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안녕, -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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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공모전에서 하상훈의 <아프리카의 뿔>과 공동으로 당선된 작품이다. 책 끝 부분에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심사위원 네 명의 심사평과 두 당선 작가의 당선 소감 인터뷰가 실려 있다. 보통 심사평은 딱딱해서 안 좋아하는데, 심사평과 당선 소감도 본 소설만큼 괜찮았다. 내가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드라큘라 남자와 관 짜는 여자의 짝사랑 이야기라는 말을 들어서였다. 트와일라잇을 시작으로 뱀파이어부터 늑대인간, 심지어 좀비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종족 남자와 인간 여자의 러브 스토리가 대세를 넘어 클리셰까지 되어버린 참이였지만 한국작가가 집필한 작품은 접한 적도 읽어본 적도 없었기에 식상할 수도 있는 소재가 되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한국작가가 집필한 이종족과의 러브 스토리가 별로 없는 것에 대해 막연히 문화상의 거리감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 책의 뒷부분에 실린 소설가 윤대녕의 <아프리카의 뿔> 심사평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또 하나 마음에 걸렸던 점은 바로 시점의 문제였다. 이 소설은 서사의 주체가 소말리아 해적이면서 동시에 17세 소년(모하메드 이브라힘)이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소설 양식에서 이야기의 주체는 본질적으로 모국어를 하는 작가이다. 말하자면 주체의 확보를 통해 통해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납치된 동일 13호의 선원들이 서사의 주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평소의 내 소설론적 믿음이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한국작가가 집필했는데 외국인이나 서양문화를 배경으로 한 주인공이 등장하면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독자 입장에선 어색할 수밖에 없다. 집필하는 작가 역시 해당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가보다 더 자연스럽게, 더 그럴듯하게 집필하긴 힘들 거고. 그동안 한국 작가나 일본 작가가 서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에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드라큘라 남자와 관 짜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가 주요 스토리이긴 하지만, 크게 보자면 동물원의 명물, 말하는 코끼리가 살해당한 사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동물원 사육사 민구는 관 짜는 마리를, 마리는 백 년 묵은 드라큘라를, 드라큘라는 자신을 드라큘라로 만든 미라를 좋아한다. 진심인 듯 진심 아닌 딴청 피우는 말들로 서로 밀당하는 것을 보면 드라큘라도 마리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 맞은 미라를 주워온 민구를 보면 민구가 미라를 좋아하는 것도 같다. 이처럼 무엇 하나 뚜렷해 보이지 않는 애매모호한 인간관계와 무의미해 보이지만 의미 있고 센스 넘치는 대화가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대화가 쓸데없이 끝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지론을 아주 모범적으로 지키고 있다는 심사평에 적극 공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드라큘라가 마리에게 보낸 편지였다. 참 별거 아닌 담담하고 서툰 내용이었는데 그 담담함과 서툼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새삼 소설을 읽는 동안 킥킥거리느라 까먹고 있던 이 소설의 정체성(러브 스토리)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드라큘라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한국사회 문제들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내고 작가 본인의 따스한 시선으로 풀어낸 것도 인상 깊었다. 작가 당선 소감 인터뷰를 보면 본인 나름대로는 구조를 치밀하게 짰다고 자부하던데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구조가 후반부에 가서 무너진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가능성 있는 작가의 데뷔작이라 기분 좋게 읽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새로운 스타일의 출연이라고 평가하던데, 과연 어떤 작가로 성장할지 기대된다. 

 

인상깊은 구절 ▼

 

그는 편지를 주고 돌아갔다. 잠이 안 와서 편지를 읽었다.

 

마리에게

 

안녕. 아주 오랜만에 글을 써봐. 아마 백년 만일 거야. 편지는 처음인지도 몰라. 옛날에 잡지에서 편지 쓰는 법을 읽었어. 안부와 날씨 이야기로 시작하면 되지. 세즈부스. 여기는 날씨가 좋아. 그곳은 어때?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도서관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도서관은 발각됐어. 모래를 담아둔 상자만 겨우 가지고 나올 수 있었어. 건물은 정부 소유로 넘어갔어. 나는 지쳤어. 그리고 한없이 무료했어. 한동안은 자기만 했어.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어. 다시 미라를 찾아나섰어.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지금 내가 정말 뭔지도 몰라. 그 여자가 미라인지 무엇인지도 왜 날 떠났는지도 몰라. 깨어 있는 시간을 뭘 하면서 견뎌야 할지 몰랐어. 미라를 찾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너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됐어. 이야기가 끝나는 게 두려웠어.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네가 날 닮았다고 생각했어. 이제 이야기가 끝났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아주 막막할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아. 할 일이 있어서일까. 이걸 다 쓰면 널 깨우고 너랑 바보 같은 농담을 할 거야. 유치할수록 좋을 것 같아. 네가 했던 거짓말들이 농담이라는 걸 알아. 시간을 때우기에 농담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석대로 할게. 시작은 날씨 이야기로 하고 끝은 이렇게 하는 거지. 이만 줄일께. 잘 지내.

 

ps. 네가 만든 관은 정말 마음에 들어. 이건 진담이야.

 

서툰 편지였다. 그러나 너무 지루한 밤이어서 편지를 읽고 또 읽는 수 밖에 없었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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