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어른,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릴게요. 그 집만 가족인가요? 저희도 가족이에요. 저희 집 삼 남매도 명절 아니면 다 같이 얼굴 볼 시간 없어요. 요즘 젊은 애들 사는 게 다그렇죠. 그 댁 따님이 집에 오면, 저희 딸은 저희 집으로 보내주셔야죠." - P18

할머니가 혼내는 게 단순히 김지영씨가 더 이상 분유 먹을 나이가 아니라거나 동생 먹을 게 부족해진다거나 하는 이유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언니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 P24

전쟁으로, 병으로, 굶주림으로 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어 나가는 와중에 고순분 여사는 남의 농사를 지어 주고, 남의 장사를 팔아 주고, 남의 집 살림을 살아 주고, 또 본인 살림까지 알뜰살뜰 꾸려 가며 악착같이 사 형제를 건사했다. 얼굴이 하얗고 손이 고운 할아버지는 평생 흙 한 줌 쥐어보지 않았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과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계집질 안 하고, 마누라 때리지 않은 게 어디냐고, 그 정도면 괜찮은남편이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키워 낸 아들들 중결국 자식 노릇을 하는 건 김지영 씨의 아버지뿐이었는데, 할머니는 자신의 허망하고 비참한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위안했다. - P26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 P36

그런데도 그때는랐다.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남자 아이들이 먼저 줄을 서고, 먼저 이동하고, 먼저 발표하고, 먼저 숙제 검사를 받는 동안 여자아이들은 조금은 지루해하면서, 가끔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을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 듯이. - P46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갔다. - P65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 P68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 P93

김지영 씨는 17년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미용 일을 하러 나간 동안 잠깐씩 막내를 봐주셨을 뿐 삼 남매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등의 돌봄 노동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른 집안일도 거의 안 하셨다. 어머니가 차린 밥을 드시고,
어머니가 빨아 놓은 옷을 입고, 어머니가 청소한 방에서 주무셨다. 하지만 아무도 어머니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 - P111

"내 딸이 요 앞 대학에 다니거든. 지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 집에 간다고 무서우니까 데리러 오라네. 미안한데 나는 먼저 갈 테니까, 김지영 씨, 이거 다 마셔야 된다!"
김지영 씨는 겨우 붙잡고 있던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지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 P117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나요. 다 하면서 배우는 거죠.
지영이가 잘할 거예요."
아니요, 어머니, 저 잘할 자신 없는데요. 그런 건 자취하는오빠가 더 잘하고요, 결혼하고도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김지영 씨도, 정대현 씨도,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 P128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김지영 씨는 혼인신고를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 P132

어찌면 자신이 여자 후배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시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놓인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 - P139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 P149

그런데 왜 어머니는 힘들다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김지영씨의 어머니뿐 아니라 이미 아이를 낳아 키워 본 친척들, 선배들, 친구들 중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TV나 영화에는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만 나왔고, 어머니는 아름답다고 위대하다고만 했다. 물론 김지영 씨는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아이를 잘 키울 것이다. 하지만 대견하다거나 위대하다
거나 하는 말은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힘들어 하는 것조차 안 될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P151

머리만 좀 지끈거려도 쉽게 진통제를 삼키는 사람들이, 점 하나 뺄 때도 꼭 마취 연고를 바르는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엄마들에게는 기꺼이 다 아프고, 다힘들고,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다 이겨 내라고 한다. 그게 모성애인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혹시 모성애라는 종교가 있는게 아닐까. 모성애를 믿으십쇼. 천국이 가까이 있습니다! - P151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중략)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해야 돼?" - P165

김지영 씨는 한 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두 김지영 씨 주변의여자 였다. 아무리 봐도 장난을 치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감쪽같이, 완벽하게, 그 사람이 되었다. - P165

아내는 여전히 초등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고, 나는 아내가 그보다 더 재밌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거밖에 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하는 일. 김지영 씨도 그랬으면 좋겠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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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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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단순한 중2병의 일기가 아닌 순수하고 너무나 여린 홀든의 방황에 공감하고 아파했다면 당신은 아직 이 세상의 위선과 가식에 찌든 인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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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외로움과 고독의 냄새를 풍기며 자식들만 바라보고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 자체가 현진의 마음에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다. 본받을 만한 부모는 없어도 우아하고 강인한 할머니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떠올리면 세상을 강단 있게 살아갈 용기가 조금 생기곤 했다. - P19

영실은 손녀가 사고를 쳤다고 해서 집에 있던 차림새 그대로 허둥지둥 달려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갖춰진 모습으로, 예의 그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풍기며 나타나주었다. 어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짓누를 수 있다는 걸 현진은 그날 알게 되었다. - P18

