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 오늘의 젊은 문학 4
이경희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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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다양한 영역의 책을 읽고 왔다고 자부했는데 정말 SF는 허버트 조지 웰즈의 '우주전쟁' 이후 처음이다. SF는 해외에선 워낙 고전의 한 축을 차지했어다. 하지만, 국내에선 몇 년 전부터 스멀스멀 개척 장르로 등장한 SF 소설이 요즘 대세다. 독서모임에서도 SF 장르는 몇 번 언급되었지만 다들 최후에는 SF는 제외하곤 했는데..ㅎㅎ 어쨌든 이렇게라도 첫 대면이라니, 반가웠다.

오늘 읽은 책은 이경희 작가의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이다. 이 책은 2020 SF 어워드 대상을 받은 이경희 작가의 중단편 작품 여섯 개를 모아놓은 일명 이경희 SF 중단편 모음집이다. 가장 최애하는 추리문학 소설과 사뭇 다른 SF 소설이지만 중단편이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일단 첫 페이지를 열었다. 오~ 첫 번째 이야기인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을 읽으며 내가 상상한 SF가 아닌 신장르 개척의 냄새가 풍기면서 나도 모르게 코를 킁킁해대며 그 신박한 냄새를 들이마셨다.

덕분에 재기 발랄한 미소를 지닌 작가의 얼굴을 한 번 더 슬쩍 쳐다보고 책을 읽고 또 한 번 책 표지에 떡 하니 있는 작가의 얼굴을 쳐다보고 또 읽고 ㅎㅎㅎ

목차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

우리가 멈추면

다층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에 대하여

바벨의 도서관

신체 강탈자의 침과 입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

총 6개의 독특한 이야기 중에서 오늘 내가 줌인할 이야기는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만큼 생각이 많아졌던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과 <신체 강탈자의 침과 입> 두 편이다.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

신선하다. 재미있다. 주인공 요한나는 제사 없애기 운동 본부에서 열렬히 일하는 여성이다. 그날도 종갓집에 가 한바탕 뒤엎고 온 그녀의 집에 진작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나타났다(!?). 이 벼락같은 일은 사람들이 살아생전 품었던 미련의 공간에 양자적으로 얽혀서, 시신이 다시 그곳에 살아난 양자 얽힘 현상(?)이란다. 이런 믿거나 말거나 상황에서 진작 돌아가신 (이혼한) 전 남편의 어머니.즉, 시어머니가 떡하니 한나의 집에 좀비처럼 살아나 왜 손주를 낳아주지 않느냐며 노력은 왜 안 하느냐며 ㅎㅎ 괴롭히는 상황에 맞닥뜨린다.(나라도 까무러칠듯.ㅠ.ㅠ)

한나뿐 아니라 여기저기 좀비처럼 되살아난 조상님들의 파행 때문에 한국뿐 아니라 전지구는 되살아난 조상님들의 잔소리 때문에 아수라장이 된다. (미국에서는 스티브 잡스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아이폰 엔지니어들을 고문 ㅋ)

생각만 해도 아찔한 죽은 조상님들의 좀비적인 출현으로 인해 요한나는 제사 없애기 운동 본부에서 '조상 없애기 운동 본부'로 명칭을 바꾸고 서울과 떨어진 곳 세종시에 본부를 차리고 투쟁을 벌인다.

첫 번째 이야기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 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요한나는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 속에서 등장하는 사라 코너 같기도 하다. 헌데, 사라 코너는 미래의 디스토피아 세상에 딱 어울리는 강인한 여주인공 필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풀풀 나는 반면 ㅎㅎ 조상님들과의 처절한 전투를 전두지휘하는 한나의 투쟁 방법은 너무 진심인데 읽고 있는 내 입가엔 실실 웃음기가 서린다. 실은 아래 내용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풋..하고 웃어버렸다.ㅎㅎㅎ

전투 요원들을 선발해 생존에 필요한 전투 기술도 가르쳤다. 헤드폰으로 멘탈을 보호하는 법, 어르신에게 뻔뻔하게 맞서는 법, 눈 똑바로 뜨고 대들기, 상대의 약점을 찾아 집요하게 잔소리하기 등등. 모두 조상님 사태 이전부터 경험으로 습득한 지혜들이었다.

