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무크 : 성공하는 사람들의 옷차림 - 미 대선 판도까지 흔든 스타일링 경쟁력 한경무크
박영실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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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이미지로 상대를 뒤흔드는 메시지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읽고

 

미 대선 판도까지 뒤흔든 스타일링 경쟁력이라는 부제가 붙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라는 책을 연초에 읽고 말았다. 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읽고 싶어서 읽었지만 힘들게 읽은 책과 읽기 시작했는데 빨려들어거 읽어버린 책 또는 읽고말았다는 책이다. 그만큼 책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이미지로 선명하게 부각되면서 기존 개념이나 관념에 대한 통념이 깨지고 새로운 신념이 생기는 책이다. 옷입기 또는 옷차림이나 패션에 대한 고정관념을 말끔히 청소하고 새로운 감각과 통찰로 옷차림이나 패션을 재개념화시켜 각인시켜준 인상깊은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나만의 스타일과 브랜딩으로 2025년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패션은 단순한 옷차림을 넘어 삶과 일, 우리가 전하고자하는 메시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함축적 표현”(160)이자 우리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대중과 소통하며, 자신을 브랜딩하는 강력한 도구”(161)라는 결론적인 메시지를 인지하고 읽기 시작하면 훨씬 더 책속으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옷차림에는 그 사람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옷차림을 읽어내는 일은 옷차림을 통해 당사자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과정이다. 의도는 의중에 숨어 있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의상 스타일에 숨겨져 있기도 하다. 트럼프가 상대적으로 긴 빨간 넥타이를 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가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로 씌워진 붉은 모자를 쓰고 선거 캠페인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리스가 짙은 남색 슈트를 통해 전하고 싶은 정치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바이든이 전통적인 다크 블루 슈트에 깔끔한 흰셔츠를 차려입고 전해주고 싶은 의미는 무엇인가? 오바마가 해리를 지원하기 위해 예스 쉬 캔(Yes she can)”을 외치며 차려입은 네이브 슈트와 라이트블루 넥타이의 상징적 조합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스프리 검은색 사각백과 함께 로열 블루 컬러 정장을 즐겨입고 대중을 향해 환호하는 마거릿 대처는 어떤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현대적 슬림핏 정장과 선글라스로 조화를 이룬 뒤 스니커즈 캐주얼을 신은 에마뉘엘 마크롱은 자신을 어떤 이미지로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아직도 전쟁중인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블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일관되게 국방색 옷을 입고 대중 앞에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 말했듯이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을 때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옷차림에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지위나 태도와 성격을 유추한다고 한다. 옷차림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상징적 정보가 들어있고, 그것이 내가 표출하고 싶은 이미지를 상대방에게 메시지로 전달한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섬유학자 아이커(Joanne Eicher)옷차림을 제의 피부혹은 가시적 자기’”(44)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정치인의 옷차림 전략을 단순한 개인적 선호도나 취향을 넘어선다. “정치인의 옷차림 전략은 단순한 패션을 선택을 넘어선다. 유권자에게 전달되는 시각적 메시지를 통해 정치인의 신뢰성, 전문성, 성향을 강화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48)하기 때문이다. “옷은 단순히 몸을 감싸는 천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입고 메시지를 전달하며, 심지어 역사”(13)를 창조하는 패션 전략이다. 이처럼 패션은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제2의 언어이며, 취향을 드러내는 기호”(40)이다. 패션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나 취향을 해석할 때 구두언어로보다 더 강력한 제2의 언어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의도와 의중이 상대에게 효과적으로 의사소통되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말보다 정확하고 총보다 강한 패션 이노베이터, 코코 샤넬에게 배우다

 

1910년대 여성들 사이에서 난공불락처럼 불문율로 통하던 패션은 코르셋을 이용한 잘록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를 강조하는 스타일이었다. 파란을 일으키는 혁신은 언제나 불문율을 깨려는 도전과 용기에서 시작된다. 샤넬은 옷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옷은 나를 구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해방시켜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녀가 몸의 곡선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조이는 코르셋에서 몸의 곡선을 드러내지 않고 약간 여유 있으면서도 편안한 트위드 수트를 디자인한 것도 패션에 대한 그녀의 일관된 신념 때문이었다. 옷을 입어서 옷에 구속된 여성들에게, 옷을 입음으로써 잃어버렸던 일상의 자유를 복권시켜준 것이다. 트위드 수트를 입은 여성들은 거리를 자유롭게 걸으면서 활동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옷차림으로 구속된 여성들을 다른 패션 스타일의 창조를 통해 일상에서 해방감과 자유를 선물로 주는 패션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샤넬의 도발적인 용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그녀는 상복(喪服)이나 점원들이 입던 블랙 드레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기하고 1926년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를 발표했다. 또한 땅에 끌리던 긴 치마는 무릎 밑 5~10cm, 일명 샤넬라인까지 올라갈 정도로 짧아져(?) 여성들을 옷의 구속에서 해방시켰다. 1930년대 남성의 전유물이던 운동복용 옷감 저지(jersey)’로 여성용 평상복을 최초로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는 여성들이 옷 입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것을 넘어, 남성우월주의에 저항하는 혁신적 패션 스타일을 창조한 것이다. 샤넬은 언제나 패션 스타일에 지치지 않는 자기만의 열정을 담아냈다. 열정(passion) 없는 패션(fashion)은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유행으로 전락할 수 있고, 패션 없는 열정은 무모한 도전으로 추락할 수 있다. 열정(passion)과 패션(fashion)을 조화롭게 융합할 때 단순히 유행을 창조하는 패션디자이너를 넘어 패션이노베이터로 거듭날 수 있다. 샤넬이야말로 패션이노베이터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가방의 역사는 샤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샤넬의 숄더백은 1920년대 여성들의 손을 가방에서 해방시켜준 발명품이다. 샤넬 이전의 역사에서 여자들은 외출할 때 클러치백이나 도로시백(가방을 허리에 묶는 형태)을 항상 손으로 들고 다녀야만 했다. 샤넬은 다른 용도로 움직이고 싶은 손의 욕망을 포착했다. 어깨에 멜 수 있는 숄더백은 샤넬의 실용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이 의상에서 가방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성들은 가방에 묶여 있던 두 손으로 남성만의 소유물로 여겨지던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탈 수 있게 됐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과감하게 담배도 피울 수 있게 됐다. 가방에서 해방된 손은 단순한 손의 해방이 아니었다. 당시 여성들에겐 일상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삶의 혁명 그 자체였다. 샤넬은 말한다. “일부러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왜 한 가지 방식으로만 해야 하고, 다른 방식으로 하면 안 되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녀는 늘 일상에서 보고 느낀 점을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거기서 세상의 흐름을 뒤집는 역발상의 혁신적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위대한 패션 리더는 꾸미기의 모델이 아니라 가꾸기의 레전드다

 

옷차림은 옷으로 자신의 포장하거나 위장하는 꾸미기가 아니라 가장 자기다운 진면목이 드러나게 만드는 가꾸기.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죽 재킷 패션의 주인공, 엔비디아 CEO 젠슨 황, 최근 파격적인 패션 일탈을 선보이도 하지만 단벌 회색 티셔츠로 자신의 시그니쳐 패션 스타일을 고수하는 마크 저커버그,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에 청바지를 즐겨 입었던 스티브 잡스, 상황에 따라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돋보이게 만드는 일론 머스크의 무채섹에 고급스러운 재킷을 기반으로 절묘한 조합을 추구하는 패션 스타일은 결핍된 자신을 포장하는 꾸미기 전략이 아니라 자신의 독특한 강점과 고유한 스타일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가꾸기 전략이다.

 

살다 보면 자신이나 자신이 만든 작품을 꾸미거나 가꾸는 게 필요하다. 꾸미는 일은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장(包裝) 하거나 화장(化粧)해서 겉모습과 다르게 보이기 위한 가장(假裝)이나 위장(僞裝)이다. 이에 비해 가꾼다는 의미는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나 본질적 속성을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만든다는 의미다. 가꾸는 노력은 자기 입장이나 주장을 분명하게 확립함으로써 어제와 다른 성장, 즉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다. 꾸밈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자신이 어떻게 어울리거나 맞을지를 생각하는 꾸미기가 계속될수록 나는 없어지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 반복된다. 오십 후반전의 삶은 가장하고 위장하는 꾸미기의 삶과 결별하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가꾸기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가꾸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나다움이나 자기다움이 잘 드러나게 하거나 더 낫게 하는 일이다. 가꾸면 가꿀수록 자기다움의 쓸모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꾸미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살리는 의미보다 어떤 것을 덧붙이거나, 본래의 성질을 변화시켜 다른 것이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어서 과장이나 포장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점에서 꾸미는 문장은 남의 주장으로 자기 입장을 포장하는 노력이지만 가꾸는 문장은 자기 생각과 자기만의 언어로 문장을 건축,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 파장을 일으키는 애쓰기의 산물이다. 뭔가 다른 사람은 꾸미는 사람이 아니라 가꾸는사람이다! ‘꾸미는사람은 자신만의 칼라와 스타일이 없어서 자신을 감추기 위해 위장하고 변장한다. ‘가꾸는사람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칼라와 스타일이 더욱 드러나게 본질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꾸밀수록 자신의 본질이 감춰지지만 가꿀수록 자신만의 색다름이 드러난다.

 

흔히 가꿀 게 없으면 꾸미기 시작한다. 가꾸는 것은 굳이 꾸미지 않는다. 꾸민다는 것은 꿍꿍이속이 있어서 허위와 가장(假裝)으로 치장(治粧)하는 것이다. 꾸밈이 없고 자연 그대로의 정체가 드러날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지 말고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재능을 가꿔야 `나다운 나`가 된다. 꾸밈은 남다르게 드러내기 위한 안간힘이지만 가꿈은 색다름을 드러내려는 애쓰기다. 꾸밀수록 남달라지지만 가꿀수록 색달라진다. 꾸미는 노력이 반복될수록 남달라지기 위한 경쟁을 계속하지만 가꾸는 노력을 거듭할수록 색달라지기 위한 자기다움을 만들어나간다.

 

꾸미는사람은 남다름을 추구하고 가꾸는사람은 색다름을 지향한다

 

꾸민다는 것은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감추는 행위지만 가꾼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나의 모습으로 변신하기 위해 어제와 다르게 노력하는 모습이다. 꾸미는 사람은 남다르게 노력하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잃어버린다. 가꾸는 사람은 전보다 잘하려고 노력하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더욱 드러낸다. ‘꾸미는사람은 남다름을 추구하고 가꾸는사람은 색다름을 지향한다. 남다름은 추구할수록 더욱 치열한 경쟁 가도에 진입하지만 색다름을 추구할수록 더욱 치열한 자기 연마에 돌입한다. 꾸밀수록 꿈에서 멀어지지만 가꿀수록 꿈에 점차 가까워진다. 꾸미는 사람은 자기 색깔을 감추려는 컬러링(coloring)을 좋아하지만 가꾸는 사람은 자기 색깔을 더욱 드러내는 컬러풀(colorful)을 선호한다. 컬러(color)에서 나온 두 가지 형용사, 즉 자신을 위장하는 컬러링과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컬러풀은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쓰지 않으면 쓰임이 없다. 생각만으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꾸밀 것인지를 생각을 거듭해도 뜬구름 속의 공상과 망상만 가중될 뿐이다. 자기다운 문장을 가꾸는 노력은 무조건 쓰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길을 열어준다.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한 것을 일단 겉으로 표현해봐야 자기다운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색다르게 가꾸는지를 알 수 있다. 쓴 글을 보면 어느 부분이 지나치게 과장되었고 위장된 의미를 감추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가꾸기도 처음부터 자신에게 맞는 이상적인 패션 스타일을 책상에서 알 수 없다. 이런 저런 옷차림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봐야 옷이 말을 걸면서 내 몸에 어울리는 컬러와 핏감,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 스타일을 찾아낼 수 있다. 대작(大作)과 명작(名作)도 실패작으로 시작했다. 세상의 들은 남의 이야기로 꾸미지 말고 내가 겪은 경험으로 나의 이야기를 가꾸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할 때 가장 자기다운 스타일이 탄생된다.

 

가꾸는 사람은 자기만의 파워 드레싱 패션 법칙을 따라 대체불가능한 패션 스타일의 원본을 창조한다, 이 책에서는 FASHION의 이니셜 글자를 따라 자기만의 고유한 옷차림을 창조하는 패션 법칙을 제시한다. 원하는 이미지와 상황에 따라 알맞은 스타일을 창조하는 7가지 전략이 제시되어 있다.

 

F, Friendly(친근한), 친근한 이미지를 선호한다면, 진정성과 신뢰성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 스타일 지향하라

 

A, Ambitious(야심찬 스타일), 진취적인 이미지를 선호한다면, 목표지향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패션 스타일 추구하라

 

S, Stylish(세련된 이미지), 세련된 이미지를 선호한다면, 대체 불가능한 개성있는 스타일 창조하라

 

H, Harmonious(조화로운 이미지), 일관성있는 이미지를 얻고 싶다면, 조화롭고 일관된 패션 전략을 사용해라

 

I, Iconic(아이코닉한 스타일), 시대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싶다면, 역사적으로 기억에 남는 패선 스타일을 스스로 창조하라

 

O, Originality(의상의 독창성), 개성을 강조하고 싶다면, 창의적이고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개발하라

 

N, Novel(새로운 아이디어),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고 싶다면, 혁신적이고 새로운 패션 전략을 추구하라

 

옷차림은 군림(君臨)이자 강림(降臨)이다

 

옷차림은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링을 창조하는 군림(君臨)이다. 군림은 어떤 분야에서 절대적인 세력을 가지고 남을 압도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옷차림이 스타일리쉬하면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이미지로 드러나 상대에 전달되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로 압도하는 느낌을 준다. 옷차림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스타일리쉬한 감각에 담아 침묵이지만 우렁차게 전달하면서 소리없이 조용하게 울려퍼지는 무언의 메시지다. 옷차림 자체가 상대를 압도하는 군림으로 부각되는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옷차림은 나를 살리는 길(‘살림’)이며 꿈을 알리는 일(‘드림’, dream)이자 내가 그리워하는 미래를 그리워하는 그림이다. 나아가 옷차림은 나 스스로를 존중해주며 자존감을 올려주는 일(‘올림’)이자 공감과 공명작용을 일으키는 울림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의 극치(‘어울림’).

