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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과 형세 - 발터 벤야민의 미학 서강학술총서 35
최문규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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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부적 사항을 치밀하게 분석한다는 점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저자인 최문규가 추구하는 연구 방향 그리고 근본적 성향을 분명하게 간파하게 합니다. “파편은 특수한 부분, 미완성의 단장 등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전체, 객관 그리고 보편성과 반대되는 특징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예술과 역사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부분품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의 불연속성과 관련되는 단어입니다


형세Konstellation”는 별자리의 박힌 형태 내지는 짜임 관계를 지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문규의 벤야민 연구가 불변하는 상태 내지는 순간, 어떠한 변화를 용인하지 않는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만물은 변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시간적 변화라든가, 변증법적 역동성은 파편과 형세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저자는 벤야민이 역사 철학의 사고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적으로 고찰한다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이 랑케의 역사주의를 통렬하게 비난한다는 최문규의 주장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실제로 벤야민은 역사적 파국 앞에서 진보의 불연속성을 지적했습니다. 이 경우 역사의 불연속성과 파괴는 순간으로 선회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Burghart Schmidt: Benjamin zur Einführung, Hannover 1987, S. 9). 


그러나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 전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고, 진보를 위한 변화가 순간적으로 역사를 중단케 한다는 식으로 자신의 의혹을 표명했을 뿐입니다. “계급 없는 사회는 역사 속에서 진보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종종 실패로 끝난 진보의 중단이다.” (Benjamin, GS1: 1231)

 

전환기의 시점에서는 역사적 발전이 일순간 단절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유의 나라는 단순히 우주적 구원을 재정립한사회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에른스트 블로흐에 의하면 과거의 찬란한 사회적 상태를 순간적으로 투시한 사회상이 아니라,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서 출현할 수 있는, 가능한 나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최문규는 어떤 더욱 훌륭한 사회적 삶을 만들려는 인간의 노력이 궁극적으로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폭력을 불러일으켰다고 확신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전체주의의 허상이라고 매도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카를 하인츠 보러Karl Heiz Bohrer가 로빈슨 크루소에게서 찾으려고 한 손상된 유토피아의 미학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Karl Heinz Bohrer: Der Lauf des Freitags. Die lädierte Utopie und der Dichter, München 1973, S. 86). 


그런데 계급 없는 사회는 얼마든지 역동적으로 개방되고 변증법적 변화는 가능합니다. 요약하건대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 회의감을 표명했으나, 이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로 최문규가 벤야민에게서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오로지 역사성을 극복할 수 있는 심미성입니다. 벤야민은 최문규에게는 사물의 조각, 아포리즘 그리고 이미지적 사유를 찾아내는 놀라운 심미적 비평가일 뿐입니다. (최문규: 5, 79). 


이로써 그는 벤야민의 이론에다 변증법적 가치가 배제된 반동적 유미주의를 덧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문규가 벤야민에게서 도출해내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에서 발견되는 미적 요소이고, 순수 예술의 체제 옹호주의며, 제반 사항들을 폐쇄적으로 철저히 구분하려는 반동적 유미주의입니다. 순수 예술은 문화의 제반 영역을 구분하고 폐쇄적으로 차단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정치적 성향을 퍼뜨립니다


과연 아름다움의 파편 속에는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위한 순간적 갈망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할 수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최문규는 변증법적 생산 미학을 추구한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이를테면 한스 마이어Hans Mayer 그리고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 등의 사회주의 예술에서도 가능한 실험적 시도 등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요약하건대 벤야민은 심미성을 추구하는 순수 미학 연구자라기보다는, 변증법과 새로운 생산 미학을 중시하는 비평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예술적 방식, 획기적인 표현 방법, 참신한 실험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자는 바로 벤야민이었습니다. 재차 말씀드리건대 벤야민이 시도한 신학적 예술적 은유의 시도는 문학과 예술의 확정된 이론 내지는 견해와는 별개로 파악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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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의 서구, 朝鮮의 열대 - 근대 학문과 예술은 어떻게 열대를 은폐했는가 서강학술총서 91
이종찬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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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자연사 연구를 이처럼 다각도로 구명한 책은 없다. 보건 의료의 영역을 넘어서 문학, 예술, 역사의 영역의 학제적 사항을 심도 넘치게 추적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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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명평화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 근현대 사상 세미나 1
정지창 외 지음 / 참(도서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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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다음의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 정지창: 동학과 개벽운동

