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49)

 

 

 

 

최근에 나온 책으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독일의 20세기 최고비평가로 꼽히는 벤야민의 '주저'이자 미완성 수고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이다. 일찍부터 '소문'은 무성했던 책인데, '드디어' 출현한 것. 지난주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구내서점에 책이 들어온 걸 보고 잠시 놀랐는데, 한국어판은 4권으로 분권돼 나올 예정이라고(4권이 양장본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면 분권으로 나오는 반양장본은 8권이 될 것이다). 아마도 최근 몇 년간 출간된 인문학 번역서로서는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지 않을까 싶다. 하니, 의당 친절한 안내서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그런 도우미로 정평있는 책이 수잔 벅 모스의 <시각의 변증법>이고, 알다시피 이건 이미 작년에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만하면 풍성한 식탁이다.

간혹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번역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는 이들이 내 주변에도 있는데, 인문서 번역의 평균적인 '실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투정'에 불과하지 않나 싶다. 원저와 대조해서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역자가 나름의 수완을 발휘한 대목들을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내가 100여 쪽을 읽으면서 발견한 가장 두드러진 오역은 다음의 한 대목뿐이다(나머지는 사소하다). 91쪽의 맨마지막줄, "테크놀로지가 약속하는 '새' 자연에 대한 극단적 낙관 그리고 역사의 흐름에 대한 총체적 비관 - 이것이 없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결코 선사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이것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모든 단계를 특징짓는 중요한 경향이다."(강조된 부분이 오역이다) 

내용상으로도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원문은 이렇다: "Extreme optimism concerning the promise of the 'new' nature of technology, and total pessimism concerning the course of history, which without proletarian revolution would never leave the stage of prehistory - this orientation characterizes all stages of the Arcades project."(64쪽, 강조는 나의 것) 내용은 '극단적인 낙관주의'와 '총체적 비관주의'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모든 단계를 특징지어준다는 것인데(도시 혹은 아케이드에 대한 벤야민의 매혹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역자는 'which without'을 'without which'로 잘못 봄으로써 엉뚱한 오역을 범하고 말았다. 다시 옮기면, "'새로운' 성격의 테크놀로지가 약속하는 바에 대한 극단적인 낙관주의와 역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비관주의(역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없다면 내내 선사적 단계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전 단계를 특징짓는 방향성이다." 이건 물론 사소한 실수이지만, 결과는 좀 문제가 되는 오역이다. 다행스러운 건 그래도 이런 오역이 거의 드물다는 것이고, 우리의 번역 현실에서 이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현실' 말인가? 가령, 작년에 재판 5쇄까지 찍고 있는 리처드 커니의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 같은 책을 보자(나는 이 조잡한 번역서가 아직까지 유통되는 까닭을 모르겠다). 벤야민에 관한 장이 어떻게 번역되고 있는가? "보들레르는 벤야민에게 도시를 방황하는 일이 공간적 변화보다는 순간적 진보의 문제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177쪽; 내가 갖고 있는 책은 1995년 초판 5쇄이지만, 그 사이에 번역이 수정됐을 리는 만무하다) 보들레르가 벤야민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웅'인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벤야민이 보들레르에게 배운 것이 '공간적 변화'가 아닌 '순간적 진보'의 문제인가?

원문은 이렇다: "Baudelaire taught Benjamin that stray through a city was to discover how meaning is less a matter of temporal progress(chronos) than of spatial placement(topos)."(1994년, 2판, 152쪽) 그러니까 정확히 정반대, 즉 파리의 산책자 보들레르가 가르쳐준 것은 '시간적 진보(크로노스)'가 아니라 '공간적 배치(토포스)'가 갖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점은 벤야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시간의 공간화'이기 때문이다(오죽하면, 벤야민 자신이 '관상학'을 얘기하고 '정지의 변증법'까지 말하겠는가?). 여하튼, 인용문과 같은 오역문들로 아주 범벅이 돼 있는 책이 대학가에서 내내 교양 철학서로 팔려나가고 있는 현실은 개탄스럽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이런 책을 철학강의의 참고문헌으로 올려놓는 강사/교수들도 없지 않은데,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파렴치한들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애꿎은 학생들의 머리는 왜 혹사시킨단 말인가?..