 

옷차림은 살림이다

 

옷차림은 한 사람의 스타일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다. 어떤 옷을 어떻게 입는 지에 따라 그 사람의 독특한 스타일이 고유하게 드러나 한 사람을 색다르게 살려낼 수도 있고, 잘 나가던 사람도 한 순간에 옷차림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옷차림은 사람의 진면목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가장 자기다운 스타일의 본질이자 핵심이다. 옷차림은 한 사람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그 사람의 핵심 경쟁력을 드높이는 전략적 발판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어떤 철학과 신념을 담아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지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하면 나를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촉발점이 숨어 있다. 옷차림은 살림의 다른 이름이다.

 

옷차림은 드림(dream)이다

 

옷차림은 한 사람이 이상적으로 꾸고 있는 꿈을 현실화시켜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옷차림에는 그 사람이 실현하고 싶은 꿈이 담겨 있다. 패션 리더들의 한결같은 옷차림에는 암묵적으로 자신이 꾸는 꿈을 대중에게 알려주는 기호가 담겨 있다. 잡스가 그랬고, 젠슨 황이 그러고 있다. 옷차림은 그 사람이 이상적으로 꾸는 꿈의 모습을 지금 여기서 구현한 이미지다. 옷차림을 관심을 갖고 관찰해보면 그 사람이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까닭이다. 내가 꿈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와 태도, 느낌과 생각으로 임해야 된다는 다짐과 각오가 숨어 있다. 그 다짐과 각오가 나도 모르게 내가 입는 옷에 고스란히 담긴다. 그 사람의 옷차림을 보면 그 사람의 드림(dream)이 보이는 까닭이다. 그 사람의 드림은 그 사람의 옷차림에 숨어 있다.

 

옷차림은 그림이다

 

그리움을 긁으면 글이 되고 그리면 그림이 된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만큼 그리움은 현실로 다가온다. 한 사람이 지향하고 추구하는 이상적 가치를 그리워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그리워하는 미래의 꿈이 현실로 구현된다. 혼돈이론에 프랙탈(frtactal)이라는 원리가 있다. 부분 속에 자기가 숨어 있다는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의 다른 이름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 보여도 일정한 패턴을 갖고 반복하는 규칙적인 모습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이 자라온 가족의 모습이 축소판처럼 담겨 있는 게 프랙탈이다. 옷차림 역시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옷차림에는 그 사람이 그리워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이미지로 농축되어 있다. 옷차림은 단순히 옷을 차려 입는게 아니라 내가 그리워하는 미래의 모습을 옷에 담아 있는 것이다. 옷차림은 그리워하는 모습의 강렬한 열망이 담겨 있는 이미지의 다른 이름이다.

 

옷차림은 올림이다

 

옷차림에는 나를 올려다보겠다는 다짐과 결연한 각오가 우렁찬 침묵으로 숨어 있다. 옷차림은 자신을 사랑하는 가장 숭고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소한 생각과 감정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가 입은 옷은 내 생각과 감정을 감싸는 피부다. 생각이 복잡하고 마음이 불안하면 피부가 반응을 보여주듯, 생각과 감정을 감싸안아주는 옷 역시 나를 존중하고 아껴주는 소중한 증표다. 옷차림이 천박해보이거나 상식에 맞지 않는다면 옷으로 감싸인 생각도 감정도 마찬가지다. 옷차림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숭고한 자세와 태도가 드러나는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다.

 

옷차림은 울림이다

 

누군가의 옷차림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각적으로 느낌이 온다. 그 사람의 옷차림이 나에게 울림으로 다가온다. 상대방의 패션코드가 나도 모르게 느껴지면서 그 사람의 옷차림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강한 울림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울림은 아무 때나 오지 않는다. 어떤 글이 나에게 울림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그 글에 대한 깊은 공감은 물론 신념과 가치관을 비롯한 많은 깨달음을 줄 때 불현 듯 다가올 때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옷차림이 나에게 울림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 사람이 추구하는 철학과 가치관, 컬러와 스타일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조화롭게 매칭되기 때문이다. 울림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서 그 사람 특유의 스타일링이 완벽하게 소화되었을 때 들리는 우렁찬 침묵의 목소리다. 옷차림은 울림을 주기 위한 강림(降臨)이나 마찬가지다.

 

옷차림은 어울림이다

 

어울리는 일은 모순과 모순이 만나면서도 어긋나지 않고 그 모순 속에서 조화를 찾아내는 엇비슷한 일이다. 나에게 어울리는 옷차림은 남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적으로 해봐야 알 수 있다. 경험해보지 않고도 머리로는 알 수 있지만, 경험해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다. 똑같은 옷도 누군가에게는 어울리지만 나의 스타일에는 조화로움이 나타나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양한 옷감과 패턴, 컬러와 나의 체형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옷을 입었을 때 핏감이 남다르고 몸이 감각하는 반응이 색다를 때 그 옷은 나에게 말을 걸며 다가온다. 나에게 어울리는 옷은 나도 모르게 끌리는 패션 스타일이다. 나는 지금 패션에 끌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끌리고 있는가? 뭔가에 끌려가는 사람은 자기 스타일에 맞지 않는 일을 마지못해 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뭔가에 끌리는 사람은 자신의 꿈과 욕망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나에게 끌리는 옷을 찾은 사람이야말로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은 사람이며,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 옷차림을 갖춘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끌림이 어울림이며 어울림이 아름다움이다!

 

패션 작품에는 창작자의 열정과 철학, 혼과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그래서 창작자의 컬러와 향기가 묻어난다. 반면 패션 상품은 고객의 욕망을 자극해 많이 팔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사고 싶고 갖고 싶은 욕망을 최대한 자극해야 한다. 그래서 상품은 신상품으로 끊임없이 대체된다. 대신 상품에 철학이 담기고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컬러가 담기면 명품이 된다. 다만 명품상품처럼 쉽게 탄생하지 않는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그대로 남는다.” 샤넬은 이렇게 말했다. 스타일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컬러가 담아내는 색다른 아름다움이다. 남다름이 아닌 색다름을 추구한 샤넬은 저절로 남달라진 것처럼 우리 모두는 대체 불가능한 스타일을 얼마든지 창조할 수 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옷차림 작품을 창조할 때 비교불가능하고 대체불가능한 나마의 고유한 스타일이 나다음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이 책은 세상을 움직이는 1% 리더들의 이미지 브랜딩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Only One 스타일을 창조하고 실천하며 연구해온 저자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자는 특히 CEO의 퍼스널 이미지, 브랜드 평판, 그리고 기업 이미지와의 관계를 직접 현장을 매개로 연구하고 개발하면서 현실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캐내며 리더들의 성공비밀을 옷차림에서 찾아 세상을 내편으로 만드는 PI(President Identity) 전문가로 활동한 결과를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오랫동안 옷차림에 대한 삶과 열정과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 만든 성공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라는 작품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뇌리에 명품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창조하는 옷차림에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가 곁에 두고 수시로 참고해야 될 참고서이자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패션은 단순한 옷차림을 넘어 삶과 일, 우리가 전하고자하는 메시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함축적 표현(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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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거북이 - 진성리더의 변화전략
윤정구 지음 / 잉걸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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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운명에 휩쓸리는 기성리더인가요? 사명으로 뒤흔드는 진성리더인가요? 급진 거북이: 진성 리더의 변화 전략을 읽고

 

 

너무 더워서 땀이 등에 폭포처럼 흘렀다. 참을 수 없어서 단숨에 마셨더니, 차가운 거품이 입속에서 작은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뛰었다. 삼키고 나자, 몸속에서 차가운 터널이 지나갔다”(47). 오가와 이토의 츠바키 문구점에 나오는 말이다. “너무 읽고 싶어서 손꼽아 기다리다 날이 밝았다. 참을 수 없어서 단숨에 읽었다. 차가운 통찰력이 뜨거운 열정에 버무려 천둥과 번개같은 깨달음이 온몸을 휘감았다. 깨달음으로 한 동안 줄달음쳤더니 온 몸에서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이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책은 윤정구 교수의 피와 영혼에 적신 글로 건축된 문장이 곳곳에서 중심을 잡고 있고, 고뇌하는 지식인의 뜨거운 심장에 걸려서 직조된 주장이 기둥을 이룬다. 고통을 무릅쓰고 밤을 새워 벼리고 벼린 깨달음의 언어가 새벽녘의 서릿발 이성에 얼렸다 심장을 파고들며 감각적 열정으로 녹아든다. 그 언어적 무게감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으로 거듭나며 시공간을 물들인다. 주장은 급진적이고 단도직입적이지만 근원에서 근본을 파고들며 폐부를 관통하는 언어의 탄환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하지만 여전히 살갗에 남긴 여진은 그칠 줄 모르고 진한 여운이 반복해서 내 몸을 방문한다.

 

급진거북이의 역설적(逆說的) 만남이 역설(力說)하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급진거북이가 만나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라는 책이 탄생했다. 책 제목은 상반된 이미지를 지닌 두 단어가 절묘하게 불협화음을 내뿜으며 의미를 심장에 품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라는 제목은 한줄로 제몫을 하기 위해 한평생 진성 리더십을 연구해온 윤정구 교수의 급진적 사유체계가 녹아든 상징적 증표다. 물론 급진(急進)은 급발진(急發進)이 아니다. 여기서 급진급진적인형용사이며,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과감한’, ‘양보할 수 없는’, ‘흔들리지 않는’, ‘근원적인이거나 근본적인등과 같은 형용사의 다른 이름처럼 들린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 처음에는 거북하게 다가오겠지만 책을 읽어보면 급진거북이를 만나야 근원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급진 거북이라는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에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따르고 지키는 급진주의자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실현되기 전의 약속상태인 존재목적을, 과업을 통해 실현하는 일에서는 할 수 있는 것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에서, 지금 가진 것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경계 울타리를 정해놓고 거북이처럼 시작한다. 거북이처럼 실행해 어느 정도 달성되면 달성된 상태를 지렛대로 삼아 다시 경계의 범위를 확장시킨다”(114). 즉 목적은 급진적이지만 목적에 이르는 여정에는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꾸준히 걸어가겠다는 결연한 각오와 의지가 역설적(逆說的)으로 만나 평범하지만 비범하게 역설(力說)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욥기, 8:7)는 성경말씀처럼 진성리더는 목적에 대해서는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헌신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실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꾸준하고 차분하고 조용히 움직인다”(19).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 보면 사회과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위대한 숙제를 내준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낸 다음 그걸 실천하라(Think of an Idea to Change our world. And put it into Action).” 많은 학생들이 어렵고 힘들며 불가능한 과제라고 하지만 트레비라는 학생은 자신의 주변 세 명을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세명에게 내가 한 것처럼 세 명을 변화시키는 미션을 준다. 3명이 9명으로, 9명이 27명으로, 다시 27명이 729명으로 확산되면서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한 점진적 변화의 흔적이 축적되면서 마침내 세상이 바뀌는 기적을 이루는 변화전략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미약한 모닥불로 시작했지만 종국에는 걷잡을 수 없는 들불로 번지는 불길처럼 급진 거북이는 요란하게 시작하지 않는다. 반대로 급진적 급진성을 가진 리더들은 모든 과제에는 단기적 답이 있다”(21)고 믿고, 단기업적주의로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십을 발휘하며 성과목표 달성을 위해 무자비하게 밀어붙인다. 이들은 목적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자리보전에 유리한 단기목표 달성을 위해 진정성보다는 무자비한 급진성으로 성과 목표 달성에 매진하다 결국 자신은 물론 조직도 위기에 빠지고 만다.

 

리더십은 진성리더십과 진성리더십이 아닌 리더십, 두 가지 뿐이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시집 제목이다. 윤정구 교수를 알기 전에는 목적경영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하지만 윤정구 교수를 알고 난 후에는 목적경영 없이 인생경영을 하기 어려워졌다. 이미 황금수도꼭지: 목적경영이 만들어낸 기적을 읽고 나서 목적경영은 사람과 기업을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경영혁명이기 전에 존재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소명에 따라 자기 사명을 다하는 존재혁명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리뷰 참고https://blog.naver.com/kecologist/221295875618).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진성 리더십등과 같은 책에 이어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을 포함, 진성리더십으로 목적경영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윤정구 교수에 따르면 진성리더는 잘못된 리더십으로 산성화된 대한민국, 사회, 회사, 개인에 변화를 개간하는 현능한 전략가”(10). 글은 삶을 능가할 수 없다. 진성리더십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윤정구 교수는 스스로 진성리더는 좁은 문을 통과해 목적에 대한 믿음으로 무장한 쇄빙선을 앞세워 고난을 뚫는 사건”(24)의 주인공임을 증명해왔다. 스스로 진성리더의 삶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진성리더십의 본질과 핵심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문장을 건축할 수 없다.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 안에는 윤정구 교수가 한평생 고뇌하며 진성리더의 진정성과 진정한 사명과 소명이 무엇인지를 몸을 던져 밝혀내는 과정에서 체득한 깨달음의 얼룩과 무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마트폰은 아이폰과 아이폰이 아닌 두 가지 밖에 없듯이, 리더십에는 진성리더십과 진성리더십이 아닌 것 두 가지 종류 밖에 없다. 다른 리더십은 리더가 갖춰야 할 저마다의 필요조건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필요조건을 다 갖춘다고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반면에 진성리더십은 리더에게 필요한 충분조건을 내재화시켜 품성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진성리더십만 갖추면 리더십의 본질과 핵심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진성리더십 없는 모든 리더십은 유사 리더십이다. 진성리더십 이전과 이후의 모든 리더십은 진성리더십의 사족이거나 주석에 불과한 까닭이다. 진성리더십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며 위기극복과 난국타개의 수단으로 리더십이 등장하는 이유는 목표달성에 실패한 다른 리더를 능가하는 탁월한 리더가 이전과 다른 리더십을 발휘하면 현실적인 경영위기는 물론 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사실 진성리더가 아닌 다른 모든 리더는 존재목적보다 성과목표, 근원적 사명보다 소유자나 주주의 지명에 복무하며 매출이나 실적을 높여 경쟁력을 제고시킴으로써 살아남는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는 유사리더다.