현진은 수경의 웃음이 달갑지 않았다. 한참 어린 여자애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미소였고, 그래서 조롱처럼 느껴졌다. - P24

영실은 줄곧 순응해왔다. 부모가 사라진 세상에, 책임질 생명이 탄생한 세상에, 남편이 사라진 세상에, 더이상 자기 자신이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 그리고 덜컥 할머니가 된 세상에도. 그러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세상에는 적응하기가 쉽지않았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움직이는 게 산을 옮기는 것만큼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놓고 싶지않은 것들이 있었다. - P31

왜 나의 필요를 채워주려 할머니는 희생하지 않았을까. 궁극적으로 현진이 궁금해진 부분은 그것이었다. 할머니는 마땅히 그런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기 위해 지금껏 부지한 목숨이라고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그런 존재. 현진은 억지를 써가며 영실을 열렬히 원망해보았다. - P35

지금 은화에게 필요한건 그런 열기일지 몰랐다. 새틴 바우어가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장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던 내담자들. 그들은 오직 그 순간에만 생생하게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삶에서 상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사람들처럼.  - P64

문득 제 몸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렸을 때 마신 상한우유가 그 조그만 벌레들이 제 몸 어딘가를 돌이킬 수 없게 망가뜨려버린 건 아닐까 하고요. 황당한 생각이라는 건 저도 알아요.하지만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까 멈출 수가 없었어요. - P75

어린 은화는 배우로서 그 비참함을 잘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으므로. 작고 파란 불씨 하나가 그녀의 정원 안에서 고요히 타올랐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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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우리 부모님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일들이 있었는지와 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식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난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가 않다. 우선 그런 일들을 이야기하자니 내가 너무 지겹기 때문이고, 그렇게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했다가는 부모님이 뇌출혈이라도 일으킬 것 같기 때문이다. - P9

난 그녀가 좋았다. 셀마는 큰 코를 가지고 있었고, 손톱은 하도물어뜯어서 애처로울 정도인 데다가, 터무니없이 커다란 브래지어를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연민이 느껴질정도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교장인데도 셀마가 잘난 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알고 있었을까. - P12

펜시는 나쁜 놈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부유한 가정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온통 사기꾼들 천지였다. 원래 학비가 비싼 학교일수록 사기꾼들이 들끓는법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 P13

사실 난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나름대로 석별의 정을 느껴보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까지 나는 떠난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로 여러 학교들을 떠나왔다. 그런 것이 싫었다. 슬픈 작별이든, 기분이 좋지않은 이별이든 간에, 내가 그곳을 떠난다는 사실은 알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더욱 나빠질 테니까 말이다. - P13

「인생은 시합이지. 맞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운동경기와 같단다」「예. 선생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시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측에 끼게 된다면, 잘난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편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 - P19

어른들은 자신들의 말이 늘 맞다고 생각하니까. 난 그런 일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어른들이 내 나이에 맞는행동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지겹기까지 하다. 때로는 나도 나이보다 조숙하게 행동할 때도 있다. 그건 정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른들은 절대로 아무것도모르니까. - P20

난 선생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선생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내가 엘크톤 힐즈를 떠난 가장큰 이유는 주위에 가식적인 인간들만 우글거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이를테면, 교장인 하스 선생은 이제까지 만났먼 사람들 중에 가장 끔찍한 인간이었다. 서머 교장보다 열 배는 더 고약했다. 예를 들면 하스 교장은 일요일마다 학교를 찾아오는 학부모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돌아다니곤 했다. 지독할 정도로 사근거리면서 간혹 만만하게 보이는 학부모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 교장이라는 인간이 내 룸메이트의 부모에게어떻게 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말은 학생의 엄마가 뚱뚱하거나, 촌스러워 보인다거나, 아버지가 어깨가 넓고낡은 양복을 걸치고 있거나, 남루한 검은색이나 흰 구두를 신고 있으면, 하스 교장은 그저 간단한 악수만 하고 지나가거나, 억지 미소만 지은 채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학부모들과는 30분이나 한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건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었고, 도저히 참을 수없는 광경이었다. 엘크톤 힐즈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곳이었다. - P26

자신은 언제나 예수님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운전할 때조차 그렇다고 말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는 일단 기어를 넣으면서 예수님께 좀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엄청난 사기꾼이 서 있는 것이다.  - P30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이처럼 때때로 웃음을 주는 내용이다.
"나는 고전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귀향』과 같은 책들을 좋아하고, 많은 전쟁소설과 미스터리물도 읽었다. 하지만 그 책들은그렇게까지 내게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물론 그런 일은 그렇게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 P32