  

 

 

 

성질을 부려봐야 건강에 좋지도 않으므로 다른 책 얘기로 넘어가자. 이언 해킹의 과학철학서 <표상하기와 개입하기>(한울)가 출간됐다(또 한울출판사로군. 요컨대 이 출판사가 엉터리책만 내는 건 아니다). 부제는 '자연과학철학의 입문적 주제들'이고, 말 그대로 과학철학 입문서이다. 하지만, (적어도 역자의 의견을 참고해보건대) '최고의' 입문서이다.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됐는데, 나에게 '이언 해킹'이란 이름은 <왜 언어가 철학에서 중요한가>(서광사, 1989)의 저자로 각인돼 있다. 즉, '언어철학자'로. 그런데, 웬걸, 이 양반이 어느새(!) '과학철학'의 대가가 돼 있지 않은가?

게다가 영어권 학자로는 아주 드문 일일 텐데, 현재 콜레주 드 프랑스의 '과학적 개념의 철학과 역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것!  짐작에 그 자리는 푸코의 스승이기도 했던 캉키옘(캉킬렘) 같은 이가 맡았던 자리 아닌가? 어쨌든 저자의 '포지션' 하나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책일 텐데, 이 신간은 해킹의 대표작이면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비견될 만한 저작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우선은 '두 번' 놀라면서 책을 손에 들 일이다. 읽는 건 나중에 '천천히' 읽더라도(역자의 서문 정도 읽어놓고)... 참고로, 역자는 신뢰할 만한 전공자이다. 훌륭한 저자와 역자가 패키지로 묶인 이런 류의 책을 만나는 건 행운이다...

 

 

 

 

참고로, 토마스 쿤 덕분에 '대중화'된  과학철학에 대해서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최근 목요일판 한겨레 책/지성 섹션에 연재되고 있는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을 죽 훑어보시는 게 좋겠다. 그럼 대략의 개념/구도가 잡힐 것이다. 거기서 좀더 나아가고자 하는 독자라면, 쿤이나 포퍼, 라카토스('라카토슈' '러커토시'), 파이어아벤트 등을 읽으면 되는데, 자세한 서지는 '과학철학'을 검색하거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의 역자 서문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 <현대과학철학논쟁>(아르케, 2002)이 좀 어렵지만 기본서이고, 국내 필자들의 쓴 것으론 <현대 과학철학의 문제들>(아르케, 1999)이 있다. 물론, 이렇게 두꺼운 책들만 읽어야 하는가란 푸념이 나올 수 있겠다. 요령이 없지는 않다.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이제이북스, 2002)은 '분량대비' 최고의 입문서(내가 읽은 아이콘북스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읽을 만했던 책).

사실인즉, 그 유명한 <과학혁명의 구조>도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다(요즘은 고등학교 논술주제로도 자주 등장하지만). 내가 열아홉살, 대학 1학년때 읽기에 가장 어려웠던 책 두 권이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과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였다. 해서, 두 책에 대한 나의 이해는 대부분 2차 문헌들에 근거한다. 요즘은 두 책의 요지에 대해서 30분 정도씩은 강의라도 할 수 있지만, 정작 책을 펴놓고 한 구절씩 막힘없이 읽어나가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두 책을 덮은 지 10년도 더 됐기 때문에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을 테지만). 해서, 리라이팅 시리즈(그린비)나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살림)에서 다루어짐직하다(<과학혁명의 구조>는 목록에 들어가 있는바, 책이 나오면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다).   