 

진정(眞情)이 전해지지 않으면 진정(鎭靜)할 수 없다

 

진성리더는 자신이 사명의 주인공이 되어 사명과 일관된 삶을 사는 과정을 통해 사명을 자신의 품성으로 내재화”(윤정구, 2015, 82)시켜 품성 자체가 진성(眞性)인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명은 조직이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되는 이유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하며 진성리더에게 사명은 영혼의 종소리이자 진북(True North)이다. 진성리더가 고난과 역경의 파도가 밀려와도 진북으로 향하는 길을 포기 하지 않고 더욱더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진리가 말하듯 호랑이처럼 더 원대한 사명을 가슴에 품고 소처럼 우직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까닭은 북극성에 울려퍼지는 영혼의 종소리를 듣고 지금 여기 삶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끝별의 애착시어사전이라는 시에 보면 미래는 술래, 달려가면 물러서는 내일이거나/ 쫒기를 포기한 모레이거나/벼랑 끝에 방치된 글피라는 구절이 나온다. 진성리더에게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는 내일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현실에 와 있는 사명대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다. 진성리더에게 오늘의 평범한 보행도 내일의 비범한 행보로 바뀔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이미 신념과 품성으로 내재화 되어 있기 때문에 시련과 역경의 파도가 높이칠 수록 더욱더 강렬한 열망으로 사명을 찾아 떠나는 영혼의 여행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사명은 오직 시련을 통해서만 단단한 마음의 근육으로 발전한다”(윤정구, 2014, 62). 시련을 극복한 사명만이 한 시대를 이끄는데 도움이 되는 시금석을 마련할 수 있다. 유사리더는 사명보다 주주나 소유주의 지명으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라 목적보다 단기 목표에 목숨을 걸고 일하다 난관에 부딪치면 그만두어야 할 이유를 찾지만 진성리더는 난국을 돌파하는 이전과 다른 방법을 찾아나선다.

 

윤정구 교수의 진성리더십: 21세기 한국 리더십의 진정한 표준에 따르면 진정성(authenticity)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전자가 후자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우선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삶의 스토리가 정말 자신의 이야기인지를 문제 삼는 ‘true to oneself’의 의미를 담고 있는 진정성(眞正性)과 내 진실된 스토리가 남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져 정서적 공명을 일으키는 진정성(眞情性)이 있다. 眞正性Authenticity의 원인이고 眞情性이 그 결과라는 것이다. “진정성은 리더의 주장이 아니라 구성원의 마음에 목적이 밀알로 심어진 상태”(94) 또는 진정성이란 자신을 일으켜세우는 목적과 구성원을 일으켜세우는 목적이 같은 상태”(90)가 되는 까닭이다. 원인이 부실하거나 부재하면 결과 역시 부실하거나 원하는 방향과 기대대로 나오지 않는다. 진성리더가 아니고 유사리더는 우선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삶의 스토리가 진정성(眞正性)이 결여되어 있고 진정성이 결여된 삶의 스토리에 공감하며 감동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공명을 일으키는 진정성(眞情性)이 없으니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한 가지 뿐이다. 영혼의 종소리가 울리는 근원적 사명감이 없으니 지금 당장 급진적으로 취할 수 있는 전략을 급진적으로 추진, 조기에 성과를 제고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강압적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음모가 마음 속을 가득 채운다. 자신에게 진정성(眞正性)이 있는 삶의 스토리가 없으니 급진적으로 시나리오를 조작한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진정(眞情)이 전해지지 않고 스스로도 진정(鎭靜)하지 못하는 설상가상의 위험이 이중고로 작용한다. 상황판단력이 마비된 상태에서 급발진되는 자동차처럼 엉뚱한 전략으로 위기 상황을 급습하니 지략(智略)’생략되고 어처구니없는 중상모략이나 계략으로 침략하는 것이다.

 

논리의 세계는 지식이 지시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지혜가 지휘한

 

아무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주워온 지식들로 길고 긴 논리를 편다. 천직의 고행을 거치지 않고도 많은 목소리들이, 무거운 말들이 도처에 가득하고, 숱하고 낯선 이름들이 글과 사색의 평등을 외치며 진열된다. 정성스러운 종이 위에 말없는 장인이 깎은 고결한 활자들이 조심스럽게 찍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15). 장 그리니에의 에 실린 김화영 번역자의 글의 침묵이라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진성리더십만이 신자유주의와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산성화되고 황폐화된 우리 사회나 조직의 토양을 개간, 밀알의 씨앗을 뿌려 목적경영의 과일이 열리는 과수원으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다. “진성 리더십을 실천하는 급진 거북이의 변화에 대한 태도는 뛰어난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속담에 잘 표현되어 있다“(10). 진성리더는 산성화된 밭은 탓하지 않고 우선 토양을 믿음의 씨앗이 발아될 수 있는 비옥한 알칼리성 토양으로 개토한 다음, 사명으로 튼실한 뿌리를 내린 다음 비전의 줄기를 타고 존재목적의 열매가 맺을 때까지 줄기차게 노력을 거듭한다. “진성리더가 만든 변화는 조용하거나 과묵하나 목적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급진 거북이는 목적으로 믿음의 쇄빙선을 만들어서 좁은 문을 부수고 길을 뚫어 더 높고 더 평평한 곳에 과수원”(25)을 세우는 까닭이다.

 

백 사람이 한 번 읽는 책보다 한 사람이 백 번 읽는 책을 쓰라는 말이 있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마음에 다가오는 책이 바로 윤정구 교수님의 책이다. 타성에 젖은 앎을 깨뜨리는 낯선 앎의 흉터를 바라보며 올곧은 앎이 걸어가야 할 정당한 진리의 뒤안길에서 격렬하게 한 시대의 화두를 붙잡고 싸웠던 윤정구 교수님의 앓음다운 족적이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에 그대로 숨겨져 있다. 진북에 이르는 지름길을 택해 목표달성과정을 재촉하지 않고 에움길에서 몸소 방황하며 소명이 명령하는 가시밭길을 굳이 선택한 결단에는 말 그대로 단호한 결심과 결연한 각오의 칼날이 서려있다. 문제상황을 감지하는 남다른 감각이 냉엄한 현실 인식을 가져오고 뜨거운 여름에도 서늘한 서정으로 긍휼감을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한의 겨울에도 뜨거운 문제의식으로 감기하나 걸리지 않고 지식의 내피에 용기의 나무를 심는다. “논리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이지만 현실은 이 나눠진 논리를 시대의 지평에 맞게 통합하는 지혜의 세계다”(280). 지식이 지시하는 세계가 논리의 세계라면 지혜가 지휘하는 세계는 현실의 세계다. 분과학문으로 나눠진 경영학적 지식의 파편으로 현실을 재단하지 않고 열정과 신념으로 달궈진 지혜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진성리더로서의 솔선수범을 보여주고 있다. “진성리더의 급진 거북이 전략은 자신을 가둔 항아리를 깨고 항아리 밖의 세상에서 새로운 진실을 찾아 떠나는 디아스포라 여행자의 여정이다. 급진 거북이는 삶의 개입이 끝나는 죽음의 순간까지 아포리아와 디아스포라 여정을 반복하며 자신을 낳은 낡은 항아리에서 꺼내는 N번의 부활을 경험한다”(356). 윤정구 교수님은 타성에 젖은 습관성 언어와 통념에 갇힌 를 벼리고 벼려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위한 적확한 은유로 대안적 리더십의 독자적인 사유체계를 건축한다.

 

끌개가 목적이라면 밀개는 긍휼감이

 

급진 거북이 리더가 반복게임에서 파레토 최적점에 도달하기 위해 개입시키는 두 변수는 끌개(Attractor)인 목적에 대한 믿음과 밀개(Reinforcer)인 상처받을 개연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긍휼감이다”(124). 목적에 대한 믿음은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더 좋은 믿음이 있다고 유혹해도 비록 손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기꺼이 초기 믿음에 승부수를 던져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이자 의도다. 긍휼감으로 작용하는 밀개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해도 리더가 솔선수범으로 나타나 손해를 기꺼이 감내함으로써 신뢰잔고를 더욱 굳건하게 축적하려는 변화 지원자다. “나침반의 북극은 진성 리더가 찾아낸 자신의 존재목적이고, 남극은 진성리더가 품고 있는 자기 긍휼(Self-Compassion)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이 내면의 나침반은 세상의 진북과 진남을 찾아 소통하고 피드백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떨린다”(298).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다는 의미는 떨리는 지남철이라는 시를 쓴 민영규 시인에 따르면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않고 있음을 지칭한다.

 

거목은 흔들리지만 고목은 흔들리지 않듯이 살아있는 지남철은 험난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방향감을 잃지않기 위해 바늘끝의 전율이 불안하게 떨지만 죽은 지남철의 바늘은 더 이상 떨지 않는다. 이미 생명을 다한 지남철을 믿고 진북과 진남을 찾아갈 수 없다. “진북을 구성하는 목적의식과 진남을 구성하는 자기 긍휼의 양극이 극성을 가지고 떨릴 때 온전한 나침반이 된다. 진성리더는 극성이 강한 나침반을 가지고 세상의 지도를 그려내는 지도술사다”(302). 진성리더도 외부적 환경요인이나 여건 불확실한 여건 때문에 방향감을 잃고 지도로는 진북을 찾아갈 수 없을 때도 직면한다. 더 이상 지도로는 진북을 찾을 수 없을 때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서의 지형에서 느끼는 긍휼감 덕분에 당황하지 않는다. “세상이 혼탁해질대로 혼탁해져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진성리더가 길을 잃지 않고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비밀은 진성리더의 나침반이 긍휼감이라는 남극성을 향한 극성을 유지하며 떨릴 수 있기 때문이다”(306-307).

 

진북이 존재목적이라면 진남은 과감한 실천이다

 

진성리더는 언제나 떨리는 지남철이다. “사실 나침반의 옛말인 지남철(指南鐵)도 북극성의 진북보다 남극성의 진남을 가리키는 바늘이란 뜻이다”(307). 떨리는 지남철이 물리적으로 멈춰섰어도 진성리더가 당황하지 않는 까닭은 내면의 나침반이 언제나 진남을 향해 긍휼감으로 떨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나침반이 남극성을 찾아 떨림을 유지하는 상태가 긍휼이다. 긍휼(Compassion)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나침반(Compass)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 긍휼은 자신과 타인의 성장에 대한 아픔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이며, 이 용기를 통해 아픔을 치유하고 근본적인 솔루션을 위해 혁신적으로 행동하는 정서다. 아픔조차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긍휼이다”(301). 긍휼이 단순히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들이 겪는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기에 몸을 던져 그 아픔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솔루션을 탐색하고 실행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용기다. 용기는 머리로 이해타산을 따지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이 아니다. 오히려 용기는 나에게 손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몸을 던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근원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실현하려는 결단이자 결행이다.

 

진북은 목표를 넘어서 왜 자신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인이 되어서 일어서야 하는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왜라는 물음이 목적에 대한 믿음으로 설정된다. 진남은 문제해결을 넘어 근원적 고통의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는 긍휼의 근력이다”(302-303). 진북이 목적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 찾은 존재목적이라면 진남은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책을 강구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과감한 실천력이다. 그 뒤안길에 긍휼의 근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먼길 날아온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몸을 눕히자/마른 나뭇가지가 지친 눈송이를 힘껏 끌어안았다......눈 송이가 제 몸 녹여 나뭇가지를 적시고/나뭇가지가 제 몸 얼려 눈송이를 떠받칠 때/아름다운 문장 하나가/흰 수정 테이프 아래 감춰졌다.” 정끝별의 고로쇠 한 철이라는 시의 일부다. 먼길 날아온 눈송이의 고단함을 나뭇가지가 끌어안아 노곤함을 달래주는 휴식처가 된다. 눈송이의 헌신적 애정이 나뭇가지의 무조건적 열정과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긍휼감으로 관통하고 소통하며 교감한다.

 

점진적 변화가 수동적 전략이라면 근원적 변화는 능동적 전략이

 

경영자의 아픔을 온 몸으로 감지한 경영학자가 경영학적 상상력과 긍휼감으로 녹여내는 언어로 건축한 모든 문장에 시국이 언제나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내 딛는 안간힘으로 처절하게 얼룩져 있다. 결연한 용기와 열정으로 물고 늘어지는 고뇌에 찬 질문과 이에 대한 결정들이 책의 곳곳에서 낮은 포복 자세로 숨을 쉬며 현실변혁과 삶의 혁명을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 급진 거북이의 발언에는 언제나 작심한 파장이 긴장감을 유지한 채 침묵의 어둠을 뚫고 조용히 하늘 높이 치솟아 세상을 굽어본 다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현장으로 뛰어내리는 결연한 결단이 심장을 파고든다. 모든 문장에는 땀과 눈물을 매개로 얼룩진 시인의 고독이 밤을 벗삼아 깊은 성숙의 언어로 녹아들어 있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쉽게 건너가지 못하고 언제나 그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멈춰서서 의미가 심장에 꽂히는 즐거운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말해야 하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없지만 누군가는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함구하고 있는 어둠 속에 잠든 현실은 마침내 윤정구 교수의 고뇌에 찬 결단을 키우는 텃밭으로 자란다. 애간장을 녹이며 사유를 담금질하고 낯선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철학적 지상명령과 경영학적 처방전을 담아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으로 태어났다.

