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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 송인재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중국과 프랑스의 두 학자가 2011년 한 회의에서 만난 이후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가 주고받은 메일 서신을 엮은 책이다. 서신은 6번(12편) 둘 사이를 오간다. 서로에 대한 탐색으로 시작되는 첫 편지부터, 세 번째 서신부터 토론 상대에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로 대화가 깊어지다 아쉬운 헤어짐으로 마무리된다. 헤어짐이 여운과 아쉬움을 남길 수 있는 건 축복일 터이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와 내용은 다양하지만, 대략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 상실의 시대, 무엇을?
우리가 상실한 것은 무엇일까. 자오팅양은 ‘혁명’이라고 운을 뗀다. “혁명적 파괴는 반드시 혁명적 건설로 이어지지 않”으며 혁명의 격정이 지나간 뒤 “비천한 인성이 다시 모든 것을 재빠르게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며(23)” 늘 혁명을 후퇴시켰다고 말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어린 시절 구경하기만 한 자오팅양은 혁명에 대해 비관적이다. 이에 프랑스 68혁명 당시 다른 나라(쿠바)의 혁명에 참여한 전력을 가진 레지 드브레는 “혁명이 인성을 바꿀 수 없다는 지적에만 동의”하며, 오히려 “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쁘고 안심할 일(52)”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혁명의 환상은 ‘꿈’도 아니고 ‘유물’이며 ‘무서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용기를 북돋는 유토피아와 의욕을 띤 신념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그 자리에서 썩고, 극도로 무료하게 바뀌”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나름 현실주의자임을 자처하지만 혁명에 대해서는 비관과 희망으로 나뉘는 지점이 흥미롭다. 두 사람의 내력만큼이나 프랑스와 중국이라는 현실 정치의 차이도 있지 않을까. 혁명을 살아낸 사람과 혁명을 문자로 배운 사람의 차이일까. 학문적 지향의 차이일까. 아니면 인간에 대한 신뢰의 차이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그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해주었다.
2. 인간본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견
자오팅양이 혁명에 대해 비관적인 것은 그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거나 이상적이라는 양면성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너무나 원하지만 완전한 상태로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냉정한 현실감각 같은. 혁명을 대체한 키워드가 민주주의라는 레지 드브레의 주장에는 동의하면서도 그는 이마저 회의적이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너무 높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민주주의가 공공 선택을 이루는 기술적 수단의 하나일 뿐이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종종 잊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기술을 사용하면 좋은 공공 선택을 낳을 수도, 나쁜 공공 선택을 낳을 수도 있죠. 민주주의는 어떤 이익이나 가치관의 인질도 될 수 있습니다(79).” 이에 대해 레지 드브레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만 동의한다. 그는 다시 희망적이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실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야만을 막을 수 있어요.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의 안녕을 이루고, 정권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는 문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95).” 레지 드브레는 자오팅양에게 “통일의 결여가 유감”이고 자신에게는 “과분한 통일, 균일, 모호함이 유감”이라고 응수한다. 아울러 “한 사람 한 사람을 완벽한 인간으로 보는 인류 개념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이 아니라 이상적 기준(87)”이라고 덧붙인다. 나 역시 자오팅양에게 그 자신의 말을 돌려주고 싶다, “이상은 실현하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데 쓰(24)”일 뿐이라고. 생물학적으로 20여년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대화(書簡)는 어떤 대목에선 노학자(중견학자)의 입장에서 읽게 되고, 어떤 때는 노학자(중견학자)를 반박하면서 음미하게 된다. 그 사이 그들의 대화는 우정(書信)으로 발전한다.
3. 파키오facio와 관계이성, 그리고 우정
자오팅양은 ‘파키오’에 근간한 ‘사실의 철학’을 말한다. “논증의 기본 원칙이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facio, ergo sum)’임을 말하려 했습니다. 분명히 파키오는 유물론도 관념론도 아닙니다. 동시에 유물론이면서 관념론이라고도 할 수 있죠. 저는 그것을 ‘사물의 철학’이 아닌 ‘사실의 철학’이라고 부릅니다(104).” 그는 유물론과 관념론을 뛰어넘어 인류가 만든 역사에 초점을 두고 근대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레지 드브레는 ‘보편애의 정치화’가 다양성을 해치고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 우려에 대해 자오팅양은 ‘관계이성’과 ‘복수의 진리’ 개념을 통해 보편에의 재정의가 가능함을 역설한다. “관계 보편주의는 대개 유효한 관계만을 요구하기에 문화의 다원화에는 간섭하지 않아요. 사실 믿을 만한 상호관계가 있어야 다원적 문화와 언어에 대한 보편적 존중이 보장될 수 있죠. 저 역시 선생님처럼 다원적 문화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합니다(112).”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반드시 실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오팅양의 말처럼 우리는 행동함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만남과 대화만큼 실천적인 행동이 있을까. 자오팅양과 레지 드브레가 보여주는 만남과 대화는 그 자체로 실천적 행위이다. 둘 사이에는 관계이성과 복수의 진리가 교류한다. “정의를 찾는 시간에 우리는 동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찾을 때 친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선생님은 제 친구입니다(136).”
4. 상실의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 사람은 지구화시대의 궁극적이자 강력한 권력으로 ‘금융자본’과 ‘대중매체’를 지목한다. 지식인의 ‘브랜드화’는 피할 수 없고, 시민은 ‘기꺼이’ 고객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억압은 있지만 저항은 없는, 또는 저항할 수 없도록 하는 불가사의한 일을 해내고 이전의 모든 권력을 크게 앞서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무한시장은 유일하게 인간에 대한 지배, 억압, 통치를 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방식으로 바꾸고, 저항의 가능성을 모조리 없애버립니다(232).” 이 무소불위의 세력에게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레지 드브레는 “전력을 다해서 공인된 인물이 되어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을 듣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식인의 역할론이다. 지식인의 외침은 다른 사람에게 들려야 하고 어떤 네트워크라도 밀고 들어가 ‘광장의 집시’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미디어크라시(mediocracy)’이다. 한편 자오팅양은 민주주의가 데모크라시에서 ‘퍼블리크라시(publicracy)’로 변형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새로운 권력에서 기인한 인민의지의 집합인 ‘지배적인 전체의지’가 사회를 이끌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미디어크라시와 퍼블리크라시 개념/주장은 좀 미끄러진다. ‘정치적 정확성’과 모든 것을 회의하고 비판하는 자오팅양과 사상적 정교함과 세밀함을 지워버리고 잡음을 만들어내는 ‘교차모방’을 주장하는 레지 드브레가 서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미끄러지고 만나고 미끄러지고 이어지는 것에 길이 있을까. “살아가려면 불합리할지라도 희망이 반드시 필요한 법(227)”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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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책의 페이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