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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
장희창 지음 / 호밀밭 / 2016년 12월
평점 :
친애하는 J, 한강의 모든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소설 『채식주의자』를 명작으로 인정합니다. 왜냐면 작품은 여성이 추구하는 자생적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나의 관심사는 소설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소설을 이해하고 소화해내는 장희창 교수의 글로 향하고 있습니다. 장희창 교수의 글은 힘차고, 핍진하며, 많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당신에게 세 가지 사항을 동시에 전하려고 합니다. 1. 한강 소설의 내용, 2. 장희창 교수의 논평, 3. 필자의 사족과 같은 부언설명 등이 그것들입니다. 이 글은 글에 대한 글에 대한 글이라는 점에서 메타 글쓰기를 재현한 것입니다. 아래의 글은 장희창 교수의 글인데, 푸른 색으로 기술된 것은 필자의 첨가문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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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정주부인 영혜는 어느날 갑자기 채식을 단행한다. 냉장고의 모든 고기를 내다 버린다. 남편이 이유를 묻자,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피가 뚝뚝 흐르는 고깃덩어리들 한가운데를 헤매는 꿈이었다.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눈을 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났고, 노랫소리, 즐거운 음악소리도 들려 왔다. 양육강식, 선혈 낭자한 우리 현대사를 압축한 꿈이었다. (사실인지는 모릅니다만, 쇠고기를 좋아하여 자주 섭취하는 사람은 대체로 80세의 수명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쇠고기를 즐기기 전에 소의 슬픈 눈동자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혜의 채식 결단은 악몽의 현실에서 깨어나는 견성(見性)의 순간이었다. 다른 이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여자, 영혜는 점점 말라간다.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영혜를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아버지는 영혜의 입을 강제로 벌려 고기를 밀어넣는 폭력마저 행사한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하여 훈장도 받고, 베트공도 여럿 죽였다고 자랑하는 그런 사람이다.
독점 자본과 독재 권력이 통제하는 규율 사회 내에서의 명령과 복종에 순치된 좀비 인간인 아버지.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그 딸은 아버지에게 또 다른 베트콩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이 폭력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절대로 깨닫지 못한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대로 내버려둘 줄 아는 것, 즉 판단 중지는 타자를 인간으로 대접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영혜는 자해로써 저항하고 정신 병원에 갇힌다. (판단 중지도 최소한의 예의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디아포라, 즉 선악과 무관한 사항에만 해당하는 것이지, 무작정 외면하고 무시하는 행위로 이어져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가령 권력자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태도는 수수방관주의와 상통할 수 있습니다.)
영혜는 자신의 몸 중에서 젖가슴만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손도, 발도, 이빨과 세 치 혀도, 시신마저도 폭력의 도구로 쓰일 수 있지만, 젖가슴으로는 아무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젖가슴은 폭력을 종용하지 않습니다. 영아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사랑하는 임이 애호하는 대상일 수는 있습니다만.) 약육강식의 이 세상이 정신병동인가, 아니면 그 세상을 향해 비폭력 저항을 선언한 영혜가 정신병자인가?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는 영혜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형부는 영혜의 몸에 아직 남아 있는 연둣빛 몽고 반점에서 인간 존재의 식물성, 태고의 것, 광합성의 흔적 같은 평화의 이미지를 읽어낸다. (연두빛 몽고 반점 – 그것은 광합성을 지칭하는 객관적 상징물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식물처럼 고결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가능성은 존재할까요?) 영혜를 화포로 삼아, 온몸에 꽃을 그려넣는다. 등 쪽에는 밤의 꽃, 기슴 쪽에는 낮의 꽃을 가득 그려넣는다. 영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어둠과 빛의 조화, 즉 자연의 순리이다. 정신 병원으로 다시 실려가는 영혜의 초연한 눈은 모든 것을 다 담은,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비워진 그런 눈길이다.
언니인 인혜도 동생의 입장을 차츰 이해하게 된다. 집을 나간 남편의 고독도 헤아려본다. 남편이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욕조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면서 남편의 시선으로 세상을 돌아보려 애쓴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했을 때도 자기는 순응했지만, 영혜는 곧이곧대로 대응했다.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실은 생존을 위한 비겁함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세월이 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늦게나마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는 인생은 아름답다.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찾아옵니다. 이별 후에 남편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저항했던 동생의 의지를 헤아리는 순간 인혜는 변화를 맞이합니다. 타인과 전적으로 동화될 필요는 없지만, 이해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지요?)
정신병원 야외 마당에서 웃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앙상한 가슴을 드러낸 채 햇살 아래 말없이 앉아 있는 영혜. 작가는 이로써 불신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향해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불멸의 여인상을 빚어놓았다. 폭력과 아름다움의 공존을 처연하게 투시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또는 등신불(等身仏)처럼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영혜는 세계 문학이 낳은 또 하나의 인간상으로 남을 것이다.
정신병원을 찾은 언니에계 영혜가, 세상의 나무들은 다 형제같아, 라고 말하는 구절은 전율의 순간이다. 정신병원에서 영혜는 물구나무 선 자세를 하고 있다. 거꾸로 볼 때 땅을 지탱하는 것으로 보이는 나무를 닮고 싶었던 것이다. 영혜는 온몸에 이파리가 피어나고 뿌리가 돋아나는 꿈을 꾼다. 타자에 대한 이해를 넘어 타자와 하나가 되는 몸이다. 동체대비(同体大悲)의 마음가짐이다.
타자와의 절절한 마주침이 없으면 삶의 고양도 없다. 타자의 문제는 사람살이의 절대 화두이다. 괴테는 신중하게 말한다.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므로 타자를 참아내는 능력이라도 길러야 한다.” (타인을 참아낸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워나가는 일과 같습니다. 타자와 하나가 되는 꿈 – 이것은 에코페미니즘의 추구하는 이상이 실현되는 상태라고 여겨집니다. 나의 행복이 타자의 기쁨이 되고, 타자의 행복이 나의 기쁨이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인간은 식물이 누리는 평화로운 삶을 본받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장자는 보다 시원스럽게 표현한다. 여물위춘(与物為春). “타자와 더불어 봄을 이룬다.”
실린 곳: 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 호밀밭, 2016, 232 - 2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