 

진성리더가 추구하는 기업경영은 돈으로 창출할 수 없는 비금전적 가치를 끌개(Attractor)로 삼고 고유한 혁신의 알고리즘을 만들어 제품과 서비스에 반영할 때 고객이 자발적으로 물건을 구매하고 금전적 가치가 따라와 비즈니스를 밀개(Reinforcer)로 뒤에서 추동한다”(37). 진성리더가 끌개와 밀개를 매개로 존재목적을 실현하고 긍휼감으로 고객의 아픔을 치유하는 혁신을 거듭하기 위해서는 경영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경영학적 상상력이란 비즈니스 혁신을 통해 돈으로 창출할 수 없는 내재적 가치를 제품과 서비스에 반영하고 이것으로 고객에 싼 가격에 팔아 고객의 고통을 해결하는 역량”(39)이나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돈이 돈을 먹는 자기공멸의 고리를 끊어내고 선순환의 고리를 복원해내는 근력”(39)이다. 이러한 경영학적 상상력은 진성리더가 사용하는 두 가지 변화전략, 즉 점진적 변화전략과 근원적 변화전략을 통해서 현실에 구현된다. “점진적 변화는 변화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변화라면 근원적인 변화는 과거의 가정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토대로 환경을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변화여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55). 점진적 변화는 조직에 불이 났을 때 당장 불을 끄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는 수동적 전략이라면 근원적 변화는 앞으로 불이 나지 않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미래 지향적 시스템을 설계하고 작동시킴으로써 요동치는 환경 자체를 바꾸는 능동적 변화”(55-56).

 

정신모형 I이 내비게이터라면 정신모형 II는 나침반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은 진성리더가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정신모형과 연결되어 있다. “점진적 변화는 기존에 성공한 관행을 담고 있는 암묵적 정신모형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업데이트 시키는 과정”(60)인 반면 근원적인 변화란 상상적 죽음에 직면해 찾아낸 존재목적과 사명의 울타리로 미래로 가는 새로운 정신모형의 지도에 기반한 변화”(60). 여기서 말하는 정신 모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과거의 암묵적 정신모형을 현실에 맞게 업데이트해서 그려낸 지도를 정신모형 I, 죽음에 이르기까지 실현해야 할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사명의 울타리를 통해 만든 지도가 정신모형 II”(60-61). “정신모형 I은 꾸준히 업데이트되어야 할 내비게이션의 임무를 수행하고, 정신모형 II는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게 하는 나침반의 임무를 수행한다”(61). 진성리더는 내비게이터를 꾸준히 업데이크 시켜 과거의 지도로 치명적인 지도자의 오판이나 실수를 막아야 할 뿐만 아니라 떨리는 나침반으로 방향감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정신모형 I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는 거울이고, 정신모형 II는 미래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는 거울”(98)이다.

 

점진적 변화는 정신모형 I을 통해 과거를 현재에 맞게 오래된 새길을 만드는 작업이고 근원적인 변화는 정신모형 II를 통해 미래에서 현재로 이르는 지도를 만들고 이를 통해 존재목적에서 약속한 미래를 실현하는 작업”(61)이다. 진성리더십 책에서 윤정구 교수는 정신모형 I은 삶에 대한 자신만의 노하우를 닮은 모형( Know-How Model)이고, 정신모형 II는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가치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모형(Know-Why Model)이다. 정신모형 I로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영혼의 울림이 오는 각성사건을 경험하면 정신모형 I의 울타리를 벗어나 정신모형 II의 세계로 새롭게 진입한다. 정신 모형 II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인 존재목적이자 이유에 해당하는 사명을 비롯, 사명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열정 발전소인 비전과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의사결정 기준이자 가이드 라인에 해당하는 가치가 언제나 조화롭게 정렬되어 있어야 한다. “근원적 변화도 목적을 지렛대로 삼아 점진적 변화를 일관되게 반복해 조그만 차이를 누적하는 과정”(71)이라면 점진적 변화없이 급진적 변화도 보장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진성리더는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는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해서 마침내 반전을 일으켜 근원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리더다. “진성리더는 앞에서 이뤄진 과제의 결과가 다음 과제에 초깃값으로 반영되는 변화과정의 반복적 끼워넣기(embedding)에 주목한다. 진성리더는 개입이 끝나는 시점까지 상황이 허락하는대로 목적의 씨앗을 반복적으로 과업속에 끼워넣기를 통해 차이”(114)를 키우는 까닭이다.

 

미시적 전략이 쇄빙선 전략이라면 거시적 전략은 마무리 전략이

망치가 못을 박고 있을 때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다가 손등을 찍었거나 다른 목적으로 활용될 때 비로소 본색이 드러나는 것처럼 도구는 도구로 정해진 목적에 제대로 이바지할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도구가 자신을 드러낼 때는 잘못된 목적을 위해 쓰일 때다”(81).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리더십이 존재목적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제대로 사용될 때 리더십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리더십이 경영자의 사욕을 챙기는 도구로 전락할 때는 망치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81-82). 진성리더는 오로지 리더십을 존재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한다. 진성리더십을 발휘하는 진성리더는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을 기반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사명의 울타리가 세워졌을 때 우리의 암묵적 정신모형을 위한 안심지대 울타리를 허물고 더 넓은 곳에 세워진 심리적 안전지대(Pshchological Safety Zone)”(60)를 마련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애쓰는 리더다. “진성리더란 목적에 대한 진실성으로 자신과 구성원을 임파워먼트시켜 사명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안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조건으로 구성원을 자발적 협업에 동원하는 리더”(90). 진성리더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구성원을 리더로 키워서 리더십이란 말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리더십의 민주화”(106)를 이룩하는 것이다. 진성리더에게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명을 꼽으라고 하면 사명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이를 위해 모든 자원을 최적화해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다.

 

급진 거북이가 존재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미시전략과 거시전략으로 나뉜다. “미시전략은 산성화된 조직에 균열을 만드는 쇄빙선 전략이다. 급진 거북이는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으로 미래에 펼쳐진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쇄빙선의 선장이다”(128). 반면에 거시전략은 성공적으로 초깃값을 벗어났을 때 파레토 최적점을 실현하는 근원적인 변화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후속전략”(128)이다. 미시전략으로는 존재목적을 밀알로 만들어서 자신이 하는 과제에 씨앗으로 뿌리는 조용한 반역’, 이전 과제에서 도출된 성과를 다음 과제를 성공시키기위한 지렛대로 사용하는 지렛대 전략’, 변화에 반대하는 세력을 역으로 제압해 변화를 시도하는 뒤집기 전략’, 경쟁적인 파트너를 협업의 파트너로 바꾸는 스파링 파트너 전략이 있다. 거시전략으로는 변화의 종착역에 도달한 상상적 체험을 통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우는 선승구전 전략’,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세워야 할 첫 번째 캠프를 높은 곳에 설정하고 여기에 이르는 계단은 최대한 촘촘하게 만드는 베이스 캠프 전략’, 급진 거북이를 연합해서 변화를 위한 들불을 일으키는 비밀결사대 전략’, 이원론으로 양분된 사람들을 협업의 파트너로 만들어 변화를 완성하는 동적 역량 전략이 있다. 미시적 전략은 변화 시작을 위한 초깃값을 만들어내는 쇄빙선(碎氷船/icebreaker) 전략이라면 거시적 전략은 변화 프로젝트의 반복을 통해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었을 때 이 차이를 굳히고 변화를 마무리하는 전략이라고 한다.

 

상황은 객관적 배경이지만 맥락은 주관적 전경이

 

진성 리더십은 리더가 상황에 답을 찾고 상황에 적응하는 것을 답으로 생각하는 상황이론(Contingency Theory)이 아니다. 상황을 변화에 더 유리한 맥락으로 만들어 주체적으로 변화를 일구어내는 맥락이론(Context Theory)이다”(267). 상황(situation)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이해되는 객관적인 배경일 뿐이지만 맥락(context)은 똑같은 상황도 그 상황을 인식하는 사람의 관심과 애정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부각되는 주관적인 전경이다. 상황이 산성화된 토양이라면 맥락은 존재목적의 밀알이 씨앗이 되어 구성원간 밀착된 소통으로 신뢰감으로 물드는 과수원이다. 상황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보이는 환경(environment)이나 배경(surroundings)이다. 상황은 주변에 널려 있다. 똑같은 상황에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남다르게 와 닿거나 특이하게 기억된다. 그 상황에 나의 특별한 의미나 의도를 갖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 못 할 사연이 그 상황에 숨어 있어서 특별한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기 때문에 상황은 그냥 저쪽에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깊은 관심과 해석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정황(情況)이다. 상황은 화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이전에 도처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광경(光景)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맥락은 무수히 많은 상황 중에서 나의 주관적 관심과 애정의 손길로 포착되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정경(情景)이나 전경이다. 상황은 나와 무관하게 저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관조와 관망의 대상이지만 맥락은 나와 깊은 관계가 있어서 관심과 관찰의 대상이다. 상황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 맥락은 담벼락 너머에 존재하는 상황이어도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벼락처럼 달려오는 특별한 장소다.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시간에 머물렀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색다른 장소다.

 

상황과 맥락의 차이는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 나오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는 길들여진 감정이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이란 뜻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감정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같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낯선 자극이자 상처다. 익숙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스투디움의 세계로 보인다. 달리 보이는 것 없이 늘 세상과 일상은 정상적으로 보이고 다가온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했던 현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당연했던 세계가 다르게 보이면서 불편한 문제의식을 잉태한다. 푼크툼의 세계로 보이게 만든 낯선 개념을 습득해서 그저 그렇게 보였던 세계가 다른 자극으로 나에게 각인되면서 깊은 앎의 상처가 만들어진다. 상황은 스투디움처럼 틀에 박힌 방식으로 바라보니 고리타분하게 다가온다. 길들여진 눈으로 바라보니 여기저기 상황이 널려 있지만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한다. 반면에 맥락은 푼크툼처럼 동일한 상황이 나에게는 낯설게 다가온다. 이전과 다르게 보이면서 색다르게 나를 자극한다. 그 속에는 어제의 나와 다른 또 다른 자아가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다른 사람이 맥락 속에서 어제와 다른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스투디움으로서의 상황이 푼크툼으로서 맥락으로 변신할 때 세상은 의미의 천국이자 배움의 텃밭으로 변신한다.

 

진성리더는 결국 익숙한 스투디움으로서의 상황을 푼크툼으로서의 낯선 맥락으로 탈바꿈시키는 리더다. 학습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로 작용했던 객관적 배경으로서의 상황을 의미심장한 사랑과 의도성을 반영한 정경으로서의 맥락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도처에 산재하는 상황을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눈길을 보내주고 손길을 내밀면 상황은 맥락으로 탈바꿈을 시도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모든 학습은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맥락적 의미 창조를 일으키는 경험이다. 누구나 상황에서 저마다의 경험을 하지만 그런 경험이 모두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학습경험으로 바뀌지 않는다. 똑같은 경험을 똑같은 상황에서 했어도 그 경험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삶은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만나 특이한 경험을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면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평온했던 환경이 갑작스러운 변수로 인해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돌변할 때 내가 거기서 어떤 반응을 보여주면서 대처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학습이 일어날 수 있다. 상황을 맥락으로 바꿔 경험하는 삶이야말로 관심과 애정으로 세상을 나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경이로운 기적의 연속이다. 오늘도 숱한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거기서 얻은 체험적 통찰력으로 맥락을 재구성하는 탐색과 모험의 과정을 계속해야 되는 이유다.

 

진성리더는 잔혹한 존재의 내출혈을 앓는 시인이

 

바람이 지나가는 사이 나뭇가지가 휘어진 까닭은 허락도 없이 매달아놓은 외로움의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햇살이 마실을 나간 사이 나뭇가지에 걸린 한나절의 공포가 하소연을 하는 까닭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호주머니에 담긴 고뇌의 깊이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뭇잎이 눈깜짝할 사이 한 무더기의 시름이 추락하는 까닭은 사소한 추억이 그림자를 만나 찌그러지는 쇠락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가 기지개를 펴는 사이 줄기를 타고 눈물이 흐르는 까닭은 하루를 살아낸 추억이 기억으로 재생되지 않고 수면제로 전락하는 서글픔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녁이 하루를 마감하는 사이 괴로움을 머금은 나무뿌리의 침묵이 물음표를 잉태한 까닭은 절망의 짐짝들이 철없이 방황하다 불안한 발자국으로 떨고있는 바다를 건너가기 때문이다. 진성리더는 시의 언어들이 내딛는 안간힘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주변을 보살핀다. 살피지 않으면 고객의 아픔을 보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긍휼감으로 무장한 진성리더는 일상은 타성에 젖은 틀에 박힌 기정사실의 세계가 아니다. 진성리더에게 일상은 저마다의 사명감으로 무장한 세계가 소명을 받고 각자 맡은 분야에서 존재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영혼의 울림을 듣는 리더다. 진성리더는 장석주 시인이 말하는 잔혹한 존재의 내출혈”(5)을 앓고 있는 시인이다. 시인은 역지사지로 세상을 바라보는 측은지심의 거인이기 때문이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데 정작 단 하나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90). 장 그리니에의 에 나오는 말이다. 진성리더는 보이는 대상보다 보이지 않는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근원적인 변화전략을 상상하고 구상한다. 진성리더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발해하는 온갖 고정관념과 습관적 사고체계를 파괴하고 질문을 던져 확신이 부패하는 걸 방지하려고 노력한다. “시적인 것은 세계를 보는 눈을 교정하는 데서 시작한다”(59).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에 실린 안도현 시인의 세계는 배반하면서 성장한다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진성리더야말로 세계를 보는 눈을 늘 교정하며 세상과 교감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며 희망의 연대를 구축, 공명의 신명나는 장을 마련하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한다. “깨달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어디로 향하든 자기만의 길을 찾아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다......진정한 소명은 자기자신에게 이르는 것, 단 한가지 뿐이었다”(218-219).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말이다. 진성 리더는 영혼의 종소리를 들으며 사명을 가슴에 품고 소명을 잃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급진 거북이다. 급진 거북이는 절망의 절벽에 걸터 앉아 암각화를 새겨넣듯 절치부심하며 고뇌했던 소명과 목적의식을 등대불로 삼아 까마득한 희망을 잉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자기 주장을 담아내는 문장건축노동자다.