동학 사상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압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지창 교수는 동학 사상의 흐름에서 김범부의 사상 그리고 2권으로 간행된 김용옥의 동경대전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데 김범부가 선(仙) 사상에서 동학의 정신을 발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출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김용옥의 "잡탕 그릇의 사고"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 정지창: 수운 최제우의 동학사상

수운 최제선의 삶 그리고 그의 득도와 가르침 그리고 수운의 영향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최제우의 사상 소개를 넘어서서, 그 영향까지 타진하고 있습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논의를 개진하는 데 있어서 저자의 견해가 섞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동학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가령 정지창 교수는 김지하의 담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 (1988)를 언급하면서, 백무산 시인의 시 "최제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3. 정지창: 해월 최시형의 생명사상

해월 최보따리의 사상을 이렇게 간명하게 서술한 글은 보기 드물 것입니다. 해월 최시형은 오늘날 인간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사상과 양천(養天)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 도움을 줍니다. 시천, 체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최보따리의 양천일 것입니다.


4. 정지창: 동학에서 천도교로: 손병희의 3전론과 이돈화의 개벽문화운동

천도교가 동학의 정신을 하나의 "교단"으로 바로 세운 것은 의암 손병희의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천도교가 항일 운동과 민족의 정기를 비로 세운 것은 대단한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돈화의 일시적인 변절이 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인철학"은 천도교 사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5. 정지창: 김범부의 동방사상

김범부는 동학 사상 속에서 선(仙)이라는 한국 정신을 발견하려고 한 사상가입니다. 정지창 교수는 동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서 "화랑외사" 그리고 "최제우론"을 꼽습니다. 문제는 김범부의 사상 속에 신라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화란도 속에는 고대의 풍류도가 자리하지만, 이는 부분적일 뿐이라고 여겨집니다. 선 사상은 신라 정신이 아니라, 고대 단군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6. 양승권: 홍암 나철과 대종교

대종교는 한국인의 민족 종교로서 천부경과 오래 전의 문헌 삼일신고의 사상에서 출발합니다. 양승권 교수는 한반도 고유의 역사철학을  언급하면서, 내외합일과 내성의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 강현욱: 1916년 빼앗긴 땅에서 피어난 미륵불 세상: 원불교와 소태산 대종사

원불교는 1916년 소태산에서 박중빈의 깨달음으로 시작됩니다. 자립과 연대의 협동조합으로서, 네 가지 은혜를 중시합니다. 1. 천지은, 2. 부모은, 3. 동포은, 4. 법률은. 여기서 법률이란 일상의 법과는 달리 모든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삶의 가치는 보은의 고리를 어떻게 이어나가는가? 에 따라 결정됩니다. 

8. 이기상: 사유와 삶의 방식을 바꾼 철학자 다석 류영모

다석 류영모는 한국 사상의 토대를 갖춘 사상가입니다.  서양의 형이상학을 부정하기 위해서 "태양을 꺼라!"고 선언한 다음, 나와 너의 사이, 다시 말해서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무엇인지를 치밀하게 추적하였습니다. 그는 물질 세계의 자아를 몸나로 설명하고, 고유한 정신 존재로서의 자아를 얼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기상 교수는 서양 사상의 존재론적 특징을 류영모 사상의 관계론의 특징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9. 손영호: 삶 속에서 진리를 추구한 실천적 사상가 함석헌

