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리차드 세넷 지음, 조용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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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넷은 이 책에서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진지하게 성찰하고서 그 내용을 다양한 학문적 논의들 속에서 세심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자신이 과거 인터뷰했던 빌딩 관리인의 아들 리코가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리코는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리코는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오늘날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리코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심적인 혼란을 겪고 있으며, 그에게 성공을 안겨준 유연한 행동이 인간성을 약화시킨 사례로서 당면한 전지구화된 시장 경제 하에서 직업(career)과 인간성(character)의 개념 변화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제빵사들, 자영업을 하다가 직장 생활을 경험한 술집 여주인, IBM의 해고자들을 주요한 사례로 오늘날 변화된 노동과 인성에 대한 개념들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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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논리의 창시자로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대한 검토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동정심의 중요성이 오늘날 더욱 절박하게 요청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은 새로웠다. 어쩌면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간의 주변화에 대한 사회적 치유책의 모색은 초창기부터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스미스의 예상은 불행히도 들어맞아 대량생산체제로 돌입되고, 그 후 금융자본 중심의 경제체제 하에서 인간과 노동의 경시는 점점 심해져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오늘날까지 전세계 경제활동인구를 짓누르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유연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기층 민중들에게 정리해고, 구조조정, 아웃소싱 등의 용어는 ‘삶의 불안’과 동의어가 되고 있는데, 이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가 유연성이다.) 세넷은 책 곳곳에서 단어의 어원들을 검토하면서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연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인데, 유연성은 애초 바람에 적응하는 나무의 모습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의미였다고 한다. 긍정적인 의미였음을 전제로 세넷은 유연성에 대한 논의들을 고전 속에서도 살펴보고 있는데, 이러한 접근은 그다지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 ‘유연성’이 아니라 ‘인간존중의 정신이 결여된 불안정성’이기 때문에 이는 자본가들이 의도적으로 단어에 내포된 함의와 달리 자신들의 이윤추구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작위적이고 악의적인 언어선택일 뿐이다. 그 결과 유연성에 대한 설명에서도 세넷은 역시 ‘조직의 비연속적 개혁, 생산의 유연전문화, 중앙집중이 없는 힘의 결집’이라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기업체에서는 평생직장 개념을 통해 노동자들의 회사에 대한 헌신과 몰입을 유도해내던 인사관리방식을 거부하고, 팀제의 도입, 단기적인 성과추구 및 그에 따른 ‘리스크’ 감행 등 노동시장 내부에서의 활발한 이동을 추진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추구에 따른 활발한 이동은 (노동자들을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고 있기에) 실업률은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하지만 빈번한 이동과 달리 노동자 내부의 소득격차는 악화되고 있다. 임금노동자간 소득격차와 실업률 이 두 가지는 사실상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호 이율배반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정부는 임금격차와 실업률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조절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노동시장의 상황을 보여주는 통계자료로서 실업률은 공식적으로 빈번히 활용되고 있지만 노동자간 소득격차는 참고자료 정도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에서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노동시장 정책들을 추진하면서 실업률을 낮췄다는 이유만으로 서유럽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넷 역시 미국과 영국의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까운 실업률을 언급하면서 독일, 프랑스 등과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이직한 후에 임금이 상승하기보다 줄어드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를 다른 맥락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내용들이 일관되게 서술되었으면 보다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세넷의 노동윤리에 대한 정의와 설명은 일종의 동어반복적인 순환논리인 것 같은 점이 아쉽다. 노동윤리란 ‘만족을 자제하고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기 위한 자기훈련’(141쪽)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정의는 세넷이 주로 인용하고 있는 중세 기독교의 입장에 근거한 정의라는 생각이 든다. 헤시오도스나 베버의 노동과 직업윤리에 대한 검토에 근거하면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인간형’과 개인주의의 자본주의적 탄생을 고찰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인간형에 기초한 노동윤리가 유연성의 하나로 추진된 팀작업(미 노동부 주도의 SCANS) 속에서 권위없는 권한을 통한 게임으로 ‘아이러니한 인간형’이 출현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와 같은 사회는 정상적이지 못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윤리라는 것이 왜 만족을 자제하고,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어 보인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와 같은 윤리를 언급하는 것은 효과적일지 모르겠으나 스스로 애덤 스미스를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의 인간성 파괴의 속성의 고찰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가 세넷의 정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의 단기적인 속성과 유연성이 ‘직업에서 하나의 일관된 인생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방해한’(177쪽)다는 점을 지적하고, 어쩌면 오늘날의 신경제 하에서 노동윤리나 직업윤리와 같은 것이 당연히 필요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점은 ‘노동윤리’, ‘실패’ 부문을 일관되게 이어주는 점은 장점일 것이다. 그리고 노동윤리의 부재와 직업개념의 변화 속에서 ‘적기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던’ 자신에게서 실패와 정리해고의 원인을 찾고 있는 점을 밝혀내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세넷이 ‘포스트모던’한 입장을 따르고 있지는 않는 것 같지만 “처음부터 일관된 인생 이야기는 있을 수 없으며, 이야기 전체를 조명해줄 만한 특별한 변화의 순간도 명확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포스트모던한 설명방식의 장점을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이는 가장 마지막 장이 ‘우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라는 단어가 지닌 전체주의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은 포스트모던한 사람들의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 매우 유사한 논리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노조조직률이 낮고, ‘자본’의 횡포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거의 없으며, 노동조합 역시 노동3권의 강화보다는 조합원들에게 서비스 제공과 같은 유인책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려는 노조주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정책들이 왜 성행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IBM에서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남성들의 이야기에서 밖으로 나가는데 실패하였기에 ‘퇴물’이라는 평가에 대해 분노보다는 일종의 체념을 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과거 전통적인 직업과 인간성에 대한 정의를 거부하고 새롭게 주조해냄과 동시에 저항과 불만 자체를 봉쇄하는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개개인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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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사람들
케빈 베일스 지음, 편동원 옮김 / 이소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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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베일스의 <일회용 사람들>은 오늘날 노예노동이 없다는 일반인들의 상식을 노예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변형되어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책이다. 그 핵심적인 주장은 현대사회 노예가 과거사회의 노예와의 가장 큰 차이는 ‘일회용’이라는 데에 있다. 과거 노예들은 재산과 같이 취급되어 보살핌을 받았는데 오늘날의 노예들은 과거의 노예보다도 못한 존재로써 단기간 노동력을 착취하고 나면 일회용품처럼 폐기된다는 점에서 보다 극악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마찬가지로 보자면 과거의 노예주인들이 훨씬 ‘인간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화 시대에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종신노예도 사라지고 있다. 이는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노예를 구입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유리하기 때문이다.(46쪽) 저자는 노예제가 현대에까지도 - 특히 저발전국가에서 - 지속되고 있는 원인으로, 인구폭발과 세계화 경제, 영농의 근대화, 부패한 사회질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자리 부족에 따른 노동력의 과잉공급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세계화 경제는 수익이 남는 곳이면 어디든, 어떤 조건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투자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의 삶과 조건들에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저발전국가에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현대판 노예’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 때가 와야만 가능할 것이다.

