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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낯설게 보기 - 우리는 어떻게 죽고,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박혜윤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6년 8월
평점 :
죽음 낯설게 보기: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 죽기 전에 죽음의 의미를 재음미하다
《죽음 낯설게 보기》를 읽고 나서
“죽음을 바라보는 일은 곧, 오늘의 삶을 바라보고 질문하는 것”(6쪽)이고, “죽음 낯설게 보기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모험”(9쪽)이지만 현실은 “죽음이라는 숫자 속에는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서사는 사라지고 오로지 숫자 1로만 기억”(40쪽)되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이런 절망 앞에서 죽음이 맞이하는 저마다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습니다. 스탈린이 말한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 명의 죽음은 통계”라는 말의 뒤안길을 파묻고 싶었고, 죽음이라는 “고정관념은 나의 전두엽에 박제된 도덕률”(116쪽)임을 벗겨내고 싶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 나의 지극한 유한한 본질을 목격하며 느끼는 근원적인 고통”(118쪽)을 곁에서 느끼는 고통의 한계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극한적 한계로 내 몰아 “ 결말이 명확하게 정해져있음에도, 그 종착지에 닿기까지 환자와 주변인들의 삶이 어떻게 불탄 재처럼 바스러지는지 몸서리치게 겪어”(118쪽)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는 불보듯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는 실험·계량·관찰을 통해 검증된 결론을 진리로 보지만, 이 잣대를 적용하면 돌봄은 데이터와 수치로 축소되고,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온기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밀려”(235쪽)나는 현실 앞에 죽음을 목숨걸고 돌보려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에 작은 돌봄을 얹어보고 싶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삶과 유리된 추상의 언어가 아니라, 나의 삶을 지탱하고 추동하는 구체적인 지렛대”(64쪽)임을 확인하고 함께 공감하는 공명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죽음을 낯설게 바라보는 세기적 철학자들을 한국에 초대했습니다.
늦가을의 정취가 내려앉은 삼청동 호젓한 북카페. 통창 너머로 붉게 물든 플라타너스 낙엽이 흩날립니다. 묵직한 원목 테이블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에스프레소 잔들이 놓여 있고, 아서 프랭크, 자크 데리다, 장 폴 사르트르, 마르틴 하이데거, 질 들뢰즈,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모리스 메를로-퐁티, 스피노자, 푸코, 그리고 미야노 마키코와 이소노 마호가 마주 앉아 있습니다.
사회석에 앉은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특유의 직관적이고 생동감 있는 어조로 좌중을 둘러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침대”라고 말하는 마크 트웨인의 명언이 떠오르는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가을의 ‘머리’를 살갑게 붙잡고 죽음의 그림자 곁에서 죽기 전에 죽음을 진지하게 고뇌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유영만: 바깥의 낙엽이 나무와의 관계를 정리하며 바닥으로 하강하고 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은 끝이 아니라 다음 계절의 거름이 되는 또 다른 접속의 시작이지요. 엽락(葉落)이 분본(糞本)이 된다는 신영복 교수님의 나무에게 배우는 소중한 교훈도 떠오릅니다. 엽락분본(葉落糞本)은 낙엽이 떨어져 썩어 뿌리의 거름이 되듯, 겉멋과 허식을 버리고 삶의 근본을 충실히 다지는 희망의 과정을 바라보는 시선의 따듯함입니다.