 

 

 

 

세번째는 역사분야의 책으로 먼저, 프랑스의 혁명가 로베스 피에르의 평전,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교양인). 저자는 장 마생이고, 책은 로베스피에르 평전이 고전이라고. 물론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로베스피에르 평전"이다. 752쪽의 분량도 어느 정도 신뢰감을 준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프랑스 혁명의 중심 인물이자 프랑스 혁명 자체와 동일시되는 인물, 로베스피에르를 통해 바스티유 함락에서 국왕 처형, 혁명의 몰락에 이르는 프랑스 혁명의 숨가쁜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했다." 요컨대, 로베스피에르란 문제적 인물을 통해서 프랑스혁명사를 읽고자 하는 것(지난주 한겨례의 서평은 밑도 끝도 없이 시작부터 '최교수' 운운하고 있었는데, 책의 머리말은 서울대 서양사학과의 최갑수 교수가 썼다). 

비단 역사를 읽을 때, 반드시 '문제적 인물'의 시선과 행적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어제가 광복절이었지만, 해방 6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여러 종의 책 가운데 <8.15의 기억>(한길사)을 꼽아두고 싶다. "책은 KBS 광복 60주년 프로젝트팀이 '8.15의 기억 - 우리는 8.15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제작하면서 채록한 구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마침 나는 그 프로그램을 TV에서 봤다. 인상적이었다(특히 일본군 포로들과 함께 시베리아에까지 끌려가 3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 분들도 있었다). 형식상으론 일종의 '구술사'인데, 이러한 살아있는 증언들은 (진리뿐만 아니라) 역사도 '구체적'이라는 걸 새삼 말해준다.

 

 

 

 

네번째 책은 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그린비). 저자에 대해서 나는 아는바 없지만, '언어'나 '화폐' '커뮤니케이션' 등을 키워드로 삼고 있는 걸로 봐서 가라타니 고진의 자장권 안에 있는 학자인 듯싶고, 그런 경우 대략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제목의 '선정성'에 기대를 건 독자라면 실망할 테지만. 역자는 고진의 <윤리11>, <일본정신의 기원> 등을 번역한 송태욱씨이다. 책은 출판사의 안목을 따른 것인지 역자의 안목을 따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믿을 만한 역자라는 게 일단은 안심. 박해일, 강혜정 주연의 영화 <연애의 목적>이 지난주에 비디오로 출시됐던데, 조만간 '연애의 목적'을 주시하면서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해 숙고해봐야겠다...

 

 

 

 

 

마지막 책은 아옌데와 함께. 칠레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신작 <세피아빛 초상>(민음사)이 번역돼 나왔다. "<영혼의 집>, <운명의 딸>을 잇는 3부작의 마지막 편으로, 여섯 세대에 걸친 여성들의 역사를 완성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칠레의 대표적인 작가로 군림하고 있지만, 아옌데의 작품을 나는 아직 읽은바 없고, 다만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영화 <영혼의 집>(1993)을 10년도 더 전에 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신작을 꼽은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책의 역자가 친구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그(녀)가 아옌데의 소설을 한 권 번역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간혹 만날 때마다 일의 진행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 알고 보니 이 책이었던 것이다(생각보다는 두껍군!). 개학을 하게 되면, 점심 한끼 사주고 책을 건네받아야겠다(이렇게 홍보까지 하고 있으니 점심도 얻어먹을까?). 그나저나 책이 좀 팔려야 나중에 한 턱 내라고 할 텐데...

05.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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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리센코, 황우석 그리고 국가

'리센코'란 이름을 검색하면 한달쯤 전 칼럼들이 몇 개 뜬다. 지난 12월 중순, 그러니까 황우석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치달을 무렵에 씌어진 칼럼들이다.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T. D. Lysenko; 1898-1976)는 스탈린시대 러시아의 농생물학자로서 멘델의 유전학설을 비판하고 소위 '리센코학설'(리센코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이 유전자라는 입자적인 것만으로 유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환경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 생물체 내의 물질대사형을 변화시키고 이것이 유전성을 변경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이해하기론 용불용설 같은 것이어서 환경조건에 따른 개체 변이가 유전된다는 식인 듯하다(이른바 획득형질 유전론). 문제는 그의 이 유사-과학이 멘델의 유전학 같은 '부르주아 과학'에 대항하여 스탈린시대에 '프롤레타리아 과학'으로 공인받았다는 것.