태국의 어린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통한 매매춘 사업의 번창은 얼마전까지 우리 나라에서도 종종 들었던 익숙한 이야기였다. 부모가 가난을 이유로 ‘하찮은’ 딸을 팔아버리고 여자 어린이들은 소수 성공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몇 년간 성노예 생활을 한 이후에는 매춘업자들에게 버려지고 떠돌다가 죽는다. 모리타니의 경우는 현대판 노예가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과거의 노예제와 사실상 다를바 없어 보였다. 즉 베일스가 정의한 ‘일회적’ 관계 보다는 훨씬 나은 ‘온정적’ 관계에 기반을 둔 노예제였다. 인종적인 차이가 노예여부를 결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 인권 혹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리타니 자체의 제도의 미성숙에서 기인한 것 같으며, 노예들 역시 이와 같은 노예제가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고민도 없을 뿐 아니라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브라질 목탄가마의 채무노예는 단순한 속임수에서 비롯되고 있다. 도시에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고립된 작업장에서 단지 빚을 졌다고 말하니까 빚을 갚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은 고립된 몇 년간 고립된 힘든 노동을 한 이후에는 버려지고 있다. 파키스탄의 벽돌가마의 사례는 브라질과 거의 유사한데 파키스탄에서는 아동노동이 채무관계를 통해 노예노동으로 동원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신의 현대판 노예제라는 규정이 과장된 것이 결코 아님을 강조하지만 사실 과장된 주장이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 마찬가지로 <빈곤의 경제>에서 살펴본 것처럼 저임금 서비스노동의 쳇바퀴에서 사실상 벗어날 수 없는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의 서비스노동자들도 인신구속만 없지 모두 ‘현대판 노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 브라질, 파키스탄, 모리타니 등의 사례들에서도 타의에 의한 인신구속의 성격은 그리 강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속성이 ‘노예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급진전되면서 저임금 서비스직종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전무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급급한 비정규노동자들의 양산을 보고 있노라면 취업시장에서 상위부문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예라고 할 수 있지만 변화된 세계질서와 변화된 노동시장의 조건에서는 새로운 규정이 필요하다. 신규일자리 창출은 줄어들면서 양질의 일자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노동력의 공급과잉은 노동자들의 처우의 급격한 하락 및 고용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조업 성장의 한계와 서비스산업의 팽창 현상에서 노동력 구조변화에 대해 의 매그도프는 “일회용 노동자(disposable work)"라고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베일스의 이 책은 다소 저널리즘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라 생각되며, 새로운 노예제는 ‘노예제’가 아니라 새롭게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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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국주의 한울아카데미 737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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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의 『신제국주의』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확실한 상황에서 석유를 둘러싼 미국의 패권전략을 시-공간적인 변화에 따른 전세계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모과정을 분석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들은 저자 스스로가 명명하고 있는 ‘역사-지리적 유물론’적인 관점과 세계체계 분석에서 빈번히 활용되고 있는 ‘장기 지속’의 관점(주로 지오반니 아리기의 분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을 통해 전개되고 있다. 주요한 분석적 개념으로 자본의 순환과 유통에 따른 ‘공간적 조정’(spatial fix)과 자본축적, 그리고 축적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고전적인 제국주의론과 그 결과로서의 ‘강탈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이 활용되고 있다. 19세기 말 전개된 제국주의가 영토적 침략과 정복을 전제로 한 피식민지역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이었다면 하비가 ‘신제국주의’라고 지칭하고 있는 오늘에는 영토적 침략과 같은 거부감을 주는 방식은 사라지고 ‘세기’와 같은 시간적 개념의 확장 하에서 어떻게 정치적 헤게모니와 경제적 헤게몬이 재편․관철되면서 (정치권력 차원에서) 비가시적인 제국주의적 침략이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고전적 제국주의의 속성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이와 같은 부르주아적인 자본순환의 위기 돌파 전략은 끊임없는 저항투쟁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신제국주의』의 핵심 분석 대상인 미국은 헤게모니 확보를 통한 동의를 얻어내기 보다는 강제에 의한 동의를 얻어내고 있다.