오늘 우리는 ‘책상머리의 죽음학’이 아니라, 생생한 육체의 숨결과 존재의 가장 뜨거운 가장자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연명’, ‘임종’, ‘고독사’, ‘안락사’와 ‘조력사’, 그리고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날카로운 물음표를 던지고 죽음 관련 담론 속에서도 색다른 깨우침의 느낌표를 건져 올려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육신의 쇠함을 병리학적 관점에서만 보는 시선 앞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담긴 사회문화적 함의와 개인의 특수한 상황은 실제 현장에서 고려되기 어렵(77쪽)”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화두는 기계 장치와 생체 반응 사이에 얽힌 ‘연명(Life-Sustaining Treatment)’입니다. 호흡기와 튜브로 연장되는 이 생명의 시간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스피노자 선생님, 존재를 지속하려는 ‘코나투스(Conatus)’의 관점에서 기계에 의존한 생명 연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스피노자: 제가 《에티카》에서 말한 코나투스는 단순히 물리적인 심장 박동을 1분 더 지속시키는 기계적 연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본질적 역량을 보존하고, 신체와 정신의 활동 능력을 확장하려는 내재적 힘입니다. 인위적인 호흡기와 투약으로 인해 타인의 처분에 전적으로 종속되고, 자신의 능동적 힘(변용 능력)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는 코나투스의 실현이라기보다 외부 원인에 의해 압도당한 무력한 상태에 불과합니다. 삶의 양보다 중요한 것은 신체가 세계와 교감하며 능동적으로 변용할 수 있는 잠재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한 자기 존재를 지속하려는 본능적 욕망의 발현이 어제와 다름을 반복하는 원동력입니다.
아서 프랭크: 저는 스피노자 선생님과 조금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연명 치료의 현장에서 환자의 몸은 의료 체계의 식민지가 되기 쉽습니다. 병원은 연명을 통해 신체적 기능의 유지를 승리(Remission) 서사로 포장하려 하지만, 침상에 누운 이에게 고통은 단지 수치나 그래프가 아닙니다. 몸이 기계에 포섭되는 순간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증언의 서사는 질식당하고 맙니다. 연명이란 기계가 유지하는 생체 신호가 아니라, 그 몸이 끝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회복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한 몸은 외부에서 조작하는 대상(Object)이 아니라 세계를 지각하는 영점(Zero point), 즉 ‘체화된 주체(Corps propre)’입니다. 연명 기계가 환자의 고유한 몸틀(Schéma corporel)을 대체해 버릴 때, 그 몸은 더 이상 세계를 향해 지각을 열지 못하고 기계적 부품으로 전락합니다. 침상 위의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온기와 미세한 전율, 타인과 세계를 향한 지각의 지평이 열려 있는가—그것이 연명의 진정한 분기점이어야 합니다. 비록 몸은 기계적 도움으로 연명을 유지하지만 내 몸의 어딘가 감각은 살이 고스란히 느끼는 죽음의 순간을 감지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저는 퐁티 박사님과 조금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임상 현장에서 제가 만난 수많은 환자들에게 연명 치료는 종종 가족과 의료진의 부정(Denial)에서 비롯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공포가 환자의 육체에 호흡관을 꽂아 넣는 것이지요. 환자가 분노와 타협, 우울을 거쳐 마침내 평온한 수용(Acceptance)의 단계로 나아가려 할 때, 기계의 소음이 환자의 영혼이 겪어야 할 가장 거룩한 내적 화해를 방해하고 맙니다.
푸코: (안경을 벗어 만지작거리며 잠시 침묵한다) 연명… ‘삶을 연장한다’는 말 자체가 현대 생명정치(biopolitique)의 가장 전형적인 문법을 드러냅니다. 근대 권력은 더 이상 군주처럼 ‘죽게 만들고 살려 두는’ 것이 아니라, 인구를 ‘살게 만들고 죽도록 내버려 두는’ 권력입니다.
병원 침대에 묶여 기계 장치가 산소를 불어넣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그 연장의 시간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은 주체가 스스로의 실존을 가꾸는 시간이 아니라, 의학적 규율과 제도적 지식이 신체를 완전히 점유하는 시간입니다. 고대의 스토아학파에게 삶은 물리적 지속의 길이가 아니라, 한 편의 비극처럼 완성된 완결성이었습니다. 생체 신호가 유지된다는 이유만으로 신체를 국가와 병원의 관리망 안에 인질로 잡아두는 연명은, 자기 배려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생물학적 감금’에 가깝다는 고뇌를 지울 수 없습니다.