 

진성리더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어떤 책은 읽는 게 아니라 책이 나를 읽는 경우가 있다. 책이 나를 무장 해제시키고 거침없이 나를 파고들어 그 동안 축적된 인식의 두께를 사정없이 갉아먹기 시작한다. 실날같은 희망으로 기존 지식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온몸으로 항거하지만 절망은 아무런 이유없이 맹목적으로 안온한 인식의 터전을 저돌적으로 갈아엎는다. 앎의 막다른 골목에서 완전 포위당한 채 처절함을 넘어 처참한 탄식에 눌려 낯선 앎의 미궁으로 빠져들어간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정신모형 I을 갈아엎고 근원적인 변신을 거듭하기 위해 사명과 긍휼감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정신모형 II로 살아가려고 각성한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이 바로 이런 각성과 결단에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해주는 책이다. 스피노자가 예고 없이 뚜렷한 방향감을 갖고 급습해서 나의 정신세계로 침범하고 들어온다. 뇌리에 담긴 기존 논리를 뒤흔들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인식의 주체로 생각했던 나를 변방으로 몰아붙인다. 그때부터 유영만의 코나투스는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고 생각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설명을 넘어 세상을 해석하는 주체로 거듭난 것처럼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이 몸을 관통하고 피끓는 열정에 버무려진 다음 존재 자체의 의미나 이유를 해석하는 틀에 걸러져 차가운 이성으로 관철된 주장이 잠시 머뭇거린다. 마지막으로 갈무리가 된 감정이나 정서들이 스스로 논리를 찾아 일리(一理)들의 행렬을 이룬다. 그 순간 일리있는 이야기들이 심장에 들어가 세상을 따듯하게 품으며 온기를 잉태한 진리의 빛으로 거듭난다.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영혼의 종소리가 실존감과 긍휼감으로 주변을 비춰주고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헌신으로 뻗어나가게 만드는 올곧은 정신으로 거듭난다. 존재목적을 실현하려는 안간힘이 사명을 만나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출산하는 순간, 나 역시 어제와 다른 진성리더로 새롭게 변신을 거듭한다. 나는 영원히 살아있음의 존재를 증명하며 오로지 진북이 이끌고 진남이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에서 진실을 캐내려는 숭고한 여행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른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같다.” 황지우 시인의 서풍(西風) 앞에서라는 시의 전문이다. 진성리더 역시 박해받는 순교자다. 아니 은사시나무처럼 박해받고 싶어 안달이 나는 순교자다. 급진 거북이로 살아가는 진성리더는 공유된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과 신조를 기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기회비용을 계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가능과 한계가 눈앞에 닥쳐와도 숭고한 목적의식을 믿고 지금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가진 것만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하는 우보천리(牛步千里) 방식으로 마침내 성공 사례가 텃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공명의 운동장을 만들고 점점 울타리를 넓혀 구성원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만든다. 지나친 개인적인 욕심이기는 하지만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은 세상의 박해받고 싶은 순교자들이 읽고 감동받아서 아니 박해받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순교자가 되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진성리더로 변신하게 만드는 시금석이자 출발점을 마련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전문성이란 이름으로고착된 분과에 안주하는 연구보다는 뜻밖의 질문을 던지면서 다양한 영역을 횡단하며 새로운 '분과'를 창안하는 그런 연구; 사유에 공연한 무게를 싣고서 어설프게 던지는 아카데믹한 형식적 질문보다는 삶을 통찰하는 눈으로 막힌 벽돌을 부숴버리는 강밀한 질문; 어떤 학적.예술적.정치적 업적을 쌓고 지워지지 않을 명예를 얻으려는 욕망이 아니라, 벽들을 막히고 패인 홈들에 갇힌 삶의 흐름을 모든 방향으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려는 욕망 등등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삶의 변환을, 낡은 사유와 체제의 전복을, 삶의 방식의 혁명을 시도하려고 한다면, 그게 무어라 부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466-467). 이진경의 노마디즘2에 나오는 말이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에는 뜻밖의 강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진정한 리더십의 비밀과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이 책은 되돌아온 활력과 내일 모레에 대해 새로 피어나는 믿음의 환호성이며, 미래와 임박한 모험, 다시 열린 바다, 그리고 다시 허락되고 다시 믿게 된 목표에 대해 갑작스럽게 솟아난 느낌과 예감이 소리높여 외쳐대는 환호성 바로 그것이다”(24).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말이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은 우리 모두에게 니체의 즐거운 학문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사명과 목적, 비전과 가치로 무장, 근원적인 변화대열에 동참을 촉구하는 책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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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나 -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
권민 지음 / 생각속의집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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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틀 안에서 선을 잇고 있습니까, 틀 밖에서 선을 넘고 있습니까?


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을 읽고

 

물방울은 액체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와 황홀경에 빠지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물은 떨어지거나 흩어지면서 물방울로 분리된다). 소용돌이는 액체가 스스로를 향해 집중되는 지점, 회전을 통해 자신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세상에는 물방울-인간과 소용돌이-인간이 존재한다. 물방울-인간은 안간힘을 써서 바깥으로 분리되려고 노력하는 인간, 소용돌이-인간은 스스로를 중심으로 집요하게 몸을 휘감으며 더욱더 안쪽을 향해 뛰어넘기를 계속하는 인간이다(99-100). 조르조 아감벤의 불과 글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물방울 인간의 중심은 원심력이다. 밖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끌려나갈 수밖에 없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밖에 있어서 거기에 상응하는 인간이 되려고 노력할수록 모두가 닮은 인간이 된다. 들뢰즈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동일성의 범주에 갇혀 버리는 삶이다. 한편 소용돌이 인간의 중심은 구심력이다. 아무리 바깥의 위협이나 위기가 다가와도 내면의 나를 응시하는 힘으로 휘감아 자기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 바로 소용돌이 인간이다. 물방울은 더 이상 커지기 어렵다. 매달릴 힘이 자기 내면에 없다. 오로지 밖에서 당기는 중력의 힘으로 떨어져나갈 뿐이다. 하지만 소용돌이의 위력은 그 한계가 없다. 소용돌이가 거세질수록 내면으로 파고들며 구심점을 향해 휘몰아치는 힘은 허리케인을 능가할 정도다.

 

물방울로 나가 떨어지지 말고 소용돌이로 휘몰아쳐라

 

최근에 내면에 소용돌이 치는 두 권의 책을 만났다. 한 권은 이미 리뷰를 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참고: https://brunch.co.kr/@kecologist/544) 라는 책이고 또 한 한 권은 이 책의 실천방안을 제시한 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이라는 책이다. 이기철 시인에 따르면 시란 모발 적시는 생각의 빗방울이기도 하지만 생각의 빗방울에 담긴 의미를 추적, 거기에 담겨진 내 삶의 존재목적과 이유를 찾아 탐구를 계속할 때 생각의 빗방울은 하나의 물방울로 떨어져나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물방울의 흔적이 모여 거센 파도를 몰고오며 생각의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다. “탐구는 혁신과 마찬가지로 겸손에서 시작된다. 탐구는 겸손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 즉 배우려는 마음이다”(172).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탐구를 지속할 때, 나는 물방울처럼 타자의 힘에 이끌려 휩쓸리는 복사본 인생을 마감하고 소용돌이 치며 나의 고유한 자기다움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원본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원본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탐구는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필수적인 공부여정이다. “탐구는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열정이 있고, 왼쪽에는 믿음이 있으며, 앞에는 노력, 뒤에는 겸손이 자리잡고 있다. 이 네 가지가 DNA의 사슬처럼 서로 얽혀 탐구를 완성한다. 결국 탐구는 모든 거인의 열정의 산물이다”(172). 이런 탐구심으로 완성한 또 한 권의 대작이 바로 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존재의 파닥거림이자 뿌리 깊은 질문을 던져 전대미문의 관문을 열어 우리들에게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내다보게 만드는 창문 디자이너다. 존재의 파닥거림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사람은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따라갈 것이고, 존재의 파닥거림을 듣지 않고 외부의 시끄러운 욕망의 물줄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은 늘 빠듯하게 살아가지만 언제나 뿌듯하지 않은 공허한 삶을 반복한다. 존재의 파닥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틀 안에서 정해진 순서대로 선은 이어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과 부단히 경쟁하며 복사본 인생을 살아가지만, 틀 밖에서 자신의 목적과 소명이 이끄는 대로 선을 넘어가며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사람은 소용돌이 치는 원본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선 잇기로 인생을 경영하는 사람에게 마케팅은 넘버원을 목표로 다른 사람과 부단히 비교하면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지만 선 넘기로 인생을 창조하는 사람에게 브랜딩은 온리원을 목표로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서 비전을 품고 비약적으로 비상하는 사람이다. ‘선 잇기인생은 남이 정해 준 각본이나 대본대로 따라가는 선형적 인생이다. 사람은 때가 있는 법이다. 어느 목욕탕 간판에 써 있는 문구처럼 때가 되면 당연히 수행해야 되는 복사본 인생이다.

 

주어진 순서대로 선을 이어가지 말고 당신이 순서를 정해서 선을 넘어라

 

남이 정해준 길을 따라 동일성을 반복하며 다른 사람과 닮아가는 인생 지도에는 자기다움은 실종되어 있고 남보다 잘하려는 치열한 레드 오션에서 넘버원이 되는 것이다. ‘선 잇기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흐르는 물리적인 크로노스 시간에 맞춰 때가 되면 당연히 해내야 되는 일을 의무적으로 수행하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이들이 맞이하는 새벽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어지는 시간(hour)이다. 반면에 “‘크로노스에 따른 나이 듦이 아니라 카이로스에 따른 나다움’”(47)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선을 이어가는 복사본 인생을 살지 않고 자기다움을 찾아 스스로 점을 연결하며 대체불가능한 원본 인생, 선 넘기 인생을 살아간다. 이들에게 나의 시간은 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47). 이들은 생존을 위해 일하지 않고, 존재를 위해 생동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시간의 기준이다”(50). ‘선 잇기경쟁은 아무리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도 내가 추구하는 삶은 거기에 없다.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목적지일 뿐 나에게는 또 다른 목적지로 유혹하는 전초기지일 뿐이다. 하지만 선 넘기 인생은 한 점을 연결할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으로 추억되며 나만의 서사를 창조하는 삶이다.

 

이미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으로 더 이상 사회가 정한 선 잇기를 할 수 없을 때, 사회가 정한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휼륭하게 사는 삶을 포기하고 가장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자기다움을 찾아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인생 계획을 제시한 바 있다. 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이라는 책은 첫 번째 책인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총 7번의 워크숍을 통해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시간여행 처방전을 제시한다. 오늘을 사는 내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여행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시간여행이기 때문이다. “두 번 째 나는 미래에서 온 나 자신을 의미하지만, 그 본질은 자기다움을 살아가는 현재의 나를 뜻한다”(6).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로 현재를 사는 두 번 째 나는 일곱 번의 자기다움 워크숍을 통해 미래의 나로 오늘을 산다는 것은 내가 되고자 했던 그 나로 살아가는 것”(358)이라고 말한다. 시간여행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목적을 재발견하고,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연대기적 크로노스의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여행이 아니라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 의미를 부여하고 창조하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보내는 여행이다. 이런 시간여행을 도와주는 도구가 바로 미래소설 쓰기, 시 쓰기, 편지 쓰기, 회고록 쓰기와 같은 글쓰기다.

 

태어나 생존에 급급해하지 말고 고유함으로 창조되어 휴먼 브랜드가 되어라

 

조태현은 태어나 생존했지만, 권민은 창조되어 존재”(84)한다. 태어나 생존을 거듭하는 나는 다른 사람과 닮아지려는 노력을 통해 복사본(複寫本)으로 살다 복사(複死)하지만, 창조되어 존재하는 나는 나답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원본으로 살다 자기답게 죽는다. 유영만은 한 때 ABO(Auxiliary Bolier Operator) 유영만이었다. 수도공고를 졸업하고 평택화력발전소에 근무하던 시절 나에게 주어진 직함이 보일러 운전 보조원(Auxiliary Bolier Operator)이었다. 발전소 가장 밑바닥에서 집채보다 큰 보일러 운전에 필요한 다양한 보조기구나 장치 조작 상태를 점검하는 기능직이었다. 당시 나는 발전소 기계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기계적 인간의 한 가지 부속품에 불과했다. 그러다 우연히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공부는 고시공부라는 걸 우연한 기회에 읽은 고시합격생 수기집에서 잘 못 발견했다. 고시합격으로 보장되는 5급 사무관 자리가 나를 드러내는 의미가 아님을 머지 않아 발견하고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나의 존재목적을 실현하는 길이 배우는 길을 통해 인생의 주연 배우로 거듭나는 길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공부하던 길로 들어선 유영만 학생은 학부를 졸업하고 얻은 학사 학위를 기반으로 석사를 받고 마침내 유영만 박사가 되었다. 유영만 박사는 유영만 다움을 드러내는 자기다움의 본질이 아니라 공부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수많은 박사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박사라는 동일성의 범주안에 다 포함되어 함몰되는 학위 명칭이 유영만 다움을 드러내는 한 가지 입력 요인이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유영만의 자기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표에는 역부족이다. “자기다움의 본질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커리어를 쌓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보기 위해 가짜 커리어라는 짐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결국 자기다움은 뻴셈이었다”(216). 유영만 다움은 유영만 학사-석사-박사-교수라는 선 잇기 인생을 통해 직선적으로 살아가는 여정에서 발견되지 않고, 학사-석사-박사-교수라는 학위나 직함을 다 걷어내고 유영만이라는 이름 석자로 버틸 수 있는 나력(裸力, Nakd Strength)에서 나온다. 유영만의 존재목적과 존재이유를 설명하는 단어는 학사-석사-박사-교수가 아니라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나만의 고유한 유영만다움을 드러내는 이미지이자 메시지다. 일관된 이미지와 메시지 속에 유영만 다움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휴먼 브랜드가 들어있다. 메시지와 이미지가 어울려 유영만의 컬러와 스타일을 창조하고 가장 유영만답다는 자기다움이 하나의 휴먼 브랜드로 드러난다.

 

남다른 넘버원보다 색다른 온리원이 되어라!

