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난학의 세계사 - 중학적 세계를 넘어 일본이 유럽과 열대에서 접속하다
이종찬 지음 / 알마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1.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연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몇 년에 공표했는가? 하는 수능 시험의 문항보다 더 중요한 물음입니다. 언젠가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에디터 2001)라는 책이 간행되었습니다. 저자 이덕주는 이에 대한 해답을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19세기 말 조선은 열강의 세력에 대항할 힘을 비축하지 못했고, 처음부터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의향 또한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하자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납득할 만한 답변이 아닙니다. 왜냐면 대원군은 폐쇄적 외교 정책을 제외한다면. 여러 가지 바람직한 내부 정책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독일인 오베르트가 대원군의 부친 남영군의 묘를 몰래 파헤친 사실에 기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하나의 작은 계기에 불과합니다.
2. 조선의 쇄국 정책과 관련하여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하나의 근원적 해답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즉 조선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며 거부했으며, 일본은 나가사키에 데지마라는 인공 섬을 개발하여 난학(蘭学)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은 서양의 자연과학, 기술 그리고 의학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데 비해, 일본은 이를 받아들여서 메이지 유신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이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가령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인물은 사무라이 출신의 지식인이었는데, 일본이 군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3. 그렇다면 조선은 어떠한 계기로 서양과 서양인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고, 일본인들은 서양의 문물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깊이 추적해야 하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외부 세력에 대해 전전긍긍해야 했습니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먹잇감으로 수탈당해 왔습니다. 중국인들은 수없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공격하거나 사대교린(事大交隣)을 내세우면서 물자를 공물로 빼앗아 갔습니다. 일본인 역시 삼국시대, 고려 시대 그리고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해안을 침공하여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예컨대 원나라 몽고의 침공을 생각해 보세요. 당시에 수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고, 온갖 문화재는 불에 타버렸으며, 처녀들은 강제로 중국 본토로 송치되었습니다.
4. 이에 비하면 일본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조건 때문에 원나라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았습니다. 몽고 군인들은 탁월한 기마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지에서만 막강한 힘을 발휘했을 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를 공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섬”이라는 지형적 이유로 인하여 일본 사무라이들은 외세로부터 심하게 핍박당한 적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속에는 외세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할 리 만무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이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서양인과 서양의 문물은 처음부터 인해전술의 중국 군대 그리고 교활한 왜구와 마찬가지로 조선을 위협하는 존재로 각인되었습니다. 요약하건대 조선 사람들의 “외세 침략에 대한 두려움xénophobie”은 한반도 및 만주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낯선 사람 그리고 서양 문물에 대한 심리적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5. 예를 들면 『하멜 표류기』는 조선이 얼마나 서양의 문물을 완강하게 거부하는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지요. 조선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이라는 미명 하에 그림, 지도, 건축, 의학 등에 무관심한 데 비해서, 일본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번역 작업 외에도 직접 서양으로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정약용, 박제가, 최한기 등은 중인(中人)들의 일감인 번역, 회화, 박물학, 의술 그리고 기술을 자신들의 중점적 과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노동을 천시하면서, 천문학, 역학, 수학 그리고 지리학 등과 같은 이론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박물학, 의술, 군사학, 지구과학 그리고 공학 등과 같은 실제 현실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이종찬: 『난학의 세계사』 (알마, 2014, 250쪽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6.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양인들이 열대 지역 내지는 극동지역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마디로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타주의적으로 제삼세계에 은혜를 베풀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지요. 이때 상인을 보좌한 사람들은 가톨릭 신부 그리고 군인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유화책으로, 군대는 강경책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양의 모든 여행자를 오로지 이러한 식민 사관이라는 카테고리에 편입시킬 수는 없습니다. 가령 탐험하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라든가 부갱빌과 같은 자연과 민속을 탐사하려는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백인 상인들과는 달리 고결한 야생에서 서양의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놀라운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훔볼트는 서양의 식민지 쟁탈의 야욕이 멕시코 주민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해악을 끼치는가를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부갱빌 그리고 훔볼트는 자신의 식민주의의 야욕을 채우려는 강대국의 하수인과는 철저하게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7. 놀라운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즉 일본인들 가운데 국가의 식민주의의 정책을 비판하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조국이 다른 나라를 약탈하는 침략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지식인은 일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천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체제 비판적인 발언 내지는 양심선언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한반도에 살던 지식인들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수운 최제우는 자신의 학문을 갈고닦을 때 국가 권력으로부터 직접 핍박당했습니다. 가령 동학 농민운동을 일으켰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처음에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들과 국가 권력에 저항했지만, 나중에는 풍전등화의 상태에 처한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반일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시종일관 그리고 무조건 “천왕 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오로지 일본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을 뿐입니다.
