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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톨의 밀알 ㅣ 세계문학의 천재들 4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톨의 밀알은 1963년 케냐의 독립을 배경으로 식민시대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 모두는 비밀과 그 비밀에 수반되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 뭄비에게 돌아오기 위해 맹세를 고백하고 수용소를 나온 기코뇨.
남편이 잡혀간 후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 뭄비.
저항군을 이끌었던 키히카의 복수를 하지 못한 R장군.
심지어 백인의 하수인이 되어 동족을 검거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정당화하던 카란자마자 결국 심연같은 죄의식과 마주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구타당하는 여성을 구하고 키히카를 숨겨주었으며 수용소에서 단식저항을 수행한 것으로 영웅시되었던 무고가 사실은 키히카를 밀고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무고는 영웅으로 추앙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결국 죄를 고백하고 처형당하는 것으로 수형과 같은 자신의 삶을 끝낸다.
재미있는 것은 응구기가 딱히 저항군의 활동을 미화하거나 영웅시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키히카는 영국 식민지하에서 흑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을 호소하지만 그는 큰 대의에 치우쳐 작은 인간들의 삶을 보고 있지 못하다. 지하조직을 위해 협조를 요청한 무고는 원래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하고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는 부모님을 여의고 숙모의 학대 속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자신이 남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남도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않길 바랐다. 그런 그에게 부족과 케냐인의 권리를 위해 자신의 기반을 송두리채 앗아갈 수도 있는 선택을 하라는 키히카에게 반감을 느끼고 그를 밀고하기로 한다.
그는 본래 고립된 하람비(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공동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R장군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 키히카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진...
그래서 자신의 신념에 함몰되어 있는 키히카는 일견 강압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테러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생명을 잃었지만 그는 대의를 위한 희생은 불행한 일이지만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한 톨의 밀알이 죽어서 더 많은 곡식이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고는 끊임없이 되뇌인다. 살고 싶다고....
응구기는 키히카를 영웅시하지도 무고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독립축제일 영웅을 바랐던 대중은 영웅이 사실은 밀고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죄의식을 품은 사람들은 심지어 그의 용기를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념이 있는 사람들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고 비밀리에 처형한다.
신념없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을까? 민족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신념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중심을 차지 않는 신념은 오히려 파괴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카란자의 선택처럼 개인을 중심으로 일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라는 말은 아니다.
카란자가 자신이 고발하고 고문하고 죽인 사람들을 자신이라고 인식하고 살지 못하다 자신이 맞아 죽을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비로소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신념이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이지. 공동체는 그 바탕 위에서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념과 일상의 삶을 함께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엄혹한 식민상황에서는....그는 이렇게 연민의 눈으로 케냐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 톨의 밀알은 답을 내리기 보다는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