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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리차드 세넷 지음, 조용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세넷은 이 책에서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진지하게 성찰하고서 그 내용을 다양한 학문적 논의들 속에서 세심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자신이 과거 인터뷰했던 빌딩 관리인의 아들 리코가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리코는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리코는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오늘날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리코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심적인 혼란을 겪고 있으며, 그에게 성공을 안겨준 유연한 행동이 인간성을 약화시킨 사례로서 당면한 전지구화된 시장 경제 하에서 직업(career)과 인간성(character)의 개념 변화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제빵사들, 자영업을 하다가 직장 생활을 경험한 술집 여주인, IBM의 해고자들을 주요한 사례로 오늘날 변화된 노동과 인성에 대한 개념들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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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논리의 창시자로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대한 검토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동정심의 중요성이 오늘날 더욱 절박하게 요청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은 새로웠다. 어쩌면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간의 주변화에 대한 사회적 치유책의 모색은 초창기부터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스미스의 예상은 불행히도 들어맞아 대량생산체제로 돌입되고, 그 후 금융자본 중심의 경제체제 하에서 인간과 노동의 경시는 점점 심해져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오늘날까지 전세계 경제활동인구를 짓누르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유연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기층 민중들에게 정리해고, 구조조정, 아웃소싱 등의 용어는 ‘삶의 불안’과 동의어가 되고 있는데, 이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가 유연성이다.) 세넷은 책 곳곳에서 단어의 어원들을 검토하면서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연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인데, 유연성은 애초 바람에 적응하는 나무의 모습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의미였다고 한다. 긍정적인 의미였음을 전제로 세넷은 유연성에 대한 논의들을 고전 속에서도 살펴보고 있는데, 이러한 접근은 그다지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 ‘유연성’이 아니라 ‘인간존중의 정신이 결여된 불안정성’이기 때문에 이는 자본가들이 의도적으로 단어에 내포된 함의와 달리 자신들의 이윤추구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작위적이고 악의적인 언어선택일 뿐이다. 그 결과 유연성에 대한 설명에서도 세넷은 역시 ‘조직의 비연속적 개혁, 생산의 유연전문화, 중앙집중이 없는 힘의 결집’이라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기업체에서는 평생직장 개념을 통해 노동자들의 회사에 대한 헌신과 몰입을 유도해내던 인사관리방식을 거부하고, 팀제의 도입, 단기적인 성과추구 및 그에 따른 ‘리스크’ 감행 등 노동시장 내부에서의 활발한 이동을 추진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추구에 따른 활발한 이동은 (노동자들을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고 있기에) 실업률은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하지만 빈번한 이동과 달리 노동자 내부의 소득격차는 악화되고 있다. 임금노동자간 소득격차와 실업률 이 두 가지는 사실상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호 이율배반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정부는 임금격차와 실업률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조절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노동시장의 상황을 보여주는 통계자료로서 실업률은 공식적으로 빈번히 활용되고 있지만 노동자간 소득격차는 참고자료 정도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에서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노동시장 정책들을 추진하면서 실업률을 낮췄다는 이유만으로 서유럽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넷 역시 미국과 영국의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까운 실업률을 언급하면서 독일, 프랑스 등과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이직한 후에 임금이 상승하기보다 줄어드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를 다른 맥락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내용들이 일관되게 서술되었으면 보다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세넷의 노동윤리에 대한 정의와 설명은 일종의 동어반복적인 순환논리인 것 같은 점이 아쉽다. 노동윤리란 ‘만족을 자제하고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기 위한 자기훈련’(141쪽)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정의는 세넷이 주로 인용하고 있는 중세 기독교의 입장에 근거한 정의라는 생각이 든다. 헤시오도스나 베버의 노동과 직업윤리에 대한 검토에 근거하면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인간형’과 개인주의의 자본주의적 탄생을 고찰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인간형에 기초한 노동윤리가 유연성의 하나로 추진된 팀작업(미 노동부 주도의 SCANS) 속에서 권위없는 권한을 통한 게임으로 ‘아이러니한 인간형’이 출현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와 같은 사회는 정상적이지 못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윤리라는 것이 왜 만족을 자제하고,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어 보인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와 같은 윤리를 언급하는 것은 효과적일지 모르겠으나 스스로 애덤 스미스를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의 인간성 파괴의 속성의 고찰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가 세넷의 정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의 단기적인 속성과 유연성이 ‘직업에서 하나의 일관된 인생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방해한’(177쪽)다는 점을 지적하고, 어쩌면 오늘날의 신경제 하에서 노동윤리나 직업윤리와 같은 것이 당연히 필요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점은 ‘노동윤리’, ‘실패’ 부문을 일관되게 이어주는 점은 장점일 것이다. 그리고 노동윤리의 부재와 직업개념의 변화 속에서 ‘적기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던’ 자신에게서 실패와 정리해고의 원인을 찾고 있는 점을 밝혀내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세넷이 ‘포스트모던’한 입장을 따르고 있지는 않는 것 같지만 “처음부터 일관된 인생 이야기는 있을 수 없으며, 이야기 전체를 조명해줄 만한 특별한 변화의 순간도 명확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포스트모던한 설명방식의 장점을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이는 가장 마지막 장이 ‘우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라는 단어가 지닌 전체주의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은 포스트모던한 사람들의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 매우 유사한 논리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노조조직률이 낮고, ‘자본’의 횡포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거의 없으며, 노동조합 역시 노동3권의 강화보다는 조합원들에게 서비스 제공과 같은 유인책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려는 노조주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정책들이 왜 성행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IBM에서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남성들의 이야기에서 밖으로 나가는데 실패하였기에 ‘퇴물’이라는 평가에 대해 분노보다는 일종의 체념을 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과거 전통적인 직업과 인간성에 대한 정의를 거부하고 새롭게 주조해냄과 동시에 저항과 불만 자체를 봉쇄하는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개개인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