8. 자고로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조국의 문제점과 하자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체제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둥지를 더럽히는 자Nestbeschmutzer”라고 손가락질하곤 했습니다. 지식인은 그 속성에 있어서 “주어진 질서를 더럽히는 방해꾼fauteur de troubles”입니다. 자고로 혁명은 저항에서 출발합니다, 저항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자가 바로 지식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전후 시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의와 폭정 그리고 식민주의 등에 강하게 저항하면서, 병든 조국의 끔찍한 몰골을 까발리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가령 사르트르와 파농과 같은 지식인은 자신을 체제 파괴적인 존재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문제점과 병폐를 지적해 왔습니다. 그들은 특히 권력으로부터 핍박당하는 민초의 권익을 가장 우선으로 고려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체제 파괴적인 지향성야말로 지식인이 견지해야 하는 가장 소중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9. 중요한 것은 일본 열도에서 국가가 저지르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고발하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거의 드물게 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 자체가 개인으로부터 비판 당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일본 열도에는 개인이 없습니다. 개인은 다만 막강한 힘을 지닌 나라를 구성하는 작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일본에서 내부 고발자라든가 양심 선언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째서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비판하고 국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며 저항하지 않(았)는가요? 이에 대한 원인을 우리는 깊이 숙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은 섬나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거대한 세력을 피해 해외로 도주할 기회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무라이로서는 충성이냐, 할복이냐?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릅니다.
10. 과연 조선은 처음에 서양의 문물을 거부했고, 과연 일본은 이를 난학(蘭学)으로 받아들여서 일본의 정신적 문화적 꽃을 활짝 피웠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서양의 정신적 뿌리인 기독교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일본에서 가톨릭교도가 95만이고 개신교 신자의 수는 43만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인은 일본 인구의 2%도 되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일본인들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그들의 정신과 영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물질적 향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조선은 서방의 문물과 서양의 선교사들을 처음에는 배척했지만, 오늘날 한국의 인구 40%가 천주교와 개신교를 믿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의 경우와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본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과는 무관하게 서양 문명을 피상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서양의 문물은 하나의 필요성에 따라 습득한, 낯설고 새로운 무엇,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메이지 유신은 자아와는 무관하게, 그저 먼 곳의 타자를 수용함으로써 이룩한 경제적 군사적 성장과 승리로 이해됩니다. 일본이 1945년에 원자폭탄의 피해당하게 된 것은 강상중 교수에 의하면 "일본 민족 본연의 진정한 자아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경덕 옮김, 이산 1997)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인은 일본 민족의 자아 또한 얼마든지 비판 당할 수 있으며, 변모 가능하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1. 일본인들은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바꾸기 위해서 서양의 문물을 수용한 게 아니라, 다만 실용적 차원에서 활용하기 위해서 그것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개개인은 자기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파악하지 않고, 자아를 회피할 수 있는 탈출구로서의 믿음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파이데우마παίδευμα"라는 심리적 특성으로 명명될 수 있습니다. 원래 어린아이들은 낯선 세계가 두려울 때 안온한 동굴을 찾습니다. 동굴에 자신을 숨기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문화 인류학자 레오 프로베니우스Leo Frobenius는 “파이데우마”를 “특정 국가에서 환경과 자기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는 삶의 느낌”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는 영혼으로서의 자기 차단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둥근 천황 폐하의 욱일(旭日)에 자신을 맡기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리라고 믿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근대화로 군사 대국이 이루어지자, 일본인들은 서구 문물의 본질과 기독교의 이념을 알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천황 숭배라는 토착 문화에 집착하였습니다. 이로써 일본 고유의 욱일 문화가 새롭게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선불교의 관점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旭日)”를 유일무이한 천왕으로 숭배했습니다.
12. 문제는 자신의 문제점과 하자를 분명히 직시하고 이를 수정하려는 각고의 자기 성찰이 일본 사람에게 없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맹점이 태동하게 된 근본적인 원천은 문화 영혼으로서의 자기 차단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찬란한 빛을 얻어서, 가까운 곳을 밝히리라." "나에게 향하는 치욕을 감당하느니, 차라리 할복하겠다." - 이것이 대부분 일본인의 내면에 도사린 감정입니다. 할복, 즉 하라키리는 자신의 패배뿐 아니라, 자신을 비판적으로 돌이켜보려는 마음가짐조차 용인하지 않은 채, 강자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과시하려는 패자의 자해 행위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소녀상, 소녀의 눈동자, 소녀의 어깨에 새처럼 앉아 있는 영혼을 바라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욱일에 대한 맹점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안타깝게도 자기비판을 통한 성숙의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