유영만: 기계적 연결이 영혼의 접속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뼈아픕니다. 하지만 연명은 “화려한 의료기술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삶을 날 것 그대로 직시하도록 요구하는 반사판”(78쪽)이라는 깨달음은 연명의 무의미함의 의미성을 다시금 성찰하게 만드는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적 무의미함이 개인의 의미로 자리 잡기까지는 무의미가 의미로 전환되는 회색지대를 견디는 내공이 필요”(79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숨이 멎어가는 바로 그 찰나, '임종(Deathbed)'의 순간으로 넘어가 보지요. 임종은 생의 단절일까요, 아니면 존재가 완성을 향해 던져지는 사건일까요?
마르틴 하이데거: 사람들은 흔히 임종을 단순히 물리적 시계가 멈추는 생물학적 종말(Verenden)로 봅니다. 하지만 제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간(Dasein, 현존재)에게 죽음은 생의 끄트머리에 붙은 부록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Sein-zum-Tode)입니다. 임종은 존재가 세상의 잡담과 비본래적인 세인(Das Man)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과 직면하는 가장 실존적인 결단의 순간입니다. 타인이 대신 죽어줄 수는 없습니다. 임종은 오롯이 나의 존재 전체를 회수하는 계기입니다. 비록 그 가능성이 최후의 죽음으로 흐르는 어쩔 수 없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해도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름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 하이데거 선생, 나는 당신의 그 장엄한 존재론에 결코 동의할 수 없소. 죽음은 내 존재의 완성이 아니라, 나를 철저한 ‘타자의 시선’ 속에 던져버리는 파렴치한 한계일 뿐이오. 내가 《존재와 무》에서 말했던 것처럼 살아있는 한 나는 대자존재(Being-for-itself)로서 끊임없이 미래를 기투(企投)하고 자유를 실천합니다. 그러나 임종의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딱딱한 즉자존재(Being-in-itself)로 굳어버립니다. 즉자존재는 의식 없이 그 자체로 꽉 차 있는 사물의 존재 방식이며, 대자존재는 의식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임종은 내 모든 주체적 가능성이 무화(Néantisation)되고, 타인들이 나를 하나의 박제된 사실성으로 판정해 버리는 난폭한 사건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아서 프랭크: 고독사는 한 인간의 육체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서사적 유폐(Narrative Abandonment)이자 침묵의 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책 《아픈 몸을 살다》에서 줄곧 강조했듯, 고통받는 몸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그 고통의 증인이 되어줄 타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몸이 무너져 내릴 때 인간은 “내가 지금 겪는 이 아픔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타인의 눈빛과 귀를 통해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병든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증언이자, 타인의 응답을 기다리는 부름입니다. 그러나 고독사 현장의 몸은 철저히 침묵 속에 방치됩니다. 그는 신음하고, 두려워하고, 도움을 청하려 하지만, 그 소리를 받아 안아줄 '경청하는 타자'가 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서사는 화자와 청자가 마주 앉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관계적 사건인데, 고독사는 서사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 버립니다.
현대 사회는 고독사를 겪은 사람을 사후에 발견하여 특수 청소의 대상, 치워야 할 오염된 물질, 혹은 쓸쓸한 복지 통계의 숫자로 환원해 버립니다. 이는 죽어가는 자의 서사적 권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박탈하는 일입니다. 고독사는 단순히 혼자 숨을 거두었다는 물리적 고립을 넘어, 한 인간이 평생 몸으로 써 내려온 고유한 삶의 서사가 단 한 사람의 증인도 만나지 못한 채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 비극입니다.
스피노자: 프랭크 교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저는 이를 코나투스(Conatus)의 전면적 질식과 신체 연대의 파탄이라는 관점에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에티카》에서 제가 논증했듯, 인간의 본질인 코나투스는 진공 상태에서 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립된 섬이 아니며, 외부의 다른 신체들과 마주치고(연합하고)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 역량과 활동 능력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바로 인간 자신’입니다. 좋은 타자와의 마주침은 기쁨(Lætitia)을 낳고 우리의 코나투스를 증대시키지만, 파괴적인 마주침이나 철저한 고립은 슬픔(Tristitia)을 낳고 존재 역량을 급격히 떨어뜨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고독사는 결코 개인의 선택이나 단순한 불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신체가 타인의 신체와 맺을 수 있는 모든 유익한 마주침의 통로가 차단되어, 외부의 파괴적인 정동과 질병에 대항할 역량의 연합(Co-operative Power)을 상실한 채 서서히 말라 죽어간 상태입니다.
