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편이다. 굉장히 좋아하거나, 굉장히 싫어하거나. 나의 경우는 어떻냐고? 나는 그가 싫은 사람들쪽에 서 있는 사람이다. 사람 싫어하는데 이유있나?라는 우스갯소리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릿속에서 재생될 정도로 나는 그가 싫다. 그가 싫어진 것은 그의 책을 처음으로 접한 순간부터였다. 그 순간은 아직 소녀의 감수성이 남아던 20대 초반 어느 생일날이였다. 그 기분 좋은날 베스트 프랜드에게 받은 선물이 하필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였고, 재수없게도 그 책에 처음 펼친 페이지가 붕가붕가 장면이였는데 그 장면을 피해 넘긴 페이지에 또 붕가붕가 장면이였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할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그래서 이렇게 나는 무라카미라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만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작가라는 걸 알기에,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세상에는 정말 안 맞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안 맞는 작가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뿐이였다. 게다가 그 뒤에 접하게 된 무라카미 류의 책에 대한 평가는 나에게 무라카미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버릴 정도였다. 대체 왜 그렇게 무라카미라는 사람들은 겉멋만 잔뜩 들어서 섹스만 부르짖는지 거야?!  

그런데 이런 내가 놀랍게도 그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정도다. 내가 그의 책을 읽게 된 까닭은 간단하다. 당시에 읽을 책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잠깐 시간이 남았고 그 시간에 맞춰서 읽을 만한 적당한 책을 도서관에서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이 눈에 띄었다. 그때 문득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 중에서 제일 노멀하면서 그의 색채가 적게 드러나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다는 평을 본 기억이 났다. 그래, 이번 기회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한번 읽어보리라, 불현듯 결심하고 책을 빼들었다. 그런데 재수가 없게도 책의 표지에 기름같은 미끌미끌한 정체불명의 액체가 묻어 있는게 아닌가? 순간 지저분한 기분에 이 책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지만 그래도 이왕 빼든거 다 읽어보리라 마음먹고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읽기 전에 표지를 깨끗이 물티슈로 닦아내는 건 잊지 않았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적인 단편집으로 빵가게 재습격, 코끼리의 소멸, 패밀리 어페어,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 로마제국의 붕괴.1881년의 인디언 봉기.히틀러의 폴란드 침입.그리고 강풍세계,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까지 총 6개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혼란스러움을 주제로 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방황하는 청춘들이 자신의 이야기라며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였다. 이래서 하루키의 팬들이 많을 수 밖에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에겐 이미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낡고 고루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홍콩 느와르의 대표작인 영웅본색이 멋진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현재 우리의 감성에 비해 촌스럽게 느껴져 살짝 웃음이 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지금은 아무도 주윤발처럼 바바리코트에 이쑤시게를 물고 다니진 않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전 목차를 보며 빵가게 재습격이라는 작품에 꽤 기대를 걸었다. 하루키의 대표적인 단편집의 제목으로 선택 될 정도의 단편이라면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내 흥미를 유발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하루키의 섬세한 묘사와 문체는 마음에 들었지만, 그 외의 다른 요소들은 다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이 이 책의 전체 구성상 첫번째에 위치함으로써 내가 하루키의 스토리텔링 방식에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읽게 된 이유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스토리 자체가 나에게 와 닿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 같다. 한밤중에 일어나 부부가 빵가게를 습격한다는 발성은 꽤 신선했지만, 그게 대체 어쩌란 것인지? 결말도 여운보다는 황당함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렇게 실망스러운 첫만남을 했음에도 이 첫번째 작품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모두 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두번째 단편인 코끼리의 소멸은 별 다섯개를 주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현대사회의 일상생활 속에서 사물이 지니고 있는 가치의 소멸과,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존재하던 것들이 사라짐으로 해서 생기는 상실감을 절묘하게 그려낸 그의 글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덕분에 이 두번째 작품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쓰는 방식과 그 감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철지난 마초성향과 허세끼까지 이해하는 건 아직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들은 철지난 홍콩 르와르처럼만 느껴지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 철지난 홍콩 르와르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감동과 추억을 안겨주는 힘이 여전한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도 그 고루함 속에서 아직까지도 유효한 감동과 여운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역시 그가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재미나게 이 책을 다 읽어버렸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표지에 다시 이상한 기름 같은 액체가 다시 흐르고 있다. 분명히 책을 읽기 전 깨끗하게 닦아 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이 책은 주윤발처럼 마르지 않는 기름기를 지닌 걸까.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주기 위한 책의 몸부림(?)일지도 모를 겠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이 책 한권만으로는 그를 알기엔 조금 부족한 듯 싶다. 이 책으로 그를 알 수 있는 건 그가 그 나이 또래의 남자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마초끼를 가지고 있고, 술을 미친듯이 사랑하며 섹스를 쿨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 뿐이니까. 이번에는 그와는 만난것을 제일 큰 수확으로 만족하련다. 이제 그에 대한 파악을 마쳤으니 다음에 만날 때는 이 대략적인 모습 안에 존재하는 그의 내밀한 모습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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