물론 이후에 그의 '정치적' 과학은 농업생산 분야에서의 부진으로 인하여 신뢰를 상실하게 되며 스탈린 사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모스크바 유전학연구소장 직에서 완전히 사임하게 되는 것은 흐루시초프시대인 1965년). 하지만, 그의 유사-과학은 유전학 분야에서 러시아가 서구에 최소한 10여 년 이상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게 20세기 과학사의 최대 스캔들의 하나인 소위 '리센코 어페어'이다.  

개인적으론 대학원 시절 언젠가 이를 풍자한 러시아 현대소설을 읽을 일이 있어서 리센코주의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기도 해서(비록 거기에 대해 글을 쓰는 기획은 엎어졌었지만) '리센코'란 이름이 친숙한데, 그때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사, 1996)의 저자이자 얼마전 <인간복제논쟁>(지식의풍경, 2005)이 번역/소개된 도미니크 르쿠르의 <리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였다(이 책은 얼마전에 지인의 도움으로 영역본을 구했다). <인간복제논쟁>의 부제는 '인간 복제 이후의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이며 원제는 "Humain, Posthumain"(2003), 즉 '인간과 포스트인간'이다. 이미 '인간복제'의 기술적 가능성과 문제점에 관한 책들은 여러 권 출간돼 있으므로 이 책과 더불어 '테마 독서'를 해봄직하다.

 

 

 

 

흥미로운 건 르쿠르의 책 부록으로 '유나바머'론이 포함돼 있다는 것. 유나바머? 시사상식인데, 본명이 시어도르 카진스키인 그는 하버드대 출신의 수학 천재로 버클리대 교수를 지낸 인물이다. 극단적인 문명혐오주의자로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지난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6회에 걸쳐서 과학기술 관련인사들에게 우편물 폭탄테러를 감행해왔다. 초기에 주로 대학과 항공사를 공격해 대학(University), 항공사(Airline)와 폭파범(Boomber)의 Un+A+Bomber 를 조합, '유나바머'로 불렸다. 그는 95년 테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유력지에 과학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과학기술문명비판논문(=유나바머 선언문) 게재를 요구함에 따라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3만5000자의 논문이 실렸다. 동생의 제보에 따라 96년 4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복역중이다. 이른바 '유나바머 어페어'이다. 르쿠르가 인간복제문제와 유나바머 문제를 어떻게 접속시키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하에서 옮겨오는 칼럼들은 그런 궁금중과는 무관하며 (아마도 21세기 전반기 과학계 최대 스캔들로 기록될) '황우석 어페어'에 촉발되어 '리센코 어페어'를 상기시켜주고 있는 글들이다. 첫번째 칼럼은 한겨레신문(2005. 12. 13)에 실렸던 김환석 교수의 칼럼 "'영웅만들기'의 함정;이고, 두번째 칼럼은 동아일보(2005. 12. 12)에 실렸던 소설가 복거일의 칼럼 '과학윤리기준 과학자에 맡겨야'이다(복거일은 대표적인 보수주의 논객이다).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

섀튼의 결별선언 이후 한 달 동안 전국을 폭풍처럼 혼란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던 황우석 스캔들은 이제 서울대의 조사위원회로 공이 넘어갔다. 따지고 보면 한 과학자의 연구논문에 대한 논란일 뿐인데, 이렇게 ‘핵폭풍’에 비유될 만큼 국가적 재앙의 위기에 몰려 정부와 온 국민이 하루하루 불안과 조바심에 떨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게 정상적인 나라에서 일어날 법한 일인가?  

