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강의 남회근 저작선 1
남회근 지음, 신원봉 옮김 / 부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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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유명한 고찰과 명찰들을 탐방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8대 적멸보궁 성지를 순례하고 있다. 그렇게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전에 읽었던 《금강경》을 다시 펼쳤다. 사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에는 각기 방법이 있는데, 나는 관련된 텍스트를 모조리 읽는 것으로 배움을 시작한다. 어떻게 보자면 먹물 근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짧은 인생이지만 평생 들여놓은 습관이 이 모양이니 바뀔 턱이 없다. 그래서인지 20대에는 나름의 커리큘럼을 짜서 독서하는데 몰두했고, 30대가 시작되자 손에서 책을 놓고 책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하나둘씩 경험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최근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불교 공부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사찰을 답사하며 실천적인 배움을 이어가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집에서 불교와 관련된, 불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을 탐독하고 있다.

 

불교는 나와 깊은 인연을 가진 종교다. 비록 나는 종교가 없지만(!!), 내 아내와 장모님은 불심이 깊고, 나의 외할머니와 아버지 역시 불교에 심취하신 적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성장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본격적으로 불교를 탐구하게 된 것은 20대다. 지적인 욕망에 허덕이던 이때에 나는 불교에서 유명하다는 경전들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충 읽어넘겼다. 귀중한 경전을 그저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에 앞서 허겁지겁 읽어댔으니, 경전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금강경》도 그 시기에 처음 접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경전, 그리고 대승 불교가 가장 중요시하는 경전 중에 하나인 《금강경》을 나는 너무나도 얕잡아봤고,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을 단숨에 읽어나갔다. 아무튼 수박 겉핥기 식으로 불교에 관련된 서적을 읽어서 속 뜻은 자세히 몰랐지만, 그래도 안 읽은 것보다는 나았다. 덕분에 나는 불교에 기본적인 사상과 철학을 대충이나마 알게 됐다.

 

내가 불교를 다시 접하게 된 계기는 장모님 때문이다. 장모님의 지병이 깊어지면서, 근심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나 역시 괴로웠다. 그러나 어찌하랴. 병을 대신 앓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장모님 문병을 매일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러나저러나 답답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때 장모님이 불심이 깊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장모님의 쾌원을 위해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을 순례하며 각각 108배를 올리자고 결심했다. 내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이유는 종교의 교리 안에는 답답하고 비이성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내 생각이자 오만일뿐이고, 종교에 귀의한 타인의 입장이나,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랬기에 성당에 가서도, 교회에 가서도, 절에 가서도 각각의 예절에 따라 예배를 올리곤 하였다. 아무튼 그런 비종교인인 내가 불교 성지를 순례하며, 108배를 올리고자 했으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매우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물불을 가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불교 명승지를 순례하는 과정에서, 맹목적인 순례를 하기보다는, 순례를 통해 불교 철학을 단단히 배우는 기회로 삼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경전인 《금강경》을 다시 잡았다. 시중에 《금강경》을 번역한 책은 숱하게 많다. 유명한 스님이 번역한 책, 그리고 학자들이 번역한 책, 《금강경》을 대상으로 한 에세이 등등... 워낙 중요한 경전이다 보니 해석한 책도 무더기로 많았다. 그중 나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 사상에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남회근의 《금강경 강의》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남회근의 고전 해석본을 애호한다. 남회근의 글은 다소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의 서술은 깊이가 있었고, 해석에 있어서도 신선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논어》를 읽을 때에도, 《노자》를 읽을 때에도 남회근의 책을 곁에 두고 참고했다. 《금강경》 역시 마찬가지다. 《논어》와 《노자》에서 느꼈던 기대감을 그의 《금강경 강의》에서도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금강경》은 대승 불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경전이다. 유교에 《논어》가 있고, 도교에 《노자》가 있고, 기독교와 가톨릭에 《성경》이 있고, 이슬람에 《코란》이 있다면, 불교에는 《금강경》이 있다. 그 정도로 《금강경》은 부처의 사상이 응축된 경전이다. 《금강경》의 에피소드는 매우 간단하다. 석가모니가 소탈하게 공양을 마치고 발을 씻고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제자인 수보리가 석가에게 묻는다. '수양에 관한 최고의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이에 석가는 수보리의 질문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수보리에게 답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금강경》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게 전부다. 얼핏 보면 매우 간단해 보이는 에피소드지만, 《금강경》의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석가는 수보리에게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을 다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마음을 다잡는 방법을 타인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말이다. 수보리의 질문은 이어진다. 어떻게 말입니까? 석가는 말한다. 현상을 초월해야 한다고, 희로애락 그리고 보이는 현상계로부터 초월하여,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마음 수양이 이런 단계까지 오르면, 그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인간을 괴롭히는 수많은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이런 상태에 마음이 다다른다면, 마침내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굉장히 선문답 같은 해답이지만, 부처의 말은 결국 모든 것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수양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부처의 마음공부법은 유교에서 군자가 되기 위해 마음공부를 하는 수양과 비슷하며, 도교에서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무위자연으로 귀의하는 것과 흡사하다. 과거의 학문과 종교의 공통점은 바로 인간의 마음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럼 점에서 《금강경》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느껴지기보다, 마음공부의 방법론을 역설하는 보편적인 수양서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석가는 부처의 단계에 오른 인물이기에 뒤에서는 빛이 나며, 번쩍번쩍이는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금강경》에 나오는 석가는 그 당시 보편적인 사람들과 비슷하다. 소탈하게 공양하고 발을 닦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 이런 묘사는 권위 있는 종교의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라, 소탈한 동네 아저씨의 이미지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부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경전이며, 그런 인간적인 부처가 수보리에게 마음공부법을 제시한 경전이다. 석가는 《금강경》에서 수보리에게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다. 수보리가 원하는 해답을 직설적으로 돌직구를 던지듯 강타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응축된 석가의 해답을 수보리는 잘게 씹기 위해 풀어서 다시금 질문한다. 그래서 이 경전은 불교의 다른 경전보다 짧지만, 내용은 굉장히 어렵고 깊다.