이라크 전쟁의 본질은 전적으로 석유와 관련된 것일 뿐이라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을 하비 역시 인정하고 있는데, 현상적인 기술에 그치지 않고서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며 제국주의와 미국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하비는 다소 모호한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로 지칭하면서 이를 다시 국가와 제국의 정치‘와 ’공간과 시간에서 자본축적의 분자적 과정‘이 모순적 결합된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미국의 권력을 설명하면서 영토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를 통해 설명한다. 그런데 영토의 논리의 설명들은 정치․군사적인 설명들인데, ’영토‘라는 단어와 ’자본‘이라는 단어의 층위가 다르기에 다소 어색한 구분이라는 생각이다. (하비의 지리학적 background가 이와 같은 용어를 통한 구분을 선호한 것 같다.)

제국주의에 대한 기존의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레닌의 ‘자본주의의 마지막(최고의) 단계’였는데, 하비는 레닌의 견해보다는 아렌트의 ‘부르주아 정치 통치의 첫 번째 단계’라는 주장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레닌의 견해를 따르자면 오늘날 역시 제국주의이고, 따라서 ‘신제국주의’라는 용어를 굳이 따로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구제국주의’와의 차이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필요할 것인데, 아렌트의 견해는 제국주의의 변화된 양상들을 새로이 분석하는데 있어 아주 유용한 설명방식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접근은 이그나티에프의 ‘옅은 제국(empire lite)’에 대한 설명 등과 이어지면서 하비 논의에 일관성을 더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186-70년대의 첫 번째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이후, 1930년대 초반, 197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주기적 공황’ 국면에서 부르주아들은 항상 위기 타개를 위한 시도 역시 끊임없이 행하고 있다. 수업의 첫 번째 텍스트의 저자인 프리드먼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최소한의 개입과 시장질서의 전면적인 관철을 주장하지만 하비가 보기에는 오늘날 미국 중심의 신제국주의적 질서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 타개 전략은 사실상 ‘국가’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뒷받침된 금융자본의 개입”(134쪽)을 통한 축적과 이와 같은 “국가권력과 금융자본의 포식적 측면들 간의 부정한 동맹은... 경멸적 자본주의의 단면”(134쪽)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기업농들이 비용의 20%를 정부로부터 보조받고 있다는 사실은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자유무역 증진을 위한다는 국제기구의 경우에도 “실제 부유한 국가들이 보다 빈곤한 국가들에 대해 집합적인 이점을 유지하는 부당한 무역을 요구”(132쪽)하고 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강탈에 의한 축적의 전형적인 예로 설명되고 있는 민영화를 살펴보자. 하비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의 과잉축적의 위기에 따른 잉여자본의 활용을 위한 전략으로서 등장한 것이 민영화이다. 하지만 공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자신의 물적인 기반을 스스로 폐기하는 역설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민영화의 추진주체 역시도 정부라는 점, 즉 민영화 역시도 정부(국가)주도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국가개입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있음에도 사실은 민족주의와 결부된 형태로 국가주의의 시장적 변형일 뿐인 듯하다. 강탈에 의한 축적을 확대재생산과 연계시키는데 있어서도 국가권력이 끊임없이 금융자본 및 신용기관들을 지원하면서 가능해진다(148쪽). 오늘날 시장을 제외한 나머지 사회적인 영역과 주체들을 파괴로 내몰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 하에서도 국가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인 듯 하다.