정상적인 나라라면 과학계 내부의 자정 메커니즘으로 쉽게 처리되었을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는 이 지경으로 사회적인 대혼란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황우석 교수가 단지 한 과학자가 아니라 이른바 ‘국민적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엠에프(IMF) 사태 이후 깊은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계층과 지역과 성별과 세대 그리고 지지정당의 차이를 뛰어넘어 미래 과학한국의 비전을 또렷이 보여주며 나라의 발전을 이끌고 갈 어떤 메시아와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그는 가난한 농촌 출신이지만 복제와 줄기세포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업적을 나타낸 과학영웅일 뿐 아니라,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그의 발언이 표상하듯 진한 애국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더구나 여기에 전세계 난치병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라는 인류애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위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황우석 교수가 이렇게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업적과 자질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부와 언론이 손을 맞잡고 이끌어 온 ‘황우석 영웅 만들기’의 결과 때문이다. 그는 원래 생명공학에서는 주변적 분야에 속하는 동물복제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초기에 그는 복제 소 ‘영롱이’의 성공으로 갑자기 생명공학의 스타로 떠올랐고, 심지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복제한 백두산 호랑이 새끼를 대통령이 북쪽에 선물할 계획(결국 실패하였지만)에 관여할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는 박기영 보좌관과 정동영 장관 등 청와대와 정부 및 여당의 전폭적 지원 아래 배아줄기세포 분야로 그의 영역을 확장하여 마침내 한국의 생명공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세계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과학자를 국민영웅으로 만들려고 국가가 기획하고 개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행한 결과만을 낳았다. 옛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기존의 유전학을 비판하고 획득형질 유전과 이를 이용한 농업증산을 주장하여 ‘사회주의 과학’의 영웅으로 떠받들던 리센코, 북한에서 1960년대 초 원자물리학적 방법으로 경락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주장하여 ‘주체과학’의 영웅으로 한때 칭송받았던 김봉한 등이 좋은 예이다. 이들은 모두 과학적 연구성과가 국가 개입에 의해 부당하게 부풀려져 과학계에서 제대로 검증받을 기회를 못가졌던 것이 치명적 문제였다. ‘영웅 만들기’의 폐해는 또한 특정한 과학자 내지 그의 분야에 국가의 연구자원이 집중되어 과학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큰 부작용을 초래한다.  

인위적인 ‘영웅 만들기’를 통해 과학을 키우겠다는 국가의 야심은 잘못된 것이다. 과학자 스스로도 과학계의 검증보다 국가의 지원을 통해 영웅이 되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과학에서는 위대한 발견 못지 않게 조작과 사기 논란도 종종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처럼 온 나라를 뒤흔들지는 않는다. ‘영웅 만들기’는 과학과 국가의 잘못된 결합이고 결국 핵폭풍의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다.

김환석/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

현대사회의 모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종교와 과학의 충돌이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논란도 그런 충돌을 배경으로 삼아 나왔다. 종교와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방법에서 다르다. 종교는 믿음에 의지한다. 과학은 검증에 의존한다. 믿음이 종교가 의지하는 방법론이므로 경전에 계시된 진리를 반박하는 사실이 아무리 많이 쌓여도 그것들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검증에 의존하고 이론들 사이의 경쟁을 허용하므로 과학은 꾸준히 나아간다.

과학의 성취는 필연적으로 종교의 토대를 허물었다. 종교는 과학에 거세게 저항했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 이후 과학적 지식에 의해 자신의 신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불행하게도 과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과학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를 줄곧 줄였다. 과학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임을 보여 주었다. 이어 태양 또한 은하계의 뭇별 가운데 하나이고 다시 우리 은하 역시 수많은 은하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밝혀냈다.

반면에 종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만큼 중요한 존재며 그들의 영혼은 영원히 살아남는다고 안심시킨다. 과학의 성과들을 누리면서도 사람들이 결정적 순간엔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그래서 이상하지 않다.