류영모의 제자 함석헌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사상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함석헌은 인간 개개인이 서로 협동하여 세상의 씨알로 거듭나서 놀라운 결실을 맺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그의 씨알 사상은 인간 존중과 협동 그리고 평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정지창 교수의 첫 번째 글 "동학과 개벽 운동" 그리고 세 번째 글 "해월 최시형의 생명 사상"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면 그것은 동학 사상의 기원 그리고 근본적 사상 그리고 그 영향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동학 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에 관한 사항이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테마는 나중에 이어지는 세미나에서 재론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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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의 세계사 - 중학적 세계를 넘어 일본이 유럽과 열대에서 접속하다
이종찬 지음 / 알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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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연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몇 년에 공표했는가? 하는 수능 시험의 문항보다 더 중요한 물음입니다. 언젠가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에디터 2001)라는 책이 간행되었습니다. 저자 이덕주는 이에 대한 해답을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19세기 말 조선은 열강의 세력에 대항할 힘을 비축하지 못했고, 처음부터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의향 또한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하자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납득할 만한 답변이 아닙니다. 왜냐면 대원군은 폐쇄적 외교 정책을 제외한다면. 여러 가지 바람직한 내부 정책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독일인 오베르트가 대원군의 부친 남영군의 묘를 몰래 파헤친 사실에 기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하나의 작은 계기에 불과합니다.

 

2. 조선의 쇄국 정책과 관련하여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하나의 근원적 해답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조선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며 거부했으며, 일본은 나가사키에 데지마라는 인공 섬을 개발하여 난학(蘭学)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은 서양의 자연과학, 기술 그리고 의학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데 비해, 일본은 이를 받아들여서 메이지 유신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이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가령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인물은 사무라이 출신의 지식인이었는데, 일본이 군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3. 그렇다면 조선은 어떠한 계기로 서양과 서양인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고, 일본인들은 서양의 문물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깊이 추적해야 하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외부 세력에 대해 전전긍긍해야 했습니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먹잇감으로 수탈당해 왔습니다. 중국인들은 수없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공격하거나 사대교린(事大交隣)을 내세우면서 물자를 공물로 빼앗아 갔습니다. 일본인 역시 삼국시대, 고려 시대 그리고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해안을 침공하여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예컨대 원나라 몽고의 침공을 생각해 보세요. 당시에 수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고, 온갖 문화재는 불에 타버렸으며, 처녀들은 강제로 중국 본토로 송치되었습니다.

 

4. 이에 비하면 일본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조건 때문에 원나라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았습니다. 몽고 군인들은 탁월한 기마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지에서만 막강한 힘을 발휘했을 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를 공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라는 지형적 이유로 인하여 일본 사무라이들은 외세로부터 심하게 핍박당한 적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속에는 외세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할 리 만무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이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서양인과 서양의 문물은 처음부터 인해전술의 중국 군대 그리고 교활한 왜구와 마찬가지로 조선을 위협하는 존재로 각인되었습니다. 요약하건대 조선 사람들의 외세 침략에 대한 두려움xénophobie”은 한반도 및 만주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낯선 사람 그리고 서양 문물에 대한 심리적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5. 예를 들면 하멜 표류기는 조선이 얼마나 서양의 문물을 완강하게 거부하는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지요. 조선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이라는 미명 하에 그림, 지도, 건축, 의학 등에 무관심한 데 비해서, 일본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번역 작업 외에도 직접 서양으로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정약용, 박제가, 최한기 등은 중인(中人)들의 일감인 번역, 회화, 박물학, 의술 그리고 기술을 자신들의 중점적 과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노동을 천시하면서, 천문학, 역학, 수학 그리고 지리학 등과 같은 이론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박물학, 의술, 군사학, 지구과학 그리고 공학 등과 같은 실제 현실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이종찬: 난학의 세계사(알마, 2014, 250쪽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6.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양인들이 열대 지역 내지는 극동지역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마디로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타주의적으로 제삼세계에 은혜를 베풀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지요. 이때 상인을 보좌한 사람들은 가톨릭 신부 그리고 군인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유화책으로, 군대는 강경책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양의 모든 여행자를 오로지 이러한 식민 사관이라는 카테고리에 편입시킬 수는 없습니다. 가령 탐험하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라든가 부갱빌과 같은 자연과 민속을 탐사하려는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백인 상인들과는 달리 고결한 야생에서 서양의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놀라운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훔볼트는 서양의 식민지 쟁탈의 야욕이 멕시코 주민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해악을 끼치는가를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부갱빌 그리고 훔볼트는 자신의 식민주의의 야욕을 채우려는 강대국의 하수인과는 철저하게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7. 놀라운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즉 일본인들 가운데 국가의 식민주의의 정책을 비판하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조국이 다른 나라를 약탈하는 침략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지식인은 일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천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체제 비판적인 발언 내지는 양심선언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한반도에 살던 지식인들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수운 최제우는 자신의 학문을 갈고닦을 때 국가 권력으로부터 직접 핍박당했습니다. 가령 동학 농민운동을 일으켰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처음에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들과 국가 권력에 저항했지만, 나중에는 풍전등화의 상태에 처한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반일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시종일관 그리고 무조건 천왕 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오로지 일본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을 뿐입니다.