끝으로 하비의 논의에서 불만족스러운 점 한 가지를 지적하고 끝내겠다. 하비는 1970년대 신자유주의 흐름 이후의 강탈에 의한 축적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금융적 권력에 천착하고 있다. 오늘날을 금융자본운동의 투기적 속성에 대한 언급이 간과된 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비는 자본운동의 흐름을 설명하면서 영토적 속성을 ‘지리학자’로써 강조하고 있는데 금융자본에 대해서도 “금융적 권력의 영토적 집중”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역시 지리적 경계에 기반한 국가 차원의 설명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오늘날 소위 초국적 금융자본의 운동에 대해서 ‘영토적 속성’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을 지에 대해서는 보다 진지한 토론이 필요할 것 같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함께 비약적으로 팽창한 금융자본에 국적과 같은 영토적 속성들이 얼마나 있을까? 동시에 생산을 통한 가치의 실현이 아니라 기대가치 혹은 부풀려진 가치를 무한증식하는 금융자본의 실물적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영토’와 같은 ‘구제국주의’ 분석틀로써 계속 설명을 해 나가는 것에는 한계가 상당히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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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트(50pcs-Tin) 책에 손상을 주지 않는 얇은 책갈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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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트에 대한 상품평이 좋고, 또 평소 포스트Ÿ堧?너덜너덜해져 가는 게 보기 싫은 상태에서 상품을 구입하였다.

아래에 누군가가 2개를 구입하였다고 해서, 나도 세일할 때 2개를 주문했다.

그런데 다른 책과 함께 주문한 북다트는 하나만 달랑 보내왔다.

알라딘 배송에 지금껏 만족하고 있었는데 이런 황당한 실수는 첨 당해봐서 나도 당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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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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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주변 사람들과 책의 제목인 <현대가족 이야기>를 가지고서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책을 읽지 않은 경우에는 대부분 '현대'를 modern 혹은 contemporary의 뜻으로 이해하여, 오늘날 가족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 책 정도로 생각하였다. 어쩌면 이러한 '오해'는 당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책 제목의 '현대'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현대'라는 대기업, 그 중에서도 '현대자동차'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다.

현대자동차, 현대차 노동자, 그리고 현대차 노동자 가족

현대자동차, 이는 단순히 우리 나라 최대의 자동차생산공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계에서 '현차'라고 했을 때는 우리 나라 대공장 노동운동의 일종의 '상징'이다. 현대자동차는 비단 노동계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제조업에서도 일종의 '상징'이다. '현대자동차'는 우리 사회에서 대공장·전투적 노동운동·정규직 노동조합의 상징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매년, 보수언론에서 현대자동차의 임금인상투쟁에 온갖 마타도어를 동원해 노동운동에 타격을 가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보수 언론이 현대차 노조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비정규 노동자들을 '배려'하는지를, 이를 위해 '정규직'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현재의 상황에서 노동운동 진영이든, 자본가 진영이든 현대자동차 노조의 활동과 투쟁, 그리고 현대차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과 그들의 연봉에 관심을 쏟아왔다. 현대차의 임금인상률은 회사의 여력과 상관없이 경총과 조율해야 했으며, 중요한 노동계 현안에 우리는 현대차 노조에 시선을 집중하였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현대차의 노동자들도 우리 사회의 노동자이며, 그들에게는 이런 외부의 시선과 상관없는 일상생활이 있고, 우리 사회의 노동자로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보편성과 함께 현대 계열사들이 몰려 있는 울산에서는 또한 독특한 노동자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또한 교대제 근무제인 현대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들만의 문화적 틀거리를 형성한다.

