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 거꾸로 된 풍경으로 열려 있을 수도 있고 풍경이 문 위에 채색될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뭔가를 해보자. 문 옆의 벽에 구멍을 만들면 또 다른 문이 될 수도 있다.이 두 개의 오브제를 하나로 합한다면 이 결합은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구멍은 문안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이 구멍을 통하여 우리는 어둠을 볼 수 있다. 만약 어둠 속에 감추어져 안 보이는 것을 밝게 비춘다면 이 이미지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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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캔버스에 의해 가려진 풍경의 부분을 정확하게 묘사한 그림을 방 안 창문 앞에두었다. 그래서 그림 안에서 표현된 나무는 시야를 가려서 방 밖의 나무를 감추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무는 그림 안의 방의 내부와 실제 풍경의 외부 모두에서 감상자의마음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세상이 단지 정신적 표현으로서 우리 내부에서 경험되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을 외부의 것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을 과거에 놓는다. 그리하여시간과 공간은 일상의 경험이 고려하는 단 하나의 그 정제되지 않은 의미를 상실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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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 아서 C. 클라크 탄생 100주년 기념판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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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무모할 정도로 어리석으면서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 전체이면서 동시에 부분인 존재.

인류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씁쓸한 생각이지만 여러분은 그 사실과 직면해야 하오. 여러분은 언젠가 행성들을 소유할 수도 있소. 그러나 별들은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오

케렐런 관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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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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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행위는 일종의 “선택”이다. 선택은 일종의 “의지”의 반영이다. 그렇기 보는 것은 또한 보여지는 것은 모두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의지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존 버거에게 이미지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순간을 포착하고 분리해낸 것이며 이러한 포착과 분리, 그리고 다른 순간과 장소와의 연결은 이미 인위적인 재창조와 재생산의 과정이다. 따라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이미지가 보여지는 것에도 권력이 작동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여성과 남성, 원본과 복제, 전문가와 대중 등이 그러하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미의 선택과 재창조, 재생산은 양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권력(자본)과의 유착관계도 훨씬 강력해졌으며 그 방법도 훨씬 교묘해졌다. 이미지(특히 광고)를 통해 이미지는 원본의 희소성을 차용해 “고급짐”을 흉내내어 결핍을 파고드는 효과는 현대 사회에 들어서 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를 위해서 존 버거는 주체적으로 보는 것을 선택하고 이를 해석하고 권력에 의해 신비화된 가치에 현혹되지 말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근본적이 질문은 이 지점에서 다시 제기 된다. 어떻게?

그러나, 말에 선행하며,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본다‘는행위는,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따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보는 행위가 이런 식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경우는, 보는 행위 가운데 단지 망막에 관련된 아주 조그만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 생각했을 때뿐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선택의 결과,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시야의 범위안으로 끌어들인다. 11p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의 사물의 어떤 모습 또는 모습들을 본래의 장소 및 시간에서 따로 분리해내 일정 기간 또는 몇 세기 후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사진을 기계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그 사진이 사진을 찍은 사람의 무한히 많은 시각들 가운서 특별히 선택된 것이라는 사실 을 의식하게 된다. p12

애초에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점차 사람들은 재현한 사물이 사라 진 후에도 이미지는 그대로 남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하나의 이미지는 한때 무언가를 누군가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이와 함께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는지도 보여준다. 나중에는 이미지 제작자의 특수한 시각 역시 기록의 일부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 이미지는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이는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점차 커 감에 따라 개성에 대한 자각도 점점 커지는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p13

만약 과거의 미술을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역사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방해해서 그것을 볼 수없게 된다면 우리에게 속하는 역사를 박탈당하는 셈이 된다. 거기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결국 과거의 미술은, 특권을 지닌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화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려고 해 봤자 쓸데없는 일이다. 그래서 과거를 신비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4-15

그 결과 복제는, 그 원작의 이미지가 어떠한 것인지 보여 줌과 동시 에 다른 이미지에 대한 참고사항이 된다. 한 이미지의 의미는 바로 그에, 또는 바로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지가 간직한 권위는 그것이 등장하는 전체에 배분된다. p35

미술작품은 복제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 미술서적, 잡지, 영화, 또는 거실의 금빛 액자 속에서 - 여전히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복제는 계속 사용된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 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소위 국가의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은 현재의 사회시스템과 그것이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해서 미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복제 수단은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복제로 인해서 존재가능하게 된 모든 것을 위장하고 나아가 부정하는데 사용된다.p36-36

- 시각예술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보호영역 안에서 존재해 왔다. 본래그 영역은 신비스럽고 성스러웠다. 하지만 그 영역은 물질적이기도 했 으 어떤 장소, 동굴이나 건물 그 안에, 혹은 그곳을 위해 그려졌다. 최초에는 제의(祭儀)의 경험이었던 예술적 경험은 삶의 나머지부분과는 분리된, 정확하게는 그 나머지 부분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행해진 것이었다. 나중에 예술의 보호영역은 사회적인 영역이 된다.
지배계급의 문화 속에 편입되는 사이 물질적으로는 궁전이나 저택 안에 고립되어 따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 내내 예술의 권위는그 보호영역이 가지는 특정한 권위와 분리되지 못했다.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혹은 새로운 기술로 복제한 예술 이미지를 -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떼어낸 일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 이미지가 순간적이며, 도처에존재하고, 실체가 없으며,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무가치하며,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이제 예술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예술 이미지는 삶의 주류에 합류했는데, 이제 예술 자체의힘만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복제 수단은, 이제이들도 그런 복제 덕분에 한때 문화적 혜택을 받은 소수들만 누릴 수 있었던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여전히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선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대중은 여전히 무관심하고 회의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39-40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은 종종 전시된 작품의 숫자에 압도당해, 그들 중 겨우 몇몇 작품만 주의를 집중해서 볼 수 밖에 없는 자신등의 무능함에 놀라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미술사는 유럽의 회화 전통 속에서 탁월한 작품과 평범한 작품을 구분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천재‘ 라는 개념은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수 없다. 그 결과 혼란은 미술관의 전시 벽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흔히 수많은 삼류 작품들이 탁월한 작품 하나를 둘러싸고이는데 - 이에 대한 해명은 고사하고 무엇이 그 둘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떤 문화에서든 예술의 영역에서는 재능의 차이가 폭넓게 드러난다. 하지만 서구의 유화에서만큼 ‘걸작‘ 과 보통 수준의 작품들 사이의차이가 크게 드러나는 문화는 없다. 이 전통에서 이러한 차이는 단지기술이나 상상력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 의욕에서의 차이이기도 하다. 특히 십칠세기 이후에 점점 더 숫자가 늘어나는 보통 수준의평범한 유화 작품들은 냉소적인 태도로 제작된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작품들이 표현하는 명목상의 가치가 화가 본인에게는 별 다른의미가 없었다. 화가 본인에게는 주문받은 그림을 완성하는 일 또는그림을 파는 일이 더 중요했다. 진부한 작품은 서투름이나 무지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장의 요구가 예술 자체의 요구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문에 생긴 결과였다. 유화시대는 미술품을 거래하는 공개시장이 등장한 시기와 일치했다. 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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