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류지연 지음 / 포레스트 웨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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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태어나 조금 더 아팠던 맏딸의 회복기, [살다 보면]
책 표지에서 느껴지는 맏딸인 나를 향한 손짓은 강렬했고, 1장의 첫 문장에서 이미 마음이 흔들렸다.
“가난하고 어린 엄마가 아기를 낳았다.”
그동안 나는 수없이 엄마를 원망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엄마와의 ‘처음’이 어땠을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 역시 가난하고 어린 엄마에게 태어난 아이였다.
그 사실이 서글퍼서,
가난이 혹시 대물림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서 부모님을 탓하던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이 한 문장이 내가 애써 꺼내지 않았던 마음 깊은 곳으로
나를 단번에 데려다 놓았다.

책을 읽는 내내 어딘가 숨겨두었던 감정들이 자꾸 들켜버리는 기분이었다.
나랑 10살 가까이 차이나는 작가님 인데도 페이지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마음들이
“너도 이랬지?” 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이 책은 장녀의 이야기다.
그런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된다.
특히 “가난이 가난을 도와 살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넉넉해서 건네는 도움이 아니라, 서로의 사정을 너무 잘 알아서
더 조심스럽게 내밀던 손.
그 장면이 낯설지 않아서 더 오래 붙잡게 되었다.

읽는 동안 내 어린 시절이 자꾸 겹쳐졌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던 순간들,
부모님의 표정을 먼저 살피느라 내 마음을 뒤로 미뤄두던 날들.
장녀라는 자리는 참 묘한 자리인것 같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철이 일찍 들어버리고,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이해해버리는 자리.
그래서일까.
이 책 속 문장들이 유난히 시원하게 다가왔다.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들을 대신 말해주는 느낌.
“그래, 나도 그랬어.”
그 말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게 된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이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비슷한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나만 유난히 참아왔던 게 아니었구나.
그걸 알게 되는 순간, 아픔은 그대로인데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혼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살다 보면’이라는 말이 조용히 내 마음에 내려앉았다.
지난 시간들이 더 이상 상처로만 남지 않는 이유.
그저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순간들이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받아들이게 된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런 문장을 만났다.
“내 삶과 부모님의 삶을 언제나 동일시해서 생기는
죄책감, 책임감, 그리고 감정의 변화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나만 유난히 상처받아서, 나만 유난히 힘들어서 그런 줄 알았던 시간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조금은 벗어나도 되겠구나.
책을 덮고 나면 지나온 시간들을 하나씩 꺼내어 차곡차곡 정리해보고 싶어진다.
장녀였던 나의 마음을 처음으로 다정하게 만져주게 되고,
조금은 멀게만 느껴졌던 부모님의 시간에도
이해와 사랑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결국 이 책은 과거를 지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를 다르게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였던것 같다.
조금은 덜 아프게,
조금은 더 따뜻하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런 마음이 남는다.
그 시절의 나에게, 그리고 그 곁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말해주고 싶어진다.
“그때도, 지금도,
우리는 잘 살아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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