지은이는 이 책을 집필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남편은 현대자동차의 생산직 노동자로서 일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이다. 남편과 함께 울산에서 사는 동안 두 아이를 키워가면서 주변의 '아줌마'들과 같은 생활을 해 왔다. 두 아이가 커 가는 과정에서 다시 학업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여타 노동자의 '아내'들과 다를 수 있지만 공부하는 과정에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남편과 남편의 회사에 대해서도 성찰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현대차와 현대차 노조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는 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현대차 노동자들의 가족, 그 중에서도 특히 남성노동자들의 아내의 삶과 생각에 눈을 돌리게 한다. 이는 어쩌면 잊고 있었던,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주체들을 되살려 놓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출발은 지은이가 경험한 울산에서의 삶이다. 주-야 맞교대 근무를 시행하는 현대차 공장의 생산시스템은 비단 노동자들 뿐 아니라 가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지은이가 직접 겪어야했던 삶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남편이 밤샘 야간노동을 마치고 아침에 집에 들어오면, 아침상을 차려 주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밤을 샌 남편이 숙면해야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집에 들어가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들 때문에 남편이 자고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는 게 꺼려졌다."(43쪽) 이와 같은 '가정중심성'을 기초로 해서 18명의 '아내'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가족임금과 스위트 홈 이데올로기"

결혼과 함께 이들은 거의 모두 전업주부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 두 명의 자녀를 가진다. 비슷한 수입에 비슷한 주거조건 속에서, 그리고 남편들의 교대근무 속에서 이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아버지로서의 남편'은 노동을 통해서 가족을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어머니로서의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이 생계를 유지하는데 불편함을 끼쳐서는 안된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집안에 검은 커튼을 다는 배려"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현대가족'에서는 거의 완벽한 성별분업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가끔 집안일만 하는 '아내'는 일을 하고 싶어하지만 '30대 고졸 기혼 여성'이 벌어올 수 있는 수입은 남편이 "(휴일)특근 두 번만 하면" 되는 정도이다. 이 과정에 '전업주부 공동체'는 더욱 더 공고화되고 있다. 한 편으로 1998년 한 차례 정리해고와 장기휴가의 파도가 휩쓸고 간 '울산'에서는 "짤리기 전에 확실히 벌어두자"는 생각이 구성원 모두에게 각인되어 있다. 특근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라 '경기'가 좋을 때만 가능하다. 과로사에 대한 위기감은 부부 모두에게 심각한 고민이다. 높은 노동강도에 시달리고 대화는 단절되어 있는 노동자 가족이 행복하기만 한 가정일까?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맞교대 근무에 따른 건강의 악화는 회사로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다. 대규모 장치산업의 특성상 생산이 가능한 기간동안 최대한 공장가동을 해서 이윤을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가족의 위기'가 재생산되는 과정은 회사 차원에서 노동자 개인의 위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대응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즉, 가족의 위기를 방치하는 순간 생산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저자는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에 대한 실증적 증거로 저자는 노동자 가족의 부인을 대상으로 한 '행복한 가정 만들기'라는 회사의 문화교실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가 그 회사원 가족에게 제공하는 갖가지 문화적·교육적 혜택이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부계 가족질서를 확고히 하는 한편, 더 큰 부계 권력인 회사에 대해서도 복종심과 충성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함께 전근대적인 의미에서 '가족'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전 가족이 수행한 교육의 기능, 재생산의 기능, 체제유지의 가부장제적인 기능 등에서 현대 사회에서는 재생산의 기능만이 주요하게 남고 나머지 기능들은 사회로 포섭되면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공장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해서 가족은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완벽하게 부활하고 있다. 이는 전근대(pre-modern)의 복권으로 해석해야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에 적합한 가족유형의 재창조인가? 아니면 서두에서 말한 고유명사로서의 '현대'가 보통명사화되어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대가족'(modern family)인가? 이제 책제목의 '현대'는 '현대자동차'의 의미를 넘어서면서 중의적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따뜻한 시선과 날카로운 비판

이 책은 저자의 논문을 위한 인터뷰들이고 중간중간 관련된 사회문제들에 대한 연구경향들에 대한 소개와 평가들이 있지만 결코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압축적 자본주의 성장의 상징인 현대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의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가정중심성'을 통해 어떻게 지탱되고 있는가를 일관된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 '현대차 노동자의 아내'로서 노동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이 사회와 현대자동차라는 회사, 그리고 노조·노조활동가들의 가부장제적인 경향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돋보인다. 자본가 진영과 보수언론의 '무지의 소치'나 사실의 의도적인 무시에 기댄 비판과 달리 경청할 부문이 적지 않다. 마지막으로 비정규 노동 문제에 주된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정규직 노동자 가정과 하청 노동자의 가정의 차이에 대해서도 앞으로 주목하였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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