인간의 신체가 극심한 고립에 처하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내재적 힘인 코나투스는 무력한 수동성(Passivity)의 극치로 내몰립니다. 신체는 더 이상 외부와 긍정적인 변용을 주고받지 못하고, 오직 결핍과 공포, 고립감이라는 슬픈 정동의 파도에 온전히 압도당합니다. 따라서 고독사는 개인이 생명력을 잃은 사건이라기보다,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특정 신체를 외딴곳에 방치하여 마땅히 순환해야 할 연대와 공통 개념(Notiones Communes)의 연결망을 끊어버린 생태적 괴사에 가깝습니다.
유영만 (사회자):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더욱 먹먹해집니다. 프랭크 교수님은 고독사를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 명의 청자도 만나지 못한 서사의 압살로 짚어주셨고, 스피노자 선생님은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생명력을 북돋아야 할 코나투스가 사회적 고립 속에서 완전히 질식당한 참사로 정의해 주셨습니다. 결국 고독사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고 연결을 포기한 우리 사회의 관계 생태계가 빚어낸 참혹한 거울인 셈입니다.
미야노 마키코: 사르트르 선생님의 말씀처럼 임종은 폭력적일 만큼 불확실합니다. 제가 암 투병을 하며 이소노 마호 씨와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 뼈저리게 느낀 것은, 질병과 죽음은 논리적인 필연이 아니라 완전한 우연의 침입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소노 마호: 맞습니다. 미야노 씨와의 대화를 기록한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에서 우리는 임종을 모든 것이 예견된 결말로 가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임종은 고립된 주체가 홀로 감당하는 비극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우연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타인과 마지막으로 말을 주고받는(Response-ability) 상호적인 만남이어야 합니다. 닥쳐올 우연을 함께 견디는 것, 그것이 임종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푸코: 고대인들은 죽음의 훈련(melete thanatou)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세네카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마치며 죽음을 시뮬레이션했습니다. 그들에게 임종은 어느 날 닥쳐오는 갑작스러운 재앙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훈련(askēsis)해 온 주체화 작업의 마지막 방점이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임종은 사유화되기는커녕 완벽하게 탈(脫)주체화되었습니다. 차가운 병실 스크린의 심박수 그래프가 멎는 순간 의사가 선언하는 기술적 절차가 되었죠. 진정한 임종이란 자신의 삶 전체를 돌이켜보며, 죽음이라는 최종 한계선 앞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완성하는 진실의 순간(parrhesia)이어야 합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규범적 위로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직조해 온 삶의 윤리를 온전히 끌어안는 내적 평정의 순간 말입니다.
유영만: 우연의 파도 속에서도 타인과의 대화를 놓지 않는 것이 임종의 본질이라는 말씀이 가슴을 울립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 대화조차 허락하지 않는 비극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바로 세 번째 주제, '고독사(Dying Alone)'입니다. 관계의 생태계가 파괴된 곳에서 홀로 식어가는 이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질 들뢰즈: 고독사는 관계망이 단절되어 생명의 변용 능력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입니다. 생명은 본래 고정된 단일체가 아니라 수많은 타자, 사물, 공기와 뒤섞여 새로운 배치를 짓는 '아장스망(Agencement, 배치)'이자 '다중체(Multiplicity)'입니다. 고독사는 한 개인이 사회적 장치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기존의 영토에서 벗어나 탈영토화(Détérritorialisation)된 뒤, 새로운 삶의 영토를 재배치하지 못한 채 고립된 홈패인 공간(Espace strié)에 갇혀 접속을 잃어버린 잠재력의 영도(Zero degree)입니다. 고독사야 말로 신체와 신체가 부딪히며 생명력을 증폭시키는 에피쿠로스적 마주침이 차단된 가장 비극적 배치(아장스망)입니다. 이 배치를 스스로 재배치할 수 있는 역량을 고독사에 직면한 한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이 과연 마땅한 조치이자 배려라고 할 수 있을까요?