 

8. 자고로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조국의 문제점과 하자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체제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둥지를 더럽히는 자Nestbeschmutzer”라고 손가락질하곤 했습니다. 지식인은 그 속성에 있어서 주어진 질서를 더럽히는 방해꾼fauteur de troubles”입니다. 자고로 혁명은 저항에서 출발합니다, 저항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자가 바로 지식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전후 시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의와 폭정 그리고 식민주의 등에 강하게 저항하면서, 병든 조국의 끔찍한 몰골을 까발리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가령 사르트르와 파농과 같은 지식인은 자신을 체제 파괴적인 존재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문제점과 병폐를 지적해 왔습니다. 그들은 특히 권력으로부터 핍박당하는 민초의 권익을 가장 우선으로 고려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체제 파괴적인 지향성야말로 지식인이 견지해야 하는 가장 소중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9. 중요한 것은 일본 열도에서 국가가 저지르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고발하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거의 드물게 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 자체가 개인으로부터 비판 당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일본 열도에는 개인이 없습니다. 개인은 다만 막강한 힘을 지닌 나라를 구성하는 작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일본에서 내부 고발자라든가 양심 선언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째서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비판하고 국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며 저항하지 않()는가요? 이에 대한 원인을 우리는 깊이 숙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은 섬나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거대한 세력을 피해 해외로 도주할 기회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무라이로서는 충성이냐, 할복이냐?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릅니다.

 

10. 과연 조선은 처음에 서양의 문물을 거부했고, 과연 일본은 이를 난학(蘭学)으로 받아들여서 일본의 정신적 문화적 꽃을 활짝 피웠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서양의 정신적 뿌리인 기독교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일본에서 가톨릭교도가 95만이고 개신교 신자의 수는 43만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인은 일본 인구의 2%도 되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일본인들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그들의 정신과 영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물질적 향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조선은 서방의 문물과 서양의 선교사들을 처음에는 배척했지만, 오늘날 한국의 인구 40%가 천주교와 개신교를 믿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의 경우와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본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과는 무관하게 서양 문명을 피상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서양의 문물은 하나의 필요성에 따라 습득한, 낯설고 새로운 무엇,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메이지 유신은 자아와는 무관하게, 그저 먼 곳의 타자를 수용함으로써 이룩한 경제적 군사적 성장과 승리로 이해됩니다. 일본이 1945년에 원자폭탄의 피해당하게 된 것은 강상중 교수에 의하면 "일본 민족 본연의 진정한 자아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경덕 옮김, 이산 1997)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인은 일본 민족의 자아 또한 얼마든지 비판 당할 수 있으며, 변모 가능하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1. 일본인들은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바꾸기 위해서 서양의 문물을 수용한 게 아니라, 다만 실용적 차원에서 활용하기 위해서 그것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개개인은 자기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파악하지 않고, 자아를 회피할 수 있는 탈출구로서의 믿음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파이데우마παίδευμα"라는 심리적 특성으로 명명될 수 있습니다. 원래 어린아이들은 낯선 세계가 두려울 때 안온한 동굴을 찾습니다. 동굴에 자신을 숨기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문화 인류학자 레오 프로베니우스Leo Frobenius파이데우마특정 국가에서 환경과 자기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는 삶의 느낌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는 영혼으로서의 자기 차단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둥근 천황 폐하의 욱일(旭日)에 자신을 맡기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리라고 믿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근대화로 군사 대국이 이루어지자, 일본인들은 서구 문물의 본질과 기독교의 이념을 알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천황 숭배라는 토착 문화에 집착하였습니다. 이로써 일본 고유의 욱일 문화가 새롭게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선불교의 관점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旭日)”를 유일무이한 천왕으로 숭배했습니다.