 

현재의 나는 타인과 다르게 넘버원(Number 1)이 되고 싶었지만, 미래의 나는 자기다움으로 온리원(Only 1)이 되고 싶었다”(94). 자기다움으로 온리원이 되기 위해 이 책에서는 자기다움 소설 쓰기(자기다움 워크숍 3), 자기 자신에게 배우기(자기다움 워크숍 4), 소설 편지 쓰기(자기다움 워크숍 5), 나의 회고록 작성하기(자기다움 워크숍 6), 과거와 현재를 미래로 연결하기(자기다움 워크숍 7)를 제안한다. 일기가 과거에 내가 했던 행동을 돌아보는 도구라면, 소설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들여다보는 창문과도 같다(112). 저자가 쓴 새벽나라에 사는 거인도 태어나 생존하는 조태현에서 창조되어 존재이유나 목적을 찾아가며 권민으로 성장하는 과장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새벽은 작가에게 가장 나다워지는 시간이며 크로노스가 아니라 그 어떤 시간보다 소중한 의미가 창조되는 카이로스로 채워지는 의미심장한 때(timing). 새벽은 그냥 시간이가 아니라 경이로운 자기다움이 창조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소설을 쓰는 새벽 시간은 사진 작가 앙리 까르띠에가 말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며, 시인 쉼보르스카가 말하는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시간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색다른 사람이고 색다른 사람은 자기다운 사람이다. 자기다움=색다름=아름다움은 동의어다. 자기답게 살면 색달라보이고 색다르면 저절로 남달라지면서 대체 불가능한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아름다운 사람은 자기를 어제와 다르게 창조하기 위해 소설과 시를 쓴다.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쓰는 소설은 상상속의 내가 현재의 나를 관찰하면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들여다보는 창문”(112)이자 미래의 기억을 얻기 위한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는 시나리오”(118). 자기다움 소설은 미래의 내가 현재를 산다면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대답이다. 반면에 자기다움 시를 쓰는 목적은 단순히 감성을 일깨우거나 시인을 양성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고 막연했던 가치를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 내면에 불을 지피는 데 있다”(200). 이처럼 시를 쓰는 일은 잔잔한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일”(201)이며 자신을 구성하는 언어를 재정비하는 일종의 영혼의 정비작업”(201)이다. 잔잔한 새벽시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응시하며 자기다움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재정비할수록 언격은 물론 인격도 같이 높아지는 고결한 카이로스의 깨달음이 엄습한다.

 

시 쓰는 삶은 곧 애쓰는 시다

 

시가 가진 힘은 시를 삶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일 거예요”(11). 이원의 시를 위한 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새벽에 맑은 영혼의 정수를 길어올리는 시쓰기는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안간힘의 순간이기도 하다. ‘시적인 것어느 때나, 어디에도있다......시를 통해 우리는 하마터면 못 보았을 것을 본다......시적인 것을 보면서 보여주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16-17). 황지우의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호에 나오는 말이다. 시적인 순간이 자기 존재목적이나 이유를 깨닫는 뜻밖의 순간이며, 그 뜻밖에 순간에 불현 듯 다가온 의미 덩어리가 심장에 박히면서 심장박동은 가속화되고 전두엽은 천둥과 번개가 휘몰아치며 뇌리 속에 위대한 섭리로 재배치되는 순간이다. “시적인 것은 세계를 보는 눈을 교정하는 데서 시작한다”(59).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에 실린 안도현 시인의 세계는 배반하면서 성장한다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시 쓰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자신을 바라보고 세계 속에서 내가 차지한 위치를 부단히 재점검하면서 부단히 쓰기를 반복해도 한 번에 작품이 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생각의 배설물이 쌓이다보면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정밀한 언어들이 자신도 모르게 재배치가 되며 생각지도 못한 경이로운 문장이 건축된다. 끊임없이 언어의 줄달리기를 통해 지금 여기서 내가 느끼는 감각적 각성을 깨달음의 언어로 번역하며 어제와 다르게 쓰여는 애쓰기가 시쓰기다. “능금 한 알이 추락하였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 이상의 오감도에 나오는 최후라는 싯구처럼은 쓰기 어렵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감각의 흐름을 언어로 벼리고 벼리면서 나 다운 언어들의 배열을 직접 목격하고 겪어보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시는 정수자 시인의 말처럼 단도의 서늘한 직입처럼 촌철의 난만한 살인처럼예고 없이 급습한다. 그래서 시는 시인이 마음 먹고 쓰는 게 아니라 발버둥치며 주변을 응시하고 내면으로 파고들다 김중식 시인의 말처럼 어쩔 줄 모르는 삶의 흔들리는 언어흔들리는 삶의 어쩔 줄 모르는 언어를 만나는 순간 내 몸을 관통하다 남긴 흔적과 얼룩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쓰이는 시인과 자연의 이중주에 가깝다. 박재연 시인에 따르면 시는 내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잠시 주저하는 입술이자 갇힌 새들의 무모한 날개짓이다.” 자기다움 시를 쓰는 시인은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쓰던 소설과 다르게 철저하게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오감각으로 느끼는 모든 신체적 반응을 곤두세우고 늘 존재해왔던 당연함의 세계에 언제나 물음표를 던져놓고 존재의미와 목적을 따져묻는다. “시인의 몸은 세상의 여러자극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기(受容器)이자 공명통이다”(8). 권혁웅의 미래파: 새로운 시와 시인을 위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어제와 비슷한 하루 일상을 보내도 어제 만났던 마주침은 오늘 부딪히는 마주침과 다르게 감각적으로 각인된다. 미세한 감각의 차이로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그때 내 감정의 소용돌이는 어떻게 휘몰아치는지를 유심히 관찰할 때 작은 통찰이 선물처럼 다가온다.

 

육체를 통과하지 않은 글은 관념의 파편이다

 

시집은 권태와 고독으로 살찐다. 시의 성분은 육체적이다. 육체를 통과하지 않는 시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들은 고독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다”(53). 장석주 시인의 식물의 자세에 나오는 싯구절이다. 새벽에 책상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시를 쓰라는 게 아니다. 어제 하룻 동안 내 몸을 관통하고 남은 얼룩과 무늬를 반추하며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다보면 뜻밖이 적확한 단어가 갑자기 나타나 자기도 놀라는 한 문장을 써놓는다. 시의 성분만 육체적인 게 아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소설, , 편지, 회고록도 모두 나의 경험적 상상력을 능가하는 작품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인생의 전략적 변곡점마다 겪어낸 사건과 사고의 합작품이 오늘의 내가 된 비결이다. 나 역시 가장 유영만 다운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되기 위해 인생의 변곡점마다 긴 방황도 해보고 방황 끝에 찾은 방향을 잡고 나만의 방식과 방도로 나의 길(My Way)을 걸어온 셈이고 여전히 제2의 나를 재발견하며 시간여행을 거듭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기존 교수 자리가 주는 이미지와 메시지는 유영만 다움을 드러내기에는 부적합하다. 유영만 교수라는 타이틀보다 유영만다운 교수가 되고 싶었다. 교수로서 유영만의 가르침도 책상 머리에 건져올린 관념의 야적물이 아니라 내 몸이 겪어낸 경험적 깨우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영만 교수가 되었지만 유영만 교수가 유영만의 자기다움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깨달음은 또 다른 자기다움 탐구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교수는 그저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의 정식 교직원이 되어서 연구하고 가르치며 봉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직함에 불과하다. 똑같은 교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천차만별이 교수 이미지가 부각된다. 교수라는 직함이나 직업 자체가 유영만의 자기다움을 드러내지 못하기에 또 다른 유영만 다움을 찾아 탐구 여행을 떠났다. 탐구는 겸손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배우려는 마음”(172)이라고 했듯이 교수도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자기다움을 찾아나서는 공부의 끈을 놓고 학교나 사회가 원하는 연구논문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흔히 교수가 되면 더 이상 배울게 없다고 생각하며 그 동안 축적한 지식으로 아성을 구축한 다음 그 안에서 안주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주는 안락사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르고 모르는 분야가 더 많다는 각성을 기반으로 겸손하게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공부여정에 뛰어드는 사람만이 인생의 주연 배우로 거듭날 수 있다. 배우는 배우는 사람이다. 배우는 탐구여정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배워야 부족함을 극복하고 자기다움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는 겸손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자기다움이란 나다운 존재가 되기위해 아픔과 고난을 극복하여 참된 자아로 충만해진 상태를 의미한다”(196). 참된 자아로 충만해진다는 의미는 한 두 번의 노력으로 완성되는 이상적인 상태를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다움으로 충만해지는 과정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미완성 교향곡이다.

 

보통명사로 묻히지 말고 고유명사로 묻는 브랜드가 되어라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글쓰기 방법에는 편지쓰기도 있다. “편지쓰기는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 자아 탐구와 성찰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편지쓰기는 궁극적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다움을 더 쉽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다”(234). 유영만 교수가 되어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에게 편지를 썼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기대감에 젖어 이제 힘든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수(敎授)도 학문적 교수형(絞首刑)에 처할 수 있는 운명으로 전락한다. 전공은 물론이고 가르침과 배움의 철학을 자기 신념을 기반으로 정립하고 연구와 봉사라는 의무도 의무적으로 수행하는 강제적 과업이 아니라 유영만이라는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숱한 수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말과 글 속에서 대체불가능한 언어적 사유체계를 구축하고 한양대학교 교수라는 보통 명사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명사로 거듭나는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지식생태학자는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며 얻은 신선한 생각 재료를 토대로 (사람들이 재미있게 공부하며 의미 있게 습득할 수 있는) 건강한 지식을 요리하는 ‘Knowledge Chef’. 지식생태학자의 또 다른 의미는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을 유심히 관찰, 그들에게 배운 생존 원리를 활용하여 지식이 자연스럽게 창조되고 공유될 수 있는 지식 정원을 설계하는 ‘Knowledge Designer’. 지식요리사이자 지식정원사는 이제 지식임신과 출산, 지식잉태 조건과 자연분만 유도법을 세계 최초로 연구하는 지식산부인과 의사도 유영만의 자기다움을 구축해나가는 행보를 이어갈 것이다.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글쓰기에는 회고록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글쓰기는 회고록(回顧錄)이 아니라 회고록(懷故故)이다. “회고록(懷故故)의 한자 의미는 다음과 같다. ()는 품다, ()는 연고, ()은 기록하다라는 뜻이다”(282). 그래서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글쓰기의 한 가지인 회고록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회고록(回顧錄)이 아니라 그 사건의 이유를 탐구하는 회고록이다”(283). 내가 지난 시절 겪었던 경험을 반추하며 과거를 되살리는 기록을 넘어 사건이나 사고 속에 담겨진 기억을 되살려 그 의미의 퍼즐을 맞춰가며 회고록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우연에서 필연으로, 사건에서 섭리로, 결과에서 목적으로 확장”(290)시켜 나가는, 과거를 기반으로 오늘을 점검하고 오늘에 비추어 내일을 살아가려는 안간힘이다. “결국 회고록 쓰기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아를 재발견하고 새롭게 만들어가는 복잡하고 때로는 고통스로운 여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깊고 풍부한 자기 이해에 도달하며, 이러한 통찰은 미래의 자아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292). 회고록을 쓰다면 유난히 강렬하게 기억으로 남아 당시의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내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 사건도 있다. “기억에서 사라진 대부분의 사건은 자신의 본질과 소명에서 벗어나, 타인의 선택에 동조한 복사품 같은 시간이었다”(293). 보통명사로 살아가면 복사본으로 묻힌다. 고유명사로 살아가야 대체불가능한 원본으로 색다른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

 

회고록은 자기발견의 도구이자 기억에 대한 재해석이다

 

나처럼 평범하거나 평균 이하의 사람들도 인생이라는 화폭 속에 감춰진 자기다움을 문지르며발견해 갈 수 있다. 경험이 없는 곳에 기억도 없고, 기억이 없다면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 결국 회고록 쓰기란 자신의 경험을 끊임없이 문지르며 되새기는 가운데 기억의 무늬를 찾아내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여정인 것이다”(304). 누구나 과거의 경험적 흔적이 있다. 다만 그 흔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역사적으로 묻힐 수 있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으로 스쳐 지나갈 수도 있고 내 삶의 무늬로 직조되는 아름다운 얼룩이 될 수도 있다. “기억은 해석이다.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과거가 전하는 메시지도 달라진다”(309). 우리는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기억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해석하는 것이다. 해석자가 특정한 시공간에 틀어박혀 틀에 박힌 관점으로 과거를 바라보는지, 아니면 선 넘기를 통해 틀 밖의 관점으로 뜻 밖의 의미를 추출하는지에 따라 과거는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는 오늘의 시점이 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회고록은 자기 발견의 도구입니다. 과거의 경험을 분석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얻는 과정”(360)이기에 내가 몰입하고 의미를 창조했던 순간을 반추해는 가운데 뜻밖의 자기다움에 관련된 이미지나 메시지를 발굴해낼 수 있다. “미래로의 시간여행이 창작과 기록의 영역이라면,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편집과 윤문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이미 개봉한 영화를 재편집하는 감독관 작업과도 같다. 어떤 감독이 작업을 맡느냐야따라 영화의 모습이 달라지듯,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309). 똑 같은 사건과 사고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 사건과 사고에서 독특한 사유와 사고의 틀을 재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는 사람이 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사라져버릴 경험적 흔적을 붙잡고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또 다른 고통을 반복하면서 대체 불가능한 의미가 담긴 콘텐츠를 창조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세상에 하나 뿐인 원본임을 인정한다면, 다른 원본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비교하는 순간 복사버튼을 누르게 되고, 다른 결국 자신은 원본이 아닌 복사본의 인생을 살게 된다”(198). 다른 사람과 비교할 시간에 내가 겪은 경험적 흔적을 어떤 언어로 번역해낼 것인지, 어제 사용했던 언어 사용방식의 틀에서 벗어나 낯선 언어적 사용 문법을 창조하는 사람이 자기다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절망속을 질주하는 언어가 앎의 서광을 열어간다

 

