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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책을 읽고 나서 주변 사람들과 책의 제목인 <현대가족 이야기>를 가지고서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책을 읽지 않은 경우에는 대부분 '현대'를 modern 혹은 contemporary의 뜻으로 이해하여, 오늘날 가족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 책 정도로 생각하였다. 어쩌면 이러한 '오해'는 당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책 제목의 '현대'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현대'라는 대기업, 그 중에서도 '현대자동차'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다.
현대자동차, 현대차 노동자, 그리고 현대차 노동자 가족
현대자동차, 이는 단순히 우리 나라 최대의 자동차생산공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계에서 '현차'라고 했을 때는 우리 나라 대공장 노동운동의 일종의 '상징'이다. 현대자동차는 비단 노동계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제조업에서도 일종의 '상징'이다. '현대자동차'는 우리 사회에서 대공장·전투적 노동운동·정규직 노동조합의 상징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매년, 보수언론에서 현대자동차의 임금인상투쟁에 온갖 마타도어를 동원해 노동운동에 타격을 가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보수 언론이 현대차 노조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비정규 노동자들을 '배려'하는지를, 이를 위해 '정규직'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현재의 상황에서 노동운동 진영이든, 자본가 진영이든 현대자동차 노조의 활동과 투쟁, 그리고 현대차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과 그들의 연봉에 관심을 쏟아왔다. 현대차의 임금인상률은 회사의 여력과 상관없이 경총과 조율해야 했으며, 중요한 노동계 현안에 우리는 현대차 노조에 시선을 집중하였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현대차의 노동자들도 우리 사회의 노동자이며, 그들에게는 이런 외부의 시선과 상관없는 일상생활이 있고, 우리 사회의 노동자로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보편성과 함께 현대 계열사들이 몰려 있는 울산에서는 또한 독특한 노동자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또한 교대제 근무제인 현대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들만의 문화적 틀거리를 형성한다.
지은이는 이 책을 집필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남편은 현대자동차의 생산직 노동자로서 일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이다. 남편과 함께 울산에서 사는 동안 두 아이를 키워가면서 주변의 '아줌마'들과 같은 생활을 해 왔다. 두 아이가 커 가는 과정에서 다시 학업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여타 노동자의 '아내'들과 다를 수 있지만 공부하는 과정에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남편과 남편의 회사에 대해서도 성찰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현대차와 현대차 노조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는 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현대차 노동자들의 가족, 그 중에서도 특히 남성노동자들의 아내의 삶과 생각에 눈을 돌리게 한다. 이는 어쩌면 잊고 있었던,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주체들을 되살려 놓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출발은 지은이가 경험한 울산에서의 삶이다. 주-야 맞교대 근무를 시행하는 현대차 공장의 생산시스템은 비단 노동자들 뿐 아니라 가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지은이가 직접 겪어야했던 삶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남편이 밤샘 야간노동을 마치고 아침에 집에 들어오면, 아침상을 차려 주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밤을 샌 남편이 숙면해야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집에 들어가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들 때문에 남편이 자고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는 게 꺼려졌다."(43쪽) 이와 같은 '가정중심성'을 기초로 해서 18명의 '아내'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가족임금과 스위트 홈 이데올로기"
결혼과 함께 이들은 거의 모두 전업주부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 두 명의 자녀를 가진다. 비슷한 수입에 비슷한 주거조건 속에서, 그리고 남편들의 교대근무 속에서 이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아버지로서의 남편'은 노동을 통해서 가족을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어머니로서의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이 생계를 유지하는데 불편함을 끼쳐서는 안된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집안에 검은 커튼을 다는 배려"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현대가족'에서는 거의 완벽한 성별분업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가끔 집안일만 하는 '아내'는 일을 하고 싶어하지만 '30대 고졸 기혼 여성'이 벌어올 수 있는 수입은 남편이 "(휴일)특근 두 번만 하면" 되는 정도이다. 이 과정에 '전업주부 공동체'는 더욱 더 공고화되고 있다. 한 편으로 1998년 한 차례 정리해고와 장기휴가의 파도가 휩쓸고 간 '울산'에서는 "짤리기 전에 확실히 벌어두자"는 생각이 구성원 모두에게 각인되어 있다. 특근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라 '경기'가 좋을 때만 가능하다. 과로사에 대한 위기감은 부부 모두에게 심각한 고민이다. 높은 노동강도에 시달리고 대화는 단절되어 있는 노동자 가족이 행복하기만 한 가정일까?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맞교대 근무에 따른 건강의 악화는 회사로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다. 대규모 장치산업의 특성상 생산이 가능한 기간동안 최대한 공장가동을 해서 이윤을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가족의 위기'가 재생산되는 과정은 회사 차원에서 노동자 개인의 위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대응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즉, 가족의 위기를 방치하는 순간 생산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저자는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에 대한 실증적 증거로 저자는 노동자 가족의 부인을 대상으로 한 '행복한 가정 만들기'라는 회사의 문화교실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가 그 회사원 가족에게 제공하는 갖가지 문화적·교육적 혜택이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부계 가족질서를 확고히 하는 한편, 더 큰 부계 권력인 회사에 대해서도 복종심과 충성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함께 전근대적인 의미에서 '가족'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전 가족이 수행한 교육의 기능, 재생산의 기능, 체제유지의 가부장제적인 기능 등에서 현대 사회에서는 재생산의 기능만이 주요하게 남고 나머지 기능들은 사회로 포섭되면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공장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해서 가족은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완벽하게 부활하고 있다. 이는 전근대(pre-modern)의 복권으로 해석해야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에 적합한 가족유형의 재창조인가? 아니면 서두에서 말한 고유명사로서의 '현대'가 보통명사화되어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대가족'(modern family)인가? 이제 책제목의 '현대'는 '현대자동차'의 의미를 넘어서면서 중의적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따뜻한 시선과 날카로운 비판
이 책은 저자의 논문을 위한 인터뷰들이고 중간중간 관련된 사회문제들에 대한 연구경향들에 대한 소개와 평가들이 있지만 결코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압축적 자본주의 성장의 상징인 현대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의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가정중심성'을 통해 어떻게 지탱되고 있는가를 일관된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 '현대차 노동자의 아내'로서 노동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이 사회와 현대자동차라는 회사, 그리고 노조·노조활동가들의 가부장제적인 경향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돋보인다. 자본가 진영과 보수언론의 '무지의 소치'나 사실의 의도적인 무시에 기댄 비판과 달리 경청할 부문이 적지 않다. 마지막으로 비정규 노동 문제에 주된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정규직 노동자 가정과 하청 노동자의 가정의 차이에 대해서도 앞으로 주목하였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