푸코: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쉰다) 이 지점에서 저는 가장 뼈아픈 분열을 느낍니다. 고대 철학에서 고독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영혼을 단련하는 숭고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고독사는 자기 선택에 의한 은둔이나 자율적 고독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생산성 논리에 쓸모없어진 주체들을 사회가 조용히 버려두는(laisser mourir) 생명정치적 유기입니다. 제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말한 자기 배려가 가능하려면 자신을 돌아볼 최소한의 물질적·관계적 거점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관계망에서 철저히 파편화되어 고립된 채 맞이하는 죽음을 자율적 실존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배려의 완성이 아니라, 근대 사회 안전망의 실패가 개인에게 덮어씌운 잔혹한 고립입니다. 이 소외된 이들의 고통 앞에서 이론적 미학만을 말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 폭력일 테지요.
자크 데리다: 고독사는 환대(Hospitalité)의 절대적 불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조건 없는 환대란 낯선 타자가 문을 두드릴 때 계산 없이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화된 세계는 모든 관계를 조건화하고 계산 속에 가둡니다. 고독사 현장에 남겨진 굳게 닫힌 문은, 현대 사회가 타자의 타자성을 견디지 못하고 환대의 문을 걸어 잠갔다는 증거입니다. 고독사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회적 시스템의 파산 선고입니다.
아서 프랭크: 고독사는 한 인간의 육체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서사적 유폐(Narrative Abandonment)이자 침묵의 형벌입니다. 제 책 《아픈 몸을 살다》에서 줄곧 강조했듯, 고통받는 몸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그 고통의 증인이 되어줄 타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몸이 무너져 내릴 때 인간은 “내가 지금 겪는 이 아픔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타인의 눈빛과 귀를 통해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병든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증언이자, 타인의 응답을 기다리는 부름입니다.
그러나 고독사 현장의 몸은 철저히 침묵 속에 방치됩니다. 그는 신음하고, 두려워하고, 도움을 청하려 하지만, 그 소리를 받아 안아줄 경청하는 타자가 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서사는 화자와 청자가 마주 앉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관계적 사건인데, 고독사는 서사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 버립니다. 현대 사회는 고독사를 겪은 사람을 사후에 발견하여 특수 청소'의 대상, 치워야 할 오염된 물질, 혹은 쓸쓸한 복지 통계의 숫자로 환원해 버립니다. 이는 죽어가는 자의 서사적 권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박탈하는 일입니다. 고독사는 단순히 혼자 숨을 거두었다는 물리적 고립을 넘어, 한 인간이 평생 몸으로 써 내려온 고유한 삶의 서사가 단 한 사람의 증인도 만나지 못한 채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 비극입니다.
스피노자: 프랭크 교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저는 이를 코나투스(Conatus)의 전면적 질식과 신체 연대의 파탄이라는 관점에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유영만 교수의 《코나투스》와 제가 《에티카》에서 제가 논증했듯, 인간의 본질인 코나투스는 진공 상태에서 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립된 섬이 아니며, 외부의 다른 신체들과 마주치고(연합하고)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 역량과 활동 능력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바로 인간 자신”입니다. 좋은 타자와의 마주침은 기쁨(Lætitia)을 낳고 우리의 코나투스를 증대시키지만, 파괴적인 마주침이나 철저한 고립은 슬픔(Tristitia)을 낳고 존재 역량을 급격히 떨어뜨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고독사는 결코 개인의 선택이나 단순한 불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신체가 타인의 신체와 맺을 수 있는 모든 유익한 마주침의 통로가 차단되어, 외부의 파괴적인 정동과 질병에 대항할 역량의 연합(Co-operative Power)을 상실한 채 서서히 말라 죽어간 상태입니다. 인간의 신체가 극심한 고립에 처하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내재적 힘인 코나투스는 무력한 수동성(Passivity)의 극치로 내몰립니다. 신체는 더 이상 외부와 긍정적인 변용을 주고받지 못하고, 오직 결핍과 공포, 고립감이라는 슬픈 정동의 파도에 온전히 압도당합니다. 따라서 고독사는 개인이 생명력을 잃은 사건이라기보다,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특정 신체를 외딴곳에 방치하여 마땅히 순환해야 할 연대와 공통 개념(Notiones Communes)의 연결망을 끊어버린 생태적 괴사에 가깝습니다.