 

12. 문제는 자신의 문제점과 하자를 분명히 직시하고 이를 수정하려는 각고의 자기 성찰이 일본 사람에게 없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맹점이 태동하게 된 근본적인 원천은 문화 영혼으로서의 자기 차단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찬란한 빛을 얻어서, 가까운 곳을 밝히리라." "나에게 향하는 치욕을 감당하느니, 차라리 할복하겠다." - 이것이 대부분 일본인의 내면에 도사린 감정입니다. 할복, 즉 하라키리는 자신의 패배뿐 아니라, 자신을 비판적으로 돌이켜보려는 마음가짐조차 용인하지 않은 채, 강자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과시하려는 패자의 자해 행위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소녀상, 소녀의 눈동자, 소녀의 어깨에 새처럼 앉아 있는 영혼을 바라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욱일에 대한 맹점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안타깝게도 자기비판을 통한 성숙의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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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 세계사 : 自然史 혁명
이종찬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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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교수의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지식과 감정 2020)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생애를 서술한 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신대륙을 탐험하는 여행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열대 탐험을 통해서 쌓아가는 새로운 진리의 섭렵 과정을 밝히고 있는데, 참다운 지식의 의미가 얼마나 혁명적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참다운 지식이란 야생이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에게 얼마나 귀중한 의학적 자연과학적 예술적 자양을 제공하는가? 라는 물음과 관련됩니다. 실제로 자연사 연구는 자연 과학 전반에 걸친 지식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는 일감입니다.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은 물론이고, 낯선 지역의 기후와 지질을 알아야 하며, 고고인류학과 민속학 고생물학 분야까지 모조리 탐색해야 가능한 학제적 연구 분야입니다. 이것은 폐쇄적인 학과로 구분되는 학문적 풍토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지요.

 

미리 말씀드리건대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은 지금까지 자연 과학의 문헌들이 충족시키지 못한 놀랍고도 독창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책에 서술된 이러한 놀라운 독창성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사항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종찬 교수의 책은 자연 과학의 폐쇄적인 틀을 박차고 있다. 자연사 연구는 생물학, 지리학 공학 그리고 의학의 다양한 시각을 요청하며. 나아가 인문 사회과학의 맥락과 연결되고 있다.

둘째로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은 서양 중심의 일방통행적 관점에서 벗어나 열대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서구 문명을 맹목적으로 동경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사회사적으로 그리고 민속학과 자연 과학의 측면에서 일방적이고 편협한 것이다.

셋째로 열대 지역의 탐구는 서구의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학문을 수정할 수 있다. 이로써 훔볼트는 열대 지역에 이전되는 일방적으로 이어지는 서구 문명의 방향성을 부정하였다. 열대 지역의 토속적이고 원시적인 문화 속에는 어떤 새롭고 유효한 자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콩고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을 촉발하는 근본적인 의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넷째로 야생의 삶은 원시적이고 야만적이 아니다. 문명과 야생, 다시 말해서 서구와 열대 지역은 지질학 그리고 민속학의 측면에서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훔볼트에 의하면 학문적 교류와 문화의 소통을 통해서 얼마든지 상호 보완될 수 있다.

다섯째로 자연사 연구는 예술의 영역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알렉산더 훔볼트의 자연사 탐구에는 사물의 근본을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초기 낭만주의의 예술적 의향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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