2007년도 411사태를 겪고 쓴 처음 자기계발서 용기를 통해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용기라는 걸 깨달았다. 용기는 머리에서 나오지 않고 뛰는 뜨거운 심장에서 나온다.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기를 반복하면 용기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다음 사안을 붙잡고 검토를 거듭한다. 내 안의 꿈틀거리는 자기다움의 DNA는 논리적 분석과 치밀한 검토를 통해 객관적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나오지 않음을 브리꼴레르라는 책으로 증명해보고 싶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분석하고 검토하며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보다 몸을 움직여 도전해보고 시행착오을 통해 판단착오를 줄여나가는, 딜레마 상황에서도 장고 끝에 악수를 두지 않고 맥가이버처럼 가용한 자원과 도구를 활용, 임기응변력을 발휘하여 난국을 돌파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개발하는 사람이다. 삶의 지혜는 직선으로 달려가는 주로에서 나오지 않고 에둘러 걸어가는 에움길에서 나온다는 곡선으로 승부하라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나라는 점, 그리고 나를 바꾸는 방법은 언어를 바꾸는 길에 있음을 언어를 디자인하라를 쓰면서 언어의 한계가 나의 한계임을 깨달았다. 숱한 저술과 번역의 여정에서 내가 겪은 경험과 깨달음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고 해석하면서 가장 유영만 다운 문체가 가다듬어져 왔다고 본다.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능가할 수 없고, 쓴 글대로 글에 담겨진 그리움이 앞으로 걸어가는 미래의 길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대로 쓰고, 쓴 대로 살아가는 변주 속에서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나는 다름과 차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절망속을 질주하는 언어가 앎의 서광을 열어간다. 어떤 책은 읽는 게 아니라 책이 나를 읽는 경우가 있다. 책이 나를 무장해제시키고 거침없이 나를 파고들어 그 동안 축적된 인식의 두께를 사정없이 갉아먹기 시작한다. 실날같은 희망으로 기존 지식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온몸으로 항거하지만 절망은 아무런 이유없이 맹목적으로 안온한 인식의 터전을 저돌적으로 갈아 엎는다. 앎의 막다른 골목에서 완전 포위당한 채 처절함을 넘어 처참한 탄식에 눌려 낯선 앎의 미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다가 쓴 책이 코나투스. 유영만 다움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만난 스피노자가 예고 없이 급발진을 시도하더니 뚜렷한 방향감을 갖고 급습해서 나의 정신세계로 침범하고 들어온다. 뇌리에 담긴 기존 논리를 뒤흔들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인식의 주체로 생각했던 나를 변방으로 몰아붙인다.

 

그때부터 유영만의 코나투스는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고 생각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설명을 넘어 세상을 해석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저자의 몸을 관통하고 피끓는 열정에 버무려진 다음 존재 자체의 의미나 이유를 해석하는 틀에 걸러져 차가운 이성으로 관철된 주장이 잠시 머뭇거린다. 마지막으로 갈무리가 된 감정이나 정서들이 스스로 논리를 찾아 일리(一理)들의 행렬을 이룬다. 그 순간 일리있는 이야기들이 심장에 들어가 세상을 따듯하게 품으며 온기를 잉태한 진리의 빛으로 거듭난다.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욕망의 물줄기가 실존감과 긍휼감으로 주변을 비춰주고 공동체를 아우르는 올곧은 정신으로 거듭난다. 지금의 나를 넘어서려는 안간힘이 노력을 만나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출산하는 순간, 나 역시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남을 반복한다. 나는 영원히 살아있음의 존재를 증명하며 자기다움으로 다음 생을 이어간다. 권민 작가의 두 권의 책,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이라는 책도 자기 스스로 자기다움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일 것이다. 여전히 자기탐구과정을 반복하면서 자기다움이라는 산물은 명사로 정체되어 있지 않고 어제와 다른 부산물을 부단히 재창조하면서 자기다움의 본질과 정수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안간힘을 쓸 것이다. “자기다움은 내 안에서 항상성을 유지한다. 그것은 마치 변함없는 빛의 속도처럼 불변의 상수다. 시간이 지나도, 환경이 변해도 나만의 고유한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345). 변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다움이 어제보다 더 자기다워지는 과정이다.

 

오늘은 과거로 돌아가는 날이 아니라, 다시 미래로 흘러가는 날이다

 

옷장이 아이덴터티의 외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면, 책장은 지적 여정을 가록한 공간이다......책장은 내 정신적 성장을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이다”(354). 나의 옷장에는 과거 양복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언제부터는 양복은 격식차리기 위한 공식적 의복이 되었고 대부분의 강연장이나 미팅 장소에는 청바지에 비즈니스 캐주얼 복장으로 다닌다. 이제 양복 바지보다 청바지가 더 많아졌다. 나의 책장만 보면 이 사람의 전공이 의심될 정도로 시, 소설을 비롯한 문학 서적과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분야별로 저마다의 다른 주장을 머금고 서가에 꽂혀 있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관련 서적을 50권에서 많게는 100권 이상을 읽으면서 나의 경험적 해석틀로 녹여가면서 나만의 언어로 재가공한다. 다양한 책을 읽고 100권의 책을 번역하거나 저술했지만 모든 책을 관통하는 핵심가치는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에 포함된다. 자기다움을 표현하는 다섯가지 단어를 한 단어만 꼽으라고 하면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말하는 마지막 단어(Final Vocabulary)로 나는 도전을 꼽는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도전하는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아갈 것이다. “자기다움은 마치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본질적인 무언가다. 말하자면 자기다움은 목적과 가치에 가깝다”(344)고 말하는 이유를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오늘을 과거로 밀어낼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당겨 오늘로 만들고 다시 미래로 보낼 것인가? 미래를 사는 사람은 남들보다 두 배의 삶을 사는 것이다. 미래의 나로 오늘을 산다는 것은 내가 되고자 했던 그 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연대기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카이로스적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은 과거로 돌아가는 날이 아니라, 다시 미래로 흘러가는 날이다. 미래같은 오늘을 살자. 미래의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인생을 이해하는 방식은 우연보다 필연을, 사건보다 섭리를, 결과보나는 목적을 바라보는 것이다”(358). 오늘을 크로노스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순간적으로 오늘은 과거가 되지만,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결정적인 순간으로 재창조하는 순간, 오늘은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 미래 같은 또 다른 오늘이 된다. 오늘이 미래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미래의 내가 되어 오늘을 살아야 한다. 미래의 내가 오늘을 살기 위해서는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서 현실에 구현되는 방식으로 치열하게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 오늘 내가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삶은 과거가 이어져 온 시간적 흐름의 한 부분이 아니라 미래의 내가 꿈꾸고 상상하던 대로 미리 살아가며 자기다움을 완성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의 연속이다.

 

미래의 나는 나의 인생을 이해하고,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지금, 여기,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당신은 어느 미래에서 왔는가?”(359). “통곡이 올라오는 몸은 앞뒤로 흔들어줘야 하는 법.” 김혜순의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중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다. 미래의 나를 붙잡고 지금 여기서 오늘을 살아가려는 움직임은 매순간 통곡이 연주되는 신체성으로 미래 가능성을 만들어가려는 몸부림이다. 내 몸을 내가 주체적으로 부리는 가운데 미래의 내가 살아가는 자기다움도 미리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몸부림으로 항거하는 지금 여기서의 노력은 미래의 나로 살아가려는 자기다움에 응답하는 부름인 것이다. 그런 몸부림으로 미래의 자기다움을 창조하는 노력은 어느 순간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서 이룩되는 노력의 산물이라기보다 일상의 무의식적 습관으로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자기다움의 명인이 되는 여정의 부산물이다. “명인은 연습을 통해 의지를 떨쳐낸다. 명인의 솜씨란 무위다. 행위는 무위에 이르러 완성된다. 행복한 손은 의지와 의식이 없다”(28). 한병철의 관조하는 삶에 나오는 말이다. 무의식적 손놀림으로 쓰는 소설과 시와 편지와 회고록의 축적이 어느 순간 내 삶의 기적을 만들어낼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색다른 자기다움의 꽃이 필 것이다.

생존을 위해 일하지 않고, 존재를 위해 생동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시간의 기준이다(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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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랑한 것 - 지금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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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에게 물들어 사랑이 되고, 너는 나에게 물들어 시가 된다

 

작가가 쓴 모든 문장은 당연한 것,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에 시비를 걸고 질문을 던지며 한눈 팔다가 한 눈에 반한 오늘 사랑한 것에 대한 감각적 언어의 향연이자 의미의 식탁이다. 확정된 의미로 문장을 건축하지 않고 기존 단어의 의미와 결별을 선언하고 낯선 의미를 잉태시켜 기정사실에서 불편한 현실을 만나고 숨어있는 진실을 캐낸다. 그래서 작가가 쓴 행간에는 언제나 기존 사유체계를 전복하고 낯선 생각을 잉태시키는 혼란의 격전장이 펼쳐지고 오늘 사랑한 것이 안타까움과 처절할 정도로 간절한 사연을 품고 헤아릴 수 없는 사유의 깊이로 파고든다.

 

작가는 뜨거운 문제의식보다 뜨거운 문제를 만나 자기 몸이 온통 화상을 입을 때까지 세상과의 불화를 의도적으로 시작, 그 불화에서 불협화음(不協和音)을 일으키며, 작가가 포승으로 묶인 기존 앎의 암()’을 치료하기 위해 항암치료도 거부한 채 햇빛에 털어 말리고 흩날리는 바람에 일부러 휘둘리며 구름 속으로 끌려간다. 기존 이 걸린 에 회생 불가능한 사망선고를 내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앎의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진통을 하루 일과로 지부하지만 진지한 반복을 통해 의미의 반전을 꿈꾼다.

 

작가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언제나 낯선 비유를 사용한다. 비유가 달라지면 사유의 관문은 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하고 새롭게 열린다. 작가는 언어를 불에 달구고 정념의 모루에 얹어 두드리고 식히고를 반복”(245)하며 타성에 젖은 고루한 관념의 파편을 담금질한다. 행간과 행간의 사이는 단어가 단어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쑤셔넣고, “뒤따라 온 문장이 앞 문장의 몸통에 뿔을 박아넣어 생사를 넘나드는 축축한 긴장과 대치, 그 압축된 메타포(245)가 예고 없이 곳곳에서 격발되는 개념의 전쟁터이자 느닷없는 사랑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어찌할 수 없는 해일에 가깝다. ”그리움은 수증기 같아서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지만, 외로움은 갈증 같아서 삶의 수분을 빼앗아 말라 죽게 만든다“(258)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비틀리고 엇갈리다 평정을 찾아가는 안간힘의 글쓰기 향연이 펼쳐진다.

 

나는 너에게 물들어 사랑이 되고, 너는 나에게 물들어 시가 된다”(112). 이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단어가 다른 단어를 붙잡고 애정하는 장면이 느닷없이 급습해서 맨정신으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기 어렵다. “가을의 우울은 생리통”(78) 같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이곳에 안개가 다녀가면 담쟁이 덩굴이나 화살나무 잎들에서 푸른 웃음기가 빠져나가고 갱년기 같은 불그레한 반점이 번집니다. 푸름을 탐하는 안개의 욕망은 추하고 노골적이어서 앞산의 상수리 나무들이 밤바다 문단속을 심하게 합니다”(78)라며 가을의 낭만에 취하며 그리움의 감도”(78)를 한껏 드높인다. “찰나의 감탄이 아니라 육중한 감동의 서사”(121)는 사계절을 시인의 서가에서 육신을 헐어가며 썼고, 시간을 긁어가며 더디게 썼다는 몸부림의 흔적이자 고뇌의 얼룩이다. 모든 단어에 서린 사연의 무게와 깊이사유의 무게와 깊이를 결정한다.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고 멈춤의 시간적 여유 없이 읽고 말았다. 가을 서녂하늘에 걸려 있는 노을에 그을린 그리움이 온몸으로 스며들며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는 공감의 파장이 일어나고, 작가가 품은 오늘 사랑한 것들의 색감으로 내 몸은 심하게 물들어버렸다. 오이가 피클로 바뀌며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났다. 육신의 고통으로 건져올린 단어들의 꽃이 나에게도 꽃이되어 꽂혀버렸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평범하지만 비범하고 비장한 한 문장을 남긴다. “내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다는 뜻이어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네가 살아가는 일에 기여하는 것(307)임을 잊지 말자는 먹먹하고 엄숙한 선언과 주장이 의미를 심장에 꽂아 묵직한 감동으로 살아 움직인다.

 

#오늘사랑한것 #행성B #림태주작가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나는 너에게 물들어 사랑이 되고, 너는 나에게 물들어 시가 된다"(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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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김영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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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명령(命令)하는 사람입니까명명(命名)하는 사람입니까?

김영희의 식물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를 읽고


《식물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를 쓴 김영희 작가는 이름 없던 한 들꽃을 최초로 발견하고 ‘쇠뿔현호색’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명명자이다. “처음 씨앗에서 발아한 1년생  쇠뿔현호색은 잎이 하나입니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하는 어린 식물의 경우, 잎은 끝이 뾰족한 타원형의 모양을 가집니다. 꽤 동글동글하다는 이야기지요. 하나이던 동그란 잎은 해를 거듭하면서 셋이 되고, 나중에는 원줄기에서 다시 셋으로 깊게 갈라진 솔잎처럼 가늘고 긴 잎들이 달리게 됩니다(78-79쪽).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잡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잡초는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대체불가능한 생명체가 된다. 현호색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생식물이 우리나라에만 20종이 넘는다고 한다. 현호색이라는 성씨를 따라 저자가 최초로 이름을 붙여준 ‘쇠뿔현호색’은 저자의 오랜 관심과 관찰, 주도면밀한 가설을 검증하며 드디어 자기 이름을 갖게 된 식물로서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서식하는 한국특산식물이라고 한다. 그렇게 작가의 친구이자 연인이 된 ‘쇠뿔현호색’은 자기 이름에 새겨진 숱한 사연을 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태계의 한 구성원이 된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이름에는 주름과 시름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철학자 들뢰즈는 다중체 또는 다양체(multiplicity)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다중체는 말 그대로 다양한(multiple) 주름(pli)이 축적되어서 생긴 한 사람의 정체성(multiplicity)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름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직간접적인 경험의 흔적들이다. 내가 겪으면서 내 몸에 남긴 얼룩과 무늬가 다양한 주름으로 축적되면서 나의 정체성이 생성되고 형성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담긴 사연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만큼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만큼 살아오면서 겪어낸 몸부림과 안간힘의 흔적으로 생기는 주름과 맥을 같이한다. ‘이름’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어낸 ‘주름’과 시름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생긴 사연의 다른 이름이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함께 이름에 담긴 아픈 사연도 사랑한다는 의미다. 작가로부터 처음 자기 이름을 갖게 된 ‘쇠뿔현호색’을 비롯, 며느니밑씻개나 큰개불알풀처럼 입에 오르내리기 거북할 정도로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는 식물도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식물이다.


