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바람이 가슴을 스쳐 먼 곳으로 사라집니다. 그 먼 곳 어딘가에 누군가가 몸을 불살랐던 청춘의 한때가 고스란히 남아 있겠지요? 그저 80년대의 끝자락에 아주 조금 발을 담갔던 기억만으로도 가슴이 이렇듯 먹먹한데 혁명에 일상을 빼앗겨 버린 그들은 어떠할지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오래된 정원>은 나직한 목소리로 그들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렇다고 무슨 새삼스러이 영웅적인 그들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을 너무 사랑했던 죄로 평범하게 누릴 수 있었던 감정들, 일상들을 고스란히 빼앗겨버린 그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는데 오히려 아주 사소한 일상조차 빼앗겨 버리다니 너무 아이러니 하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후회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 전부를 저당잡히며 한 일이었으니까요. 그 지울 수 없는 시간들이 이 소설에 차곡차곡 담겨 있습니다.좌익사범으로 장기수가 되어버린 오선생을 사랑했던 윤희는 그가 다시 세상에 나왔을때 그녀의 흔적들로 노트 몇권을 남겼습니다. 그 속에는 오선생이 알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딸아이 '은결'이가 있습니다. 아빠를 빼앗기고, 나름대로 시간을 견뎌야 했던 엄마로 인해 참다운 엄마의 모성조차 빼앗겨 버린 은결이. 전 사실 부모의 본성조차 어쩌지 못하게 차단당했다는 부분이 가장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것만큼 사실적인 상처가 어디에 있을까요? 채워지지 못한 긴 세월을 어찌하면 좋을지요? 그 잔혹했던 시대는 희미할 지는 몰라도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은결이가 있는 한 오선생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듯이, 이 땅에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발자취는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희망은 존재하는 걸까요? 비록 세상에 현기증 나게 돌아간다고 해도 어딘가에선 아직 들꽃이 피고, 작은 사랑들이 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갈뫼에 남아 있는 실로 오래된 정원에 오선생은 은결이와 같이 작은 일년생 화초들을 심게 되겠지요. 그곳에 저도 한번 놀러가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 날도 좋고 맑은 날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