유영만 (사회자):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더욱 먹먹해집니다. 프랭크 교수님은 고독사를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 명의 청자도 만나지 못한 서사의 압살로 짚어주셨고, 스피노자 선생님은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생명력을 북돋아야 할 코나투스가 사회적 고립 속에서 완전히 질식당한 참사로 정의해 주셨습니다. 결국 고독사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고 연결을 포기한 우리 사회의 관계 생태계가 빚어낸 참혹한 거울인 셈입니다.
유영만: 접속이 차단된 고립, 환대가 거세된 사회적 파산이라는 분석에 전율이 입니다.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 주체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욕망, 즉 네 번째 화두인 '안락사와 조력사(Euthanasia and Assisted Dying)'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시겠습니까? 존엄한 자기결정권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기만일까요?
장 폴 사르트르: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진 존재입니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의 방식까지도 스스로 선택해야 마땅합니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게 타자의 손에 내던져지느니, 죽음의 순간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조력사는 불합리한 세계에 맞서는 인간의 마지막 실존적 자유의 투쟁일 수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스스로 규정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마지막 결단조차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실존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으로 마감하겠다는 판단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피노자: 저는 사르트르의 의견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욕망은 결코 인간의 본성, 즉 코나투스로부터 나올 수 없습니다. 어떤 존재도 자기 자신의 본질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살이나 조력사에 대한 충동은 자유의 발현이 아니라, 감당하기 힘든 외부의 거대한 고통과 수동적 정동(Sloth, 비탄)에 온전히 압도당해 내면의 역량이 바닥났을 때 일어나는 외부적 강요의 결과일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고통에 굴복해 생을 끊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인식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 존재 역량을 최대한 긍정하는 데 있습니다. 역량으로 능력이 증대될 때, 인간의 코나투스는 폭등합니다.
아서 프랭크: 사르트르 선생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은 아픈 몸의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일 수 있습니다. 환자가 안락사를 원한다고 말할 때, 그 목소리는 순수한 자율적 이성의 산물입니까? “내가 가족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죄책감, 통증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의료 환경에 대한 절망이 만든 목소리는 아닙니까? 환자의 몸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혼돈(Chaos)의 서사 속에 있습니다. 취약한 몸의 절규를 성급하게 합리적 자기결정으로 환원하여 죽음의 절벽으로 떠밀어서야 되겠습니까?
자크 데리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와 의미의 구조를 해체해야 합니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말에서 존엄(Dignity)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의미의 차이가 발생, 즉 차연(Différance, 데페랑스)됩니다. 과연 무엇이 존엄입니까? 고통 없는 빠른 소멸이 존엄입니까, 아니면 끝까지 취약함을 견뎌내는 것이 존엄입니까? 법률이나 제도가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죽음의 자격을 단정하려 할 때, 그것은 존엄의 의미를 폭력적으로 봉합하는 것입니다. 안락사는 명쾌한 해결책이 아니라, 결코 결정할 수 없는 아포리아(Aporia)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사용하는 안락사와 조력사도 누가 만든 개념어인지, 그 의미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미끄러지면 이전과 다른 의미를 재생산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야노 마키코: 데리다 선생님의 지적처럼, 삶의 의미는 결코 하나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불치병 선고를 받았을 때 저 역시 절망했지만, 그 취약한 몸 상태에서도 새로운 인연과 우연한 대화들이 피어났습니다. 조력사를 완벽한 통제로 여기는 것은 삶에 불쑥 찾아오는 우연한 기쁨과 만남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은 끔찍하지만,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우연의 틈새가 존재합니다. 우연은 지금 여기서 생산할 수 없는 마주침의 산물입니다. 미지의 죽음과 우발적으로 마주칠 때 죽기 전에 생각했던 여타의 관념도 하나의 명백한 신념으로 뒤바뀔지 모르는 일입니다.