 

인간적인 모습의 부처가 제시한 마음공부법은 사실 쉬운 방법은 아니다. 현상계를 초월하는 마음의 경지. 누구나 다 그런 마음가짐을 꿈꾸지만, 우리는 늘 세속에 굴복한다. 먹고사니즘의 압박으로 돈을 탐욕하고,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색을 밝히며, 다이어트를 부르짖으며 한편으로는 탐식을 자행하는 게 대부분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런 내가 과연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최소한의 마음 수양을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반성했다.

 

책을 읽으며 다시금 느꼈다. 불교는 유신론이 아니라 무신론의 종교라고, 물론 불교 세계관에서도 신이 존재하긴 하지만,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유일신을 경배하고 받아들이는 개념은 아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예배를 드려도 나 자신이 예수가 되거나 알라가 될 순 없다. 그러나 불교는 다르다. 석가가 《금강경》에서 제시한 대로 마음공부를 열렬하게 하여 해탈에 경지에 오르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부처'의 탄생이다. 고로 불심을 발휘하니 내 마음을 다잡는데 성공한다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장모의 건강을 위해 108배를 한다 하더라도, 석가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는 나의 기도에 반응할지 몰라도, 석가는 나의 108배에 관심이 없다. 석가는 《금강경》을 통해 말했다. 너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라. 모든 것의 시작은 나의 마음에서 시작한다.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다잡는 방법을 퍼트려라. 그럼 세상은 구원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지금까지 내가 순례하며 예배를 드린 것이 헛된 일이었나 싶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을 바꿨다. 이전까지 108배는 장모의 쾌유를 위해 빈 것이라면, 앞으로의 108배는 나 자신의 마음 수양을 위해 하겠노라고. 그렇게 수양을 해서, 불심이 깊은 장모에게도 좋은 기운을 나눠드려야겠다고.

 

《금강경》에서 석가는 말한다. 그 어떤 보시, 수억 만금의 보시보다도 더 값진 것은 《금강경》의 이치를 세상에 퍼트리는 것이라고, 이 경전의 핵심인 마음을 다잡는 법을 세상 만방에 퍼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불교에 경전에 대해 깊이 있게 논할 지식을 가지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에 대한 나만의 서평을 꼭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서평을 보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내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모를 때, 《금강경》을 읽어보라고. 이 책에서 석가가 이야기하는 마음을 다잡는 방법론은 특정 종교적인 교리를 초월한 보편적인 관점의 마음공부법이므로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이나 종교가 없는 분들에게도 마음 수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금강경》은 어려운 경전이지만, 서점에는 《금강경》을 쉽게 해설한 책이 많으니 살펴보고 알맞은 책을 선택하면 되겠다. 내가 리뷰하고 있는 《금강경 강의》도 훌륭한 책이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동양 고전에 대한 지식이 쌓인 분들께 권하고 싶은 도서다.

 

 

책을 덮으며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장모님 불교 믿는다는데 《금강경》은 읽어 보셨어?",

"잘 모르겠는데?"

"그럼 당신은 읽어봤어?"

"나도 경전은 안 읽었지."

"이 사람아, 이 책부터 읽어봐. 참 좋은 내용이니까. 그리고 장모님한테도 문병 갈 때 읽어드려. 그럼 부처님이 분명 좋아하실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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