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승자의 음모 - 위험천만한 한국경제 이야기
조준현 지음 / 카르페디엠 / 2011년 5월
평점 :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전체 목차에 나와 있는 8가지의 명제 중에 하나라도 동의한다면, 이미 당신은 승자의 음모에 넘어 갔다는 것.
제도권 교육만 착실히 받고, 별다른 사회적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채, 그저 열심히 주어진 일만 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적어도 반 이상은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이겠지만, 스스로 '진보'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진보논객들의 글을 한두번이라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명제들이기도 하다.
1. 한국경제는 수출로 먹고 살아야 한다.
2. 박정희 시대 개발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3. 대기업 재벌이 없으면 성장은 불가능하다.
4. 노동시간 단축은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5. 토건 사업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다.
6. 부동산이 아니면 부자가 될 수 없다.
7. 개인의 행복과 불행은 성적순이다.
8. 북한 체제의 붕괴에 대비해야 한다.
1번과 2번의 명제에서 저자는 수출주도형 정책 덕에 우리 나라가 발전해왔고, 박정희 시대의 계획/국가개입 경제 정책 하에서 우리가 고도의 성장을 달성한 건 맞으나,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이젠 내수가 강해져야 하고, 국가가 시시콜콜 나서서 주도하는 시장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저자는 약간의 흥분을 하며 장하준과 신장섭을 지나치게 많이 언급하며 그들을 비판한다. 물론, 요즘과 같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시대에서 아무리 저명한 경제학자라 할 지라도 그 사람의 이론이 100%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는 거 아닐까? 이론이란 것이 우리의 현실을 100% 설명해준다면, 리스크란 것은 없을 것이고 경제의 침체 또한 있을 필요도 없고, 우리는 부동산이나 주식 때문에 울 일도 없을 테니… 어떤 경제학자의 이론이란 것은 경제의 어떤 부분을 설명할 때 타당하거나, 혹은 그 이론의 이런 부분은 의미가 있다거나 이렇게 취사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래야만 하는 거 아닐까? 나는 신장섭의 책은 읽어보지도 못했고, 장하준의 책도 두어 권밖에 읽지 못했으나, 저자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비판할 정도로 잘못된 이론을 얘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들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견해가 옳음을 입증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견해가 옳은 근거를 여러 수치들이나 현상들을 더 많이 설명함으로써 주장해야 할 것 같다. 지당하게 옳은 견해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저명한 학자에 반대함으로써 자신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서도, 난 저자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충분한 근거를 보여주지 못한 점은 여전히 아쉽다. 노동시간 단축이 생산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근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단순하게 미국이나 네덜란드의 예를 들며, 거기는 우리보다 훨씬 적게 일하나 생산성이 훨씬 높다는 결과적인 사실만 언급할 게 아니라 뭔가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수치를 가지고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내가 누군가와 논쟁을 할 때 무기가 되어줄 수 있는, 자본가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 그냥, 적게 일하고 많이 쉬니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만 반복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부동산 문제의 경우도 지극히 옳은 얘기들이다. 그런데 중간에 저자는 근래의 전세값 폭등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이유를 얘기하다가 자신은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더 이상 집값이 오르지 않아 추가적인 소득을 노릴 수가 없기 때문에 전세값을 올려서라도 소득을 보전하려고 하기 때문도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서술한다. 일면 타당성이 있는 얘기고 충분히 그럴 듯 하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고, 더 이상 제시하는 근거가 없다. 그냥 저자의 느낌이라고 툭 던지고 끝낼 거라면 말은 왜 꺼냈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경제학자의 생각이니 그냥 믿어야 하나?
지극히 옳은 얘기를 속 시원한 어투로 우리 대신 내뱉어 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고, 그런 와중에서도 간간히 미처 생각지 못했던 우리의 고정관념 아닌 고정관념을 짚어주니 다행이지만, 여전히 등을 긁다 만 느낌이다. 2% 부족한 느낌이랄까. 경제학자가 어렵지 않게 우리들의 평범한 용어로 설명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렇다고 그 설명의 깊이까지 얕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비판을 조목조목 맥락의 처음부터 끝까지 제시하며 반증하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나의 길을 주장하면 되는 것일 뿐, 누군가를 반대함으로써 나를 드러내는 게 조금은 유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