔적』을 간행했습니다.

너: 그는 “간결하고 투박한 문체로 작품을 창조하는 고향 시인”입니다. 시편들은 홍준 시인의 활달한 성격과 정교한 투시력이 결합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홍준 시인은 언어로 조작하는 수많은 시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압축을 선호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나: 그렇지만 시적 주제가 독자에게 수월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너: 홍준 시인은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적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정독해야 합니다.

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유형의 시 대신에 수사와 수식으로 수놓은 작위적인 시를 선호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전홍준의 시적 가치가 지금까지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매우 아쉬운 대목입니다.

너: 그렇습니다. 홍준 시인의 시는 아프고, 쓰라리며, 애달픈 마음의 체를 통해서 걸러진 누룩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투박하다고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그의 시집에 실린 시 「아요」를 살펴볼까 합니다.

 

“서부 경남 어스름 골목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부탁하는 말인데 비굴하지 않고

인절미 같이 쫄깃쫄깃한

 

가뭄에 사생결단, 물꼬싸움을 하다가도

이 한마디에 서로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고

흙 묻은 옷을 털어주기도 하는

 

새벽녘, 음기탱천한 지아비가 잠에 취한

지어미를 은근히 부르면

스르르 치마말기도 풀어지는

 

아요

아요, 몇 번 부르고 나면

대책 없이 그대가 좋아져

심장비밀번호까지 공유하고 싶은 말

아요!” (전홍준: 흔적, 전망 2020, 36쪽 이하)

 

나: 인간을 괴롭히는 네 가지 심리적 하자는 분노 (광기), 고독 (우울), 미움 (질투) 그리고 불안 (강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동인은 바로 사랑일 수 있습니다.

너: 인간 개개인은 개별적으로 나누어진 사람들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사랑이라는 매개체로 서로 뒤엉켜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나: 그렇습니다. 사랑과 우정을 생각해 보세요. 서로 사랑하고 애호하는 사람들은 비록 헤어져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과 관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으며, 바로 이러한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고독하고, 지루한, 힘들고 가슴 아프게 하는 삶의 구렁텅이 속에서 위안을 얻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너: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랑 그리고 연민의 감정이야 말로 더불어 사는 사회적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정서라는 말씀이로군요.

 

나. 무릇 사랑은 한 인간이 인간적 따뜻함을 찾으려는 욕구에서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때 우리는 “아요”하고 말을 걸곤 합니다. 수도권에서는 “저기요.”라고 말하지만, 남도에서는 “아요”하고 말합니다. 수도권에서는 타인이 “저쪽” 내지 “그쪽”으로 표현이지만, 서부 경남에서는 타인이 “이쪽”에 해당하는 “아요”입니다.

너: “아요”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동의를 구할 때, 상대방의 이해를 촉구할 때, 상대방에게 말을 걸 때, 상대방의 관심을 부추길 때,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원하거나 부탁할 때 사용되는 말이 “아요”입니다.

 

나: 시인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아요”를 사용하지만, "비굴"한 표현은 아니라고 장담합니다. 왜냐하면 “아요”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표현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떤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의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령 네가 나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대가를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요”라는 표현 속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잘 해주겠다는 마음가짐이 담겨 있습니다.

 

너: 조건 없는 사랑과 우정이 바로 그것인가요?

나: 그렇다고 해서 아요가 “아가페ἀγάπη”와 같은 무조건적인 이타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요 속에는 끈끈한 정을 서로 주고받자는 자연스러운 마음가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너: “아요”가 끈끈한 정을 담는다는 점에서 시인이 “인절미 같이 쫄깃쫄깃”하다고 표현했군요.

 

나: “아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반목에 치유의 “연고를 발라주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요”하고 부름으로써 “흙 묻은 옷을 털어주며” 서로 화해할 수 있습니다.

너: 아요는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에서 사랑을 찾는 조용한 보챔의 말일 수 있습니다. 시인이 4연에서 서술하는 것은 결코 선남선녀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욕망과는 다르지 않나요?. 만일 지어미가 음기탱천하고, 지아비에게 양기가 가득 차 있다면, 이는 신혼부부의 경우일 텐데요.

나: 그렇습니다. 제 4연에 등장하는 남녀는 노년에 이른 부부입니다. 지아비는 지어미를 사랑하고 싶지만, “음기탱천”한 그의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를 잘 이해하는 지어미는 애처로운 마음으로 남편을 위해서 살며시 치마끈을 풉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애틋한 배려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요는 대책 없이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표현, “심장비밀번호”까지 다 내주고 싶은 표현입니다.

 

너: “아요”는 개별적 존재로 따로따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 소외된 인간 사이에 하나의 가교를 형성해주는 사랑과 우정의 출발점이 되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마지막으로 시인에게 한 마디 전할 말씀이 있나요?

 

너: 네, 아요는 서부 경남 지역에만 통용되는 표현이 아니라, 한 반도 나아가 만주 지방까지 통용되는 표현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서부 경남 뿐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그리고 만주 지역 한인들 대부분은 천성적으로 정이 많고, 평화를 사랑하며, 상대방을 헤아리고 “대책 없”는 사랑과 우정을 베풀려는 마음가짐을 품고 있습니다.

나: 물론 이들 가운데에는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부모를 배반하고,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 사람들도 있지요.

너: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백의민족, 동이족 사람들은 이를테면 가족과 이웃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애틋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습니다. 폭력을 싫어하는 홍준 시인의 명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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