이번 줄기세포 논란에도 사람의 왜소화가 포함되었다. 진화생물학은 모든 생명체가 첫 생명체의 후손이고 외양에서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전자를 많이 공유하며 그런 뜻에서 혈연을 지녔음을 이론의 여지없이 밝혀냈다. 이런 발견은 사람은 다른 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우리의 통념과 어긋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구호로 흔히 포장되는 이런 통념은 모든 종교의 가장 근본적 신조다. 여기서 다시 종교와 과학은 부딪친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이 과학적 연구를 인도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그것이 환상임을 지적하면서 현대의 윤리는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이런 주장은 과학적 연구를 인도할 윤리는 과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필요한 지식들은 과학자들만이 지녔기 때문이다. 과학이 워낙 빠르게 발전하고 전문화가 가속되므로 윤리적 판단에 필요한 지식들을 일반 시민들이 지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과학이 경쟁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점이다. 검증을 통해서 이론들의 우열이 가려지므로 과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경쟁이 치열하다. 자연히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내용이 허술한 연구나 이론은 이내 밀려난다. 반면에 종교는 경쟁을 거부한다. 배교나 이단을 허용하는 종교는 아직 나온 적이 없다. 10여 년 전 미국 생물학자들이 황 교수의 연구에 선행적인 배자분할 실험에 성공했을 때 교황청 기관지는 ‘광기의 터널로 들어서는’ 과학자들을 규제하라고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역사를 살피면 우리는 권력이 잘못 작용하면 과학이 사악하게 쓰인다는 사실을 만난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의 생체실험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교훈적인 사례는 공산주의 러시아에서 트로핌 리센코의 학설이 초래한 비극이다. 스탈린 시대의 농업생물학자인 리센코는 멘델의 법칙에 입각한 유전학설을 비판하며, 환경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생물학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자연과학마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바라보던 스탈린 시대의 광풍(狂風)에 힘입어 “채소를 교육시킬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 공식 이론으로서 지위를 차지했지만 이로 인한 농업 실패로 수많은 농민이 굶어죽었다. 권력이 개입해 이론 사이의 경쟁을 배제하고 특정 이론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면 이런 폐해가 생겨난다.

소비자의 이익을 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자유로운 시장에서 나오는 경쟁이다. 이런 이치는 과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교 등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부가 나서서 인간 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윤리적 규정을 만든다면 걱정스럽다. 어떤 윤리나 법도 과학의 빠른 발전을 따라갈 수 없으므로 그런 규정들은 윤리를 지키기보다는 과학의 발목을 잡는다. 그저 경쟁하게 하라. 기업가들이든, 과학자들이든.

복거일/소설가

 

 

 

 

두 사람 모두 황우석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 개입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초점은 약간 다르다. 김환석 교수가 "과학과 국가의 잘못된 결합"을 문제삼고 있다면, 복거일씨의 경우는 '국가권력의 개입' 자체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유가 특이한데, 국가는 종교 등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그런 연장선상에서라면 복거일의 본격적인 '종교비판론'을 기대해봄직하다! 더 나아가 지극히 종교 정향적인 미국식 정치 마인드에 대한 비판도!). 여하튼 나는 '인용'만 하며,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06. 01. 09.

P.S. '리센코 어페어'에 대한 참고자료로 '맑스 코뮤날레'에서 발표됐던 논문 "혁명기의 러시아 과학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를 옮겨놓는다(복거일과는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비록 '노동자-농민'이 이런 문제에서도 '해결사'가 되어줄 거란 전망에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필자는 김해민(노동자의 힘 회원)님이다.