푸코: 고대 로마인들에게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때로 지혜자의 가장 고귀한 권리이자 자유의 완성이었습니다. 삶이 더 이상 품위를 유지할 수 없을 때 문을 열고 나가는 행위는 예속에 저항하는 마지막 방편이었죠. 이런 측면에서 죽음의 시기와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하려는 삶의 미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바로 여기서 저는 깊은 의구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안락사와 조력사가 법제화되고 제도화되는 순간, 그것은 또다시 의학적 평가와 법적 승인이라는 권력 메커니즘 안으로 포섭됩니다. “당신의 삶은 더 이상 지속할 가치가 없는가?”를 판정하는 의사의 진단서, 보험과 복지 비용을 계산하는 국가의 계산법… 죽음마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효용성의 언어로 재단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제도로서 공인된 안락사가 자칫 쓸모없어진 자들에게 은밀히 가해지는 죽음의 압박으로 변질될 위험, 저는 이 양날의 칼날 위에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영만: 통제하려는 이성의 오만과 취약한 몸의 진실이 날카롭게 부딪히는군요. 이제 마지막 화두로 향해 봅시다. 생명이 떠나고 남은 빈자리를 매만지는 의례, 바로 '장례식(Funeral)'입니다. 장례식은 떠난 자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남겨진 자들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까? 과연 “빈소는 일상과 구별된 채, 산 자와 죽은 자를 마지막으로 연결해주는 기억의 성소”(209쪽)로 자리매김하고 있을까요?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장례식은 남겨진 이들이 비로소 애도(Grieving)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치료적 공간입니다. 시신을 마주하고 이별을 고하는 의식을 거치지 않으면 인간은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 속에 갇힙니다. 눈물을 흘리고, 고인의 삶을 회고하며 슬픔을 밖으로 쏟아내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비로소 남겨진 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으로 복귀할 준비를 마칩니다. 그래서 장례는 “고인이 머물 ‘기억의 공간’이라는 마지막 거처를 짓는 숭고한 제의”(211쪽)가 되는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질 들뢰즈: 장례식은 고정된 자아를 추모하는 자리가 아니라, 고인이 맺었던 생명의 에너지가 남겨진 자들의 신체 속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는 '되기(Devenir)'의 시공간입니다. 죽음은 무(Nothing)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분자적 흩어짐입니다. 고인의 언어, 체온, 기억의 파편들이 산 자들의 신경망과 접속하여 새로운 생명적 변용을 일으키는 장(場), 그것이 장례식의 진정한 잠재력입니다. 그 장(場)안에서 또 다른 장과의 다중 접속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변신을 거듭할 것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장례식에 참석하는 산 자들은 관 속의 시신을 보며 자신의 가장 확실한 미래, 즉 자신 역시 언젠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엄습하듯 자각합니다. 타인의 장례식은 나태한 일상에 빠져 있던 세인들에게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불안(Angst)의 거울입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나의 본래적 실존이 각성되는 것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쓰는 존재, 즉 “내 삶에 마음을 쓰고 주의를 기울이며 보살피는 모든 방식이 인간이 이 땅에서 존재하는 실존의 방식”(247-248쪽)과 마지막 작별의 시간이 바로 존재 장례식입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관 속에 누운 육체는 지각을 멈추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물질로서 존재합니다. 남겨진 이들이 차가워진 고인의 손을 어루만지고 이마에 입을 맞출 때 일어나는 ‘상호 신체성(Intersubjectivité corporelle)’의 마지막 교감—장례식은 추상적인 관념의 행사가 아니라 살(Chair)과 살이 나누는 마지막 작별 인사입니다. 그 감각적 흔적은 남겨진 자들의 근육과 기억 속에 오래도록 각인되어 지각의 연속성을 이어갑니다. 결국 산자의 기억은 살과 살이 맞닿은 감각적 접촉이 남긴 지각의 현상학적 산물입니다.