“식물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며, 곧 그들과 사랑과 빠지겠다는 열린 마음입니다. 이름을 알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은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11쪽). 사랑하면 질문이 쏟아진다. 이 식물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식물 이름에 담긴 독특한 사연이나 있는 것일까? 그 이름에 담긴 역사적 의미가 있거나 지역적 고유함을 담아내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갖가지 궁리를 하면서 관심의 눈길은 급기야 손길을 부른다. 가만히 앉아서 식물의 이름을 관념적으로 연구하기보다 그 식물이 자생하는 곳으로 직접 가서 감각적 눈과 오감을 열고 관찰해 본다. “책 속에서 식물을 깊이 있게 공부했다 하더라도 직접 보는 느낌은 다를 수 있거든요. 꼭 현장에서 식물을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느끼고 사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사람 잡는 선무당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길입니다”(51쪽). 저자는 식물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이름의 사연의 뒤꼍 기를 파고들어 가 학명과 속명은 물론 정식 이름 이외에 다르게 불리는 이명이나 민간에서 오랫동안 불려 오는 지방명인 향명과 우리나라에서만 고유하게 불리는 국명까지도 파고들어 그 어원과 사연을 조사하고 직접 그 식물이 자행하는 현장으로 뛰어들어 샅샅이 확인하고 살펴보며 궁리를 멈추지 않는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비슷한 이름이지만 전혀 다른 사연을 품고 있다


저자는 더불어서 식물의 이름만 기억하지 말고 식물의 형태와 생태를 중심으로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함께 기억할 때, 식물이 품고 있는 이름의 본질과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까치밥나무와 까마귀밥나무는 각각 까치와 까마귀에게 먹이가 되는 나무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깊은 산속에서 드물게 자라는 까치밥나무가 마을 주변에서 자라는 까치를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낮은 산지 숲 속에서 자라는 까마귀밥나무는 까마귀 눈에 뜨일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까마귀 밥으로 사용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저자의 추측에 따르면 맛있는 열매인 까치밥나무와 맛없는 열매인 까마귀밥나무에 각각 우리 정서에 맞게 은유한 이름일 것이라고. 관심을 갖고 관찰하다 보면 뜻밖의 통찰에 이르기도 하고 관찰한 결과를 세심히 고찰하며 상상력을 발동시키면 뜻밖의 또 다른 깨달음의 물꼬가 트이는 경우도 있다.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저의 취미이자 특기”(115쪽)라고 생각하는 작가는 큰개불알풀을 보고도 개불알모양으로 보이지 않고 설익은 풋사랑 모습을 띠면서 “뾰족한 아랫부분은 꽃받침 아래에 깊이 감추고, 둥글고 부드러운 부분만을 드러낸 모양”(115쪽)에서 하트모양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이 책의 곳곳에는 사진 없이 식물들의 다양한 사실적 모습을 묘사하고 기술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해당 식물의 양태를 상상하게 만든다. “연영초 잎은 화려한 파티드레스입니다. 허리에서부터 넓게 세장의 잎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잎의 형태를 따라 곡선을 그리며 끝까지 쭉 뻗어 내린 잎맥은 뾰족하게 흐른 날카로운 잎 끝에 닿습니다. 그 큰 잎맥과 잎맥 사이에 사선으로 연결된 작은 맥들이 치맛자락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합니다”(122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 스칼렛 오하라의 드레스에 연영초를 비유하면서 “유혹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는 있으나 쉽게 보이고 싶지는 않은 이중적인 마음”(123쪽)을 드러낸다. “매실과 살구가 그렇고 자두와 복숭아 역시 봄에 꽃을 피웁니다. 뒤이어 배와 사과꽃이 핍니다. 이 중에서 매실, 살구, 자두, 복숭아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고 배와 사과는 잎과 꽃이 함께 나옵니다. 결국 잎과 함께 꽃잎 피는 배나무와 사과나무는 같은 봄이라도 좀 더 늦게 꽃이 피는 셈입니다”(224쪽). 관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세밀한 차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대자연의 위대한 교향곡을 연주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단어에는 그 사람이나 식물이 고유한 향기가 스며들어 있다


늘 만나는 식물이지만 호기심이나 관심을 갖고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저 바람에 흔들리고 비바람과 천둥 번개 맞고 사계절을 따라 새싹과 잎을 만들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가시연꽃과 연꽃은 같은 연꽃 같은데 같은 연못에서도 앙숙으로 살아가는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밀이다. 한해에는 연꽃이 연못을 지배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다 다른 해에는 가시연꽃의 위세에 눌려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경우가 있다. “눈을 뚫고 피는 꽃을 뜻하는 눈색이 꽃이나 얼음 사이에서도 핀다고 해서 얼음새꽃”(116쪽)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복수초(福壽草)는 원수를 갚는 복수(復讐)와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때로는 한눈을 팔아야 두 눈으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모습 속에 담긴 생명체의 생존 방식과 원리를 간파할 수 있으며 종종 한눈에 반하는 식물의 기이한 모습을 보고 경탄에 마지않는 감탄사를 자기도 모르게 연발하는 경우를 만난다. 한눈을 팔지 않으면 한눈에 반하는 식물의 경이로운 모습을 포착하기도 쉽지 않다.


백리향과 천리향 그리고 만리향은 진짜 향기가 백리, 천리, 만리를 가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직감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다 갑자기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에 더 비중을 두고 알아본다. “백리향은 꿀풀과 이고, 천리향(서향)과 만리향(백서향)은 팥꽃나무과로 과(科)부터 완전히 다릅니다”(27쪽).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향기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생김새나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서 유사한 친척은 아니라고 한다. 백리향은 실제로 향기가 100리(40Km)까지 가지 못하지만, 향기를 100리까지 데려다는 방법은 향수나 화장품 같은 인위적으로 만든 향기를 제거하고 백리향으로 온몸에 스며들게 하고 차를 타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고유한 그 사람 특유의 향기가 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떤 단어를 떠올리면 그 단어와 내 삶의 희로애락이 겹쳐지면서 단어에 담긴 내 삶의 무게감이 묵직하게 다가오면서 특유의 진한 향기가 배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향기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사람은 인간적 신뢰가 없거나 타인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자기 이익에만 함몰된 경우가 많다.



이름은 심층적 의미나 의도를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에 따르면 너도밤나무나 나도밤나무는 모두 밤나무를 닮았지만 이들은 가깝지도 않고 친척관계는 아니다. 둘 다 밤나무니까 가까운 친척사이로 차이점보다 닮은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경우가 식물 이름에는 비일비재하다. 마찬가지로 바람꽃이 있는가 하면 나도바람꽃과 너도바람꽃도 존재한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자기 이름을 가진 식물은 자기 이름값을 하면서 식물 생태계에서 자기 방식으로 살아간다. 고마리라는 풀은 수질 정화에 탁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가축의 먹이가 되어준다는 이유로 ‘고마운 이구나’라는 이유로 고마운 풀이라고 불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걸리적거리나 그만 자라거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받는 풀로도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자연의 모든 식물은 저마다의 존재이유가 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험난한 세상을 원리나 노하우가 있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창포와 꽃창포 역시 소속이 완전히 다른 식물이다. 식물의 이름만 보고 섣불리 사람의 입장에서 재단하고 평가하지 말라는 의중과 의도도 숨어 있다. 예를 들면 수술이 검은색인 다래와 노락색인 개다래와 쥐다래는 열등의 표식으로 사용되는 ‘개’와 ‘쥐’라는 접두어의 의미와 관계없이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인간의 상상력을 능가할 정도로 자기만의 재능과 적성을 자신감 있게 표현하며 살아간다. 이름에 담긴 표면적인 의미는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심층적인 의중이나 의도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 책의 특징 중의 하나는 식물이름과 관련된 사진이 한 장도 없어 저자의 설명이나 해설을 따라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사진을 보면 이미지로 식물의 모습을 쉽게 짐작하고 더 이상 생각의 날개를 펼치지 않지만 사진이 없어서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저자의 설명이나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뇌리 속을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꽃 필 때의 모습이 고봉으로 담은 쌀밥 같아서 붙여진 이팝나무와 좁쌀로 밥을 지어놓은 것과 비슷한 조팝나무를 설명한 부분에서는 시종일관 쌀밥과 조밥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비교하고 비유하면서 두 나무의 차이를 상상하게 된다. 가시가 있어서 찔리는 꽃이서 조심스럽게 꺾을 수 있는 꽃이라는 들장미 찔레꽃과 손으로는 절대 꺾을 수 없는 바다장미 해당화(海棠花) 역시 각각의 장미에 박힌 가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꺾을 수 있는 꽃과 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시가 박힌 해당화를 구분하고 그 차이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 놓으며 읽기를 멈추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장미는 꽃집에 입성하지만 들장미 찔레꽃과 바다장미 해당화는 왜 꽃집에 아직도 입성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찔레꽃과 해당화에게 물어봐야 될지 꽃집 주인에게 물어봐야 될지는 누가 알려주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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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을 열고 미묘한 차이를 체감하지 않고는 미묘한 차이를 알 길이 없다


그냥 주마간산(走馬看山) 방식으로 주변의 식물을 보면 그게 그거 같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식물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차이를 구분하고 구별해 내기는 쉽지 않다. 진달래, 철쭉, 산철쭉의 차이점을 구분해서 설명하는 챕터 글을 몇 번 읽어도 아리송하다. 진달래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고, 철쭉이나 산철쭉은 잎과 함께 꽃이 핀다고 한다. 색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진달래는 진한 색이고 철쭉은 그보다 연한 색, 즉 빨강 물감에 흰색 물감을 섞었을 때 나오는 분홍색이라고 한다. 또한 철쭉은 잎이 산철쭉보다 크고 잎끝이 둥글고 산철쭉은 잎이 작고 끝이 뾰족하다는 설명을 반복해서 읽어도 관념적으로 조금 이해될 뿐, 내가 직접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산철쭉 앞에 직면하면 뭐가 뭔지 구분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탁월한 설명을 듣고 머리로 이해가 와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 까닭은 내가 직접 세 가지 꽃 앞에 직면해서 감각적으로 느끼는 차이를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식물을 구분한다는 의미는 다른 식물과 분리시켜 독립적인 생명체로 인식한다기보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 주고 내가 너와 어울릴 수 있지만 나만의 대체 불가능한 고유함을 다름과 차이로 인정하고 수용해 달라는 식물들의 항거에 우리가 겸허히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참나뭇과에 속하는 6형제 나무, 즉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를 설명하는 내용은 더욱더 혼돈을 넘어 혼란이 급습하지만 그걸 잠재울 명료한 구분 기준으로 서로의 차이점에 따라 구분하는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갈참나무는 잎을 갈아치운다는 가랑잎과 갈잎에서 유래된 이름이자 모든 나뭇잎이 푸르다는 고정관념을 깨 주는 주인공이 바로 갈참나무인 까닭은 어린 나뭇잎이 꽤나 갈색이다. 신갈나무는 전형적으로 푸른 잎이고 떡갈나무는 붉은빛이 감도는 밝은 색으로 분홍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상수리나무는 앞면보다는 약간 노란색이 감도는 초록색이고, 굴참나무는 앞면은 초록색이고 뒷면은 분녹색으로 흰빛이 난다고 설명하지만 참나무 6형제를 구분해서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육감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내가 직접 참나무 6형제를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육감적으로 그 미묘한 차이를 가슴으로 느껴봐야 참나무 6형제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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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을 바꾸면 운명도 바뀌는 혁명이 일어난다


저마다의 이름에는 각자 살아오면서 겪어낸 사연과 뒷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을 품은 채 해독이나 해석되기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살구나무는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고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자두나무는 자도(紫桃), 즉 자주색의 복숭아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겨울을 당차게 살아내며 겨우겨우 살아남아서 겨우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라는 사연을 들어보면 그 식물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식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사람에게 말 못 할 사연을 남기기도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식물은 한 번 씨앗이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뼛속 깊숙이 박혀 있는 생명체다. 예를 들면 물이 좋아 물가에 사는 버드나무는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하다. 하지만 씨앗이 날아가다 바람의 방향을 잘 못 타고 가가 물가에 떨어져 생명성의 보장받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할 수도 있지만 씨앗이 물에 닿지 않도록 털이 있어서 물에 떨어져도 떠내려가다 물가장자리 쪽으로 운 좋게 맞닿아 생명성을 이어가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식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자리 탓을 하는 게 아니라 자세를 바꿔서 자격을 새롭게 취득하는 거다.


이름을 알려고 노력하면서 이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이름은 마음과 생각의 주름으로 남고 이름으로 구분되는 식물의 근원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색찬란한 삶을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식물들에게 아직은 미안한 이야기지만 누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을 쓴 작가처럼 가던 길도 멈춰 서서 늘 만나고 지나쳤지만 어제와 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주변의 식물친구들에게 안부인사라도 전해주고 싶다. 하지만 한 번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고 멀리서 관망하거나 관조하면서 가까이서 살아가는 내 삶의 친구이자 연인인 식물들에게 안부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바쁜 삶의 일과에 매몰되어 살아왔던 적이 더 많지 않았던가. 식물인간에서 식물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내 삶의 철학과 교훈을 배우는 식물사람으로 거듭나며 식물철학자로 재탄생하고 싶은 우리들에게 이 책은 명령보다 명명이 한 사람의 운명도 바꾸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명령하는 사람보다 자기만의 문제의식으로 명명하는 사람이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하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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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며, 곧 그들과 사랑과 빠지겠다는 열린 마음입니다. 이름을 알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은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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