리센코 사건
1936년, 소련의 과학기술계에서는 특별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모스크바의 레닌 농학아카데미에서 발표된 "유전학에서의 두경향"이라는 논문에서 리센코(T. D. Lysenko)는 환경적 조작과 접목에 의해 유전이 변형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주류였던 멘델과 모건의 유전학을 반진화론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견해가 진정한 다윈주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 발표는 과학기술계의 논쟁으로 끝나지 않았다. 1948년에 개최된 같은 회의 에서 우크라이나 농부의 아들인 리센코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멘델의 과학을 "반동적이면서 퇴폐적이다"고 규정하고 그들의 과학을 추종하는 자를 "소비에트 인민의 적이다"라고 공격하며 자신들의 학설을 사회주의 생물학 중 하나로 당이 공식적으로 채택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당은 이를 승인함으로써 과학기술계의 논쟁은 일단락 되었지만 비극은 시작되었다. 이 여파로 유전학 과목은 폐강되고 관련 연구소는 폐쇄되었다. 과학기술자들 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당의 결정을 찬양하는 공개적인 '사상전향서(?)'를 쓰지 않은 사람은 내쫓기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당시 곡류의 기원에 관한 연구를 통해 현대 식물 육종학에 대한 기초를 세운 과학자 바빌로프도 이 과정에서 실각되고 볼가강 중류의 사하로프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에 맹위를 떨치던 리센코주의도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인해 사라지는 운명에 처해 버렸다. 맑스주의 내에서도 리센코 학설은 '맑스주의와 정반대 되는 것' 혹은 '과학적 특성이 결코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아울러 소련의 사회주의 과학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급진과학운동은, 소련의 폐쇄적인 흐름과는 다르게 다양한 논의를 바탕으로 운동의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급진과학운동은 무려 10여 년 간의 소강상태에 빠져버렸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물론 단편적인 사건으로 혁명기 러시아의 과학기술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스탈린시기에 과학기술은 매우 큰 발전을 이룩한 것 또한 사실이다. 냉전이 살벌한 시기에도 미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소련의 과학기술 수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자본주의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해주는 사건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숙련노동자의 조직된 힘을 분쇄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도입해 왔고,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체로 줄곧 노동자들을 소외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혁명기 러시아에서 그것도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소련에서 무엇 때문에 이러한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것도 20년이나 지속되었을까?

1917년 혁명 후 볼셰비키 혁명 정부 앞에 놓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레닌은 자국의 정세와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연합군을 탈퇴하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연합국측의 간섭전쟁과 국내 반-볼셰비키세력들에 의한 격렬한 내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내전은 혁명을 더욱 힘들게 했다. 산업 생산량은 극도로 하락하였고, 농촌은 황폐화되었다. 이 시기 볼셰비키 정부는 소련의 낙후된 생산력 복구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레닌은 생산력의 복구를 위해 내전동안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산업경영권을 중앙집권화하고 자주적 '노동자 관리'기구를 강제 폐지시켜 버렸다. 또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발전된 과학기술 중에서 선진적인 부분 채택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과학적 관리 기법이라는 테일러 시스템을 도입시켰다. "근로인민 자신들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고 현명하게 적용된다면 테일러시스템은 전 근로인민의 필요노동일을 훨씬 절감시키는 믿음직한 수단이 될 것이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른바 이 '소비에트 테일러시스템'은 스탈린 시대까지 이어졌다. 1921년 3월 제10차 전당대회에서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완전히 폐지하였으나 노동부에서 차등임금제와 식량배급량 차별제, 노동카드와 성과급제 및 반-볼셰비키 성향의 부르주아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당과 국가의 여러 정책들을 주도하는 핵심적인 위치로 상승하게 되었고 이들은 대개 산업행정, 고등기술교육, 연구 기관, 기획기관에서 최고의 기술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영향력을 근거로 정책 결정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려 하였고, 이러한 면들이 기술관료주의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24년 레닌이 죽은 후,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레닌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급격한 산업화를 주장하였다. 1929년에 스탈린은 집단농장화를 실시하고 대규모 산업화 정책에 착수하게 되었다. 스탈린 시대에는 과학을 생산력이라기보다는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로 인식하였다. 모든 과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재편할 것을 요구하였고 과학과 철학 모두에 대한 당성의 우위를 강조하게 되었다. 부르주아 기술관료들은 공산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붉은 전문가'로 교체되었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은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형식상으로 남아 있던 산업의 집단적 관리 원칙과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하는 노조의 마지막 권한을 모두 폐지해 버렸다. 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까지 흘러온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은 혁명기 러시아가 리센코주의를 받아들이게 한 것이었다. 레닌과 스탈린 모두 소련의 낙후된 생산력을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박한 과제로 다가왔다. 레닌은 과학을 생산력으로 주요하게 파악했고, 부르주아의 선진 과학을 수용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나아간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과학기술에서 자본주의적 이용만 제거하면 순수한 기술만 남아 이를 사회주의적으로 이용하면 된다는 기술 중립론적 시각으로 비판받고 있다. 스탈린의 경우는 좀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낙후된 경제의 복원과 반-볼셰비키 성향의 기술관료의 관료주의 폐지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고, 당시 거의 쿠데타적 권력 쟁탈과정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과학을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로 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스탈린처럼 과학기술을 이데올로기로 보는 관점은 과학기술과 사회관계를 잘 설명해 주기는 하지만 과학기술의 내재적 발전 경향을 지나치게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단지 누가 이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아무리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과학기술혁명이 수준 높은 생산력으로 되어 인민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인간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과학기술 생산과정/이용과정(노동과정)속에서 주체와의 관계와 사회관계속에서 판단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즉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소유관계의 문제와 아울러 과학기술 생산과정에서의 기술적 조직적 생산관계와 개발 생산단위들 간의 경제운영관계의 문제 그리고 사회관계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사고 해야한다. 결국, 당시 급박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공산당의 잘못된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은 소유문제가 해결된 사회주의국가에서도 과학기술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혁명기 러시아라면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 어떻게 과학기술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까? 맑스는 이러한 질문에 한가지 해답을 제시한 바 있다. 맑스에 따르면 진리를 파악하는 자는 관념적 몽상가들이나 학자가 아니라 가장 실천적인 계급, 즉 이론적인 수준에 한정되지 않고 실천을 통해서 실천적 수준에서 진실을 증명코자 하는 계급, 즉 대다수 노동자 계급과 그 노동자 전위세력으로 파악하였다. 맑스는 인식에 있어 실천의 중요성, 그리고 가장 실천적인 계급적 관점을 명확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한번 상상해 보자. 레닌이 자주적 노동자관리기구를 폐지시키지 않고, 노동자-농민의 자주성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진행했다면, 그리고 스탈린이 그나마 남아있던 노동자들의 마지막 자주권을 박탈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노동자-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주장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민주적 의사 통로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많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실천적 주체인 노동자들은 테일러 주의를 사회주의에 적용하면서 테일러 주의의 문제점을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폐기시키지 않았을까? 그래서 새롭게 사회주의적 노동과정을 구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농민들은 리센코주의의 과학을 집단 농장에 적용하면서 리센코주의의 진실성을 적어도 20년보다는 빨리 확인할 수 있지 않았을까?(강조는 나의 것) 