그는 노상 내게 부탁이라는 걸한다. 잘생겼다고 하는 놈들이나, 자기가 잘났다고 우쭐대는그런 인간들은 늘 남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곤 한다. 그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홀딱 빠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신의 매력에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부탁은 무엇이라도 거절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참웃기는 일이다. - P44

그에게 무슨 말을 해댔는지 뚜렷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고 싶으면 어떤 여자하고라도 그럴 수 있는 놈이 네놈이다. 그 애가 킹을 뒷줄에 늘어놓기만 하는 걸 신경조차 쓰지 않는 놈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또 그런 걸 아랑곳하지 않는 이유는 네놈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무릇 바보들은 자신들이 바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 - P65

그 스케이트는 엄마가 이틀 전에 보내준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내 기운을 쑥 빼놓았다. 스폴딩 운동용품점에들어가서 점원에게 온갖 질문을 다 하면서 이 스케이트를 샀을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또 퇴학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 사실이 날 아주 슬프게 만들었다. 엄마가사준 스케이트가 비록 내가 원한 경주용 스케이트가 아니라 하키용 스케이트이기는 했지만. 누군가 내게 선물을 줄 때마다 결국에 가서는 이렇게 슬픈 결과를 만들고 마는 것이다. - P75

작고 귀여운 엉덩이를 보기 좋게 흔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정말이었다. 우리가 자리로 돌아갔을 때 난 그 여자에게 반쯤 빠져 있었다. 여자들은 정말 그랬다. 여자들이 예쁜 짓을 할 때마다 아무리 볼품없고, 멍청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반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남자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세상에, 여자들이란. 그들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여자들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 - P102

난 그의 연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때로는 피아노를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왜냐하면, 상류층이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는 그 인간처럼 음악도 그렇게 들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 P111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만약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배우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바보 같은사람들이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더 끔찍한 일일것 같다. 저들이 내게 박수 갈채를 보내오는 것조차 싫을 것이다. 사람들이란 늘 별것도 아닌 일에 박수를 치곤 하니 말이다.
내가 피아노 연주자라면, 난 옷장 속에 들어가 연주할 것이다. - P116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어니는 정말 속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연주가 끝났을 때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연주가 제대로 된 것인지, 틀린 것인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건 완전히 그의 잘못만은아니다. 일부 저렇게 열렬히 환호를 보내고 있는 멍청이들의 책임도 큰 것이다. 기회만 생기면 어떤 사람이라도 망쳐버리는 족속들이니 말이다. - P116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에게 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그런 말들을 해야만 한다. - P120

물론 문제는 나한테도 있었는데, 나는 정말 그만둬 버린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상대방이 정말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지, 여자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대로 일이 벌어졌을 때 모든 책임을 내게 떠넘기려고 그러는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만둔다.
결국 문제는 내가 여자들을 안됐다고 여기는 점이다. 대부분의여자애들은 너무나도 바보 같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끌어안고있으면, 그 애들은 모두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성이라는 건 몽땅 날아가 버리고 흥분만 남는 모양이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난 여자들이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둔다. 그애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 그냥 하고 말걸 후회하게 되지만, 언제나 똑같이 그렇게 돼버리고 만다. - P127

하지만 그녀의 옷을 옷걸이에 걸어놓을 때는 괜히 그녀가 서글프게 느졌다. 이 옷을 사러 가게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그녀가 창녀인 줄 몰랐을 것이다. 옷을 팔았던 점원은 아마 그녀가 평범한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실이 내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 P131

망할 놈의 돈 같으니라구. 돈이란 언제나 끝에 가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어버린다. - P154

이래서 내가 수녀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뽐내면서 점심이나 먹으러 가버리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 굉장히 슬퍼지는 것이다. 그녀들은 뽐낼 만한 곳에 가서 점심을 먹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울한 건 우울한 거다. - P155

그렇지만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10만 번을 보더라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물고기 두 마리를 낚은 채 계속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고, 새는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사슴은 여전히 멋진 뿔과 날씬한 다리를 보여주며 물을 마시고 있을 것이고, 젖가슴이 드러난 인디언 여자는 계속 담요를 짜고 있을 것이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우리들일 것이다. 나이를 더 먹는다거나 그래서는 아니다. 정확하게 그건 아니다. 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 - P164

어떤 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저렇게 유리친열장 속에 가만히 넣어두어야만 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 P165