푸코: (부드럽지만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장례식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떠난 자의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이 사회적 규범을 재생산하는 장치입니다. 자본주의적 상조 시스템과 규격화된 애도 절차는 고인이 평생 일구어 온 고유한 주체성을 상품논리로 순식간에 지워버리고, 평범하고 순종적인 사회적 신분으로 환원시키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배려의 관점에서 본다면, 장례식은 ‘기억의 테크놀로지’여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권력과 규율에 저항하며 자기 삶을 직조해 왔는지, 그가 남긴 궤적을 나누는 자리여야 하죠. 획일적인 종교적·국가적 의례의 틀을 깨고, 한 인간이 시도했던 ‘다르게 살기(se conduire autrement)’의 실천을 증언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해 낸 마지막 형태입니다. 장례식 역시 거대한 상업적 규범에 저항하여, 고인이 스스로에게 바쳤던 그 배려의 깊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작은 해방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영만: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열띤 논쟁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 삶의 반대편에 있는 적이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가장 솔직한 거울임을 확인했습니다.
죽음은 기계적 생명 연장(연명)의 숫자에 있지 않고, 서사를 품은 몸의 존엄한 완성(임종)에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배치가 끊어진 벼랑 끝의 쓸쓸한 소멸(고독사)을 막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한 닻이 되어주어야 하며, 안락사와 조력사를 둘러싼 논쟁 이전에 고통을 함께 견뎌내는 환대의 생태계를 먼저 구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례식은 부재를 확인하는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떠난 자의 정동과 흔적을 남은 자들의 살과 호흡 속에 잇대어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순환이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순간, 장기기증과 이식으로 연결되는 이 순간”(101쪽), 자살자가 다른 이를 살리는 아이러니 사이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와 관계를 엄숙히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 과연 그 사이에는 어떤 깊은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요? “삶과 죽음 사이(between)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만 같은 강”(104쪽)이 있다고 하지만 건너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강을 건너본 사람에게 물을 수 없는 아이러니가 산자의 삶을 지배합니다.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귀머거리가 되고 갑자기 불편하게 가까워지면 욕지거리가 나오듯, “사이가 너무 좁아 살이 부대끼면 상처가 나고, 지나치게 멀면 고립이라는 심연이 생긴다. ‘촘촘한 행정’이 개개인의 ‘느슨한 연결’과 만날 때 비로소 생명력이 생긴다. 오가며 건네는 별것 가인 참견과 옅은 안부는, 절망과 고립에 빠진 이웃이 기운을 내 따듯한 밥을 짓도록 하것이다”(258쪽). 오늘도 ‘병원 응급실과 장례식장 사이’에서 “누군가는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삶을 연장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병실에 있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장례식장으로 향”(226쪽)는 사이에서 또 하루의 깊은 고단함을 뒤로 한 채 노을을 맞이합니다.
연명이 기계의 유지가 아닌 지각과 서사의 회복이어야 하듯, 임종은 고립된 종말이 아니라 우연 속에서 건네는 마지막 대화여야 합니다. 고독사가 고발하는 환대의 부재를 부수고 새로운 접속의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 안락사의 결정 불가능성 앞에서 쉽게 답을 내리기보다 타자의 고통을 끝까지 껴안는 것, 그리고 장례식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새로운 살의 기억으로 얽히는 것. 결국 죽음을 응시하는 일은 “오늘 나는 이 몸으로 타인과 어떻게 뜨겁게 접속하고 환대하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가장 치열한 삶의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차가워진 커피잔 위로 창밖의 낙엽들이 다시 바람을 타고 날아오릅니다. 우리의 토론은 여기서 멈추지만, 삶을 긍정하는 여러분의 실존적 발걸음은 저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차가운 가을바람 속에서도 여러분의 언어가 남긴 체온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오늘 밤, 우리 각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텃밭을 다시 한 번 깊이 갈아엎게 될 것 같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일은 곧, 오늘의 삶을 바라보고 질문하는 것"(6쪽)이고, "죽음 낯설게 보기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모험"(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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