 

 

 

 

P.S.2. 이너파벨님이 알려주셨는데, 하인리히 야곱의 <빵의 역사>(우물이있는집, 2005)에도 리센코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아마도 '러시아의 빵 - 1917년'이란 절에서인 모양이다. 재인용하자면, 가혹한 기후를 견뎌낼 수 있는 최상의 품종의 밀을 찾아내 육종을 통해 종자로 공급하려는 계획을 가진 바빌로프에게 리센코의 제자가 이렇게 말한다: "식물학은 시간이 남아돌지 모르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우리는 여기, 러시아에서 혁명 과업을 완수했다. 거만하게도 인종적 특성과 불변하는 성질을 내세우는 멘델의 과학 따위는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렇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살아있는 생명체를 변화시키는데 몇 세대가 걸린다고 믿을 수 없다. 다윈과 마르크스에 의하면 생명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환경이다. 새로운 조건에서는 새로운 품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미 인간을 통해 관찰한 바 있다. 과연 식물이 인간보다 더 반동적인지 살펴보자." 그러자 바빌로프가 응수한다: "만일 환경만으로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면 아마 리센코는 아무 씨앗이나 집어들고 시베리아의 툰드라지대로 가지고가서 심은 뒤 씨앗이 얼지 않도록 평원 전체를 데워야 할 것이다."

그렇다, 분명 새로운 조건에서는 새로운 품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새로운 물적 토대는 새로운 인간을 형성해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그 새로운 조건이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조건 없이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인간'은 어디서 굴러떨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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