어찌 보면 그 광경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앞으로 저 여자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 여자아이들이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멍청한 녀석들과 결혼을 하겠지. 언제나 자기 차가 휘발유 1갤런에 몇 마일이나 달릴 수 있다고 떠벌리곤 하는 녀석들이나, 탁구나 골프를 치다가 지기라도 하면 어린아이처럼 화를내는 놈들이나, 비열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과 짝이 되겠지. 또는 평생 가야 책 한 장도 읽지 않는 놈들에, 정말 지겹기 짝이없는 자식들과 말이다. 특히 지겹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는소리다. 난 지겨운 녀석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이다.  - P166

지나치게 무언가를 잘한다면, 자신이 조심하지 않는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그사람에게 더 이상은 잘한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P170

더 기가 막혔던 부분은 내 옆자리에서 영화를 보던 여자가 상영 시간 내내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영화가 말이안 되게 엉터리로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큰소리로 울었다.
이런 영화를 보고 운다는 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겠지만, 그녀 옆에 앉아 있던 내가 보기에는그렇지도 않았다. 여자는 어린 꼬마와 같이 왔는데, 아이가 몸을 비비 틀 정도로 지루해하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도 도무지 데리고 가지를 않는 것이다. 그저 가만히 얌전하게 앉아있으라는 소리만 할 뿐이었다. 그 여자가 가진 착한 마음이라는것은 늑대가 가지고 있는 정도였던 모양이다. 이런 엉터리 같은영화를 보고 눈물이나 흘리는 인간들은 열에 아홉은 나쁜 놈이기 마련이다. 농담이 아니다. - P187

변호사는 괜찮지만...... 그렇게 썩 끌리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준다거나 하는 일만 할 수있다면 좋겠지만, 변호사가 되면 그럴 수만은 없게 되거든. 일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몰려다니면서 골프를 치거나, 브리지를 해야만 해. 좋은 차를 사거나, 마티니를 마시면서 명사인 척하는 그런 짓들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정말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한 건지, 아니면 굉장한 변호사가 되겠다고 그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게 된다는 거지. 말하자면, 재판이 끝나고 법정에서 나올 때 신문기자니 뭐니 하는 사람들한테 잔뜩 둘러싸여 환호를 받는 삼류 영화의 주인공처럼 되는 거 말이야. 그렇게 됭션 자기가 엉터리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게 문제라는 거지. - P228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건 알고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싶은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 P229

정말 문제였다. 어디서도 아늑하고 평화로운 장소는 절대로찾을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런 곳은 없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 일단 가보면우리가 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어떤 자식이 바로 코밑에다 <이런, 씹할>이라고 써놓고는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P267

사실 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리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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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도시에 살고, 너구리는 땅바닥을 기고, 덴구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헤이안 천도 이래 이어져 내려온 인간과 너구리, 덴구의 삼파전.
덴구는 너구리에게 설교를 늘어놓고, 너구리는 인간을 호리며, 인간은 덴구를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한다.
덴구는 인간을 잡아가고, 인간은 너구리를 전골로 만들어 먹고, 너구리는 덴구를 함정에 빠뜨린다.
이렇게 수레바퀴처럼 빙글빙글 돈다.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보고 있으면 그 무엇보다 재미있다.
나는 이른바 너구리지만, 일개 너구리임을 부끄러이 여기며 덴구를 아득하게 동경하고, 인간 흉내도 무척 좋아한다.
따라서 내 일상은 눈이 팽팽 돌 지경이라 따분할 틈이 없다. - P12

세면대에 매달린 지저분한 거울 앞에서 벤텐으로 둔갑했다.
홀딱 반한 사람으로 둔갑해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생김새는 똑같아졌지만 거울을 봐도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좋아하는사람이 내 뜻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내 뜻대로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느냐의 차이에 반하는 맛이 있다. 하기야 기묘하기로 따지자면 너구리인 내가 인간에게 반한 것이 더 기묘한 일이다. - P55

이미 부조리의 영역에 당당하게 들어선, 근거를 따지지 않는 신념이야말로 어머니를 어머니답게 하고 나아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었다.
아버지도 위대했지만 우리 어머니 또한 위대했다. - P64

이 세상에 널린 ‘고민거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어찌 되건 별 지장 없는 고민. 또 하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을 고민. 이 두 부류 고민의 공통점은 괴로워하는만큼 손해라는 사실이다. 애써서 해결될 일이라면 고민할 시간에 노력하는 것이 최고다.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노력해봤자 헛수고다. 하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수 없을 때는 기분 전환이란 놈이 필요하다. 그래서 작은형의 우물이 쓸모가 있는 것이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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