"조상님들은 혈압에 약해요. 혈압으로 제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돈! 용돈은 부모님 외엔 절대 드리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37p

이 고약하고 엉뚱한 이야기에는 제사 없애기 운동에 앞장섰던 요한나의 분석 능력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세종시는 조상님들을 몰아내는데 성공, 그러나 오랜 투쟁 끝에 밀리고 밀리면서 살아남은(빨치산인가? ㅎㅎ)12개 단체에서 모인 14만 명은 계룡산 요새 안에 집결하면서 점점 몰려들며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하는 조상님들을 타도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한다.(근데 잔소리 해대는 조상님들의 소리가 어째 남 일 같지가 않다. 평소 내가 아이에게 하는 잔소리와도 뭔가 매칭이 되면서 혀끝이 따끔따끔한 느낌? ㅠ.ㅠ 나도 모르게 스토리에 바짝 긴장한다)

'이성으로 미신을 물리치는 과학자들의 모임'에서는 이번 사태 원인을 중력파-양자 얽힘이 원인임을 거의 현실로 입증했다고 자부하지만, 한나는 조상님의 조상님을 파동으로 불러와 윗세대 조상이 아래 세대 조상을 해치우는 것이 비책이라며 말도 안 된다며 반대하는 과학자를 감금하고 협박까지 해가며 자신의 방법을 단행한다.(요한나는 같은 파동으로 공명을 일으켜 조상들을 더 많이 불러내 유인원까지 거슬러갔을 때 제압하겠다는 생각.. 과연 어떻게 될까?)

스텔라 링크 시스템이요.(중략) 통신위성으로 일정한 전파를 발산하면 조상님들을 소환하고 있는 중력파에 다른 파동을 겹쳐 양자 요동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6p

시대를 거슬러 거슬러 한없이 오랜 과거의 조상님들이 깨어나 젊은 조상들을 훈계하면서 속속 돌처럼 굳어버린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언어가 사라지면서도 훈계는 멈추지 않는다. (인간이 지닌 원초적 본능이 이거란 말인가? 끝없이 타인을 바꿔보려는 욕심..아니 내 보기엔 욕망이다. 이건 ㅠ.ㅠ)

곰 가죽을 뒤집어쓴 조상님이 뼈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람들에게 우어우어 훈계하는 모습이 보였다. 인간이란 생물은 문자도 없고, 언어도 없던 먼 옛날에도 남에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간섭하기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52p

이제 사람이라기보다 유인원에 가까운 인류가 보이자 파동을 멈추려 했지만, 스텔라 링크 시스템에 오류가 나버리고 점점 초기 인류를 넘어 매머드가 출현하고, 파충류, 공룡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룡 시대까지 가버린 세상에서 마지막 조상이 되어버린 공룡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조상이건 후손이건 구분 없이 집어삼켜 버린다.

그렇게 인류의 종말이 찾아왔으니......

뭐, 어쩌겠는가. 모두 그들의 오지랖이 원인인 것을.54p

이 소설의 결말은 위와 같다. 아..뭐랄까. 그놈의 오지랖.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일에나 참견하는 인간의 이 고약한 본능은 결국 공룡에게 잡아먹히고 말 운명이란 말인가? 나도 모르게 다리를 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제사 없애기 운동으로 시작된 한나의 통 큰 간섭은 훈수충이 되어 살아난 조상들을 없애는 일에까지 이르렀고, 부모의 잔소리에 '응 아니야' 라고 반박하는 요즘 초딩들의 말처럼 결국 조상이나 후손이나 '인류' 는 한 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려고 발버둥 치는 똑같은 무리다. 내가 도대체 뭐라고(!) 나 아닌 타인의 일에 간섭하다가 결국엔 그 잘난 오지랖 덕에 공룡의 먹잇감이 되어 버리는가.

작가가 나에게 외친다. 남 일에 오지랖 넓히지 마쇼. 그리고, 잔소리로 하루를 시작해 하루가 끝내는 꼰대+훈수충은 부디 그만하시오. 심지어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엽기 SF 같은 느낌마저 들어 재미있게 읽었지만 묘하게 씁쓸하면서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오르게 하는 그런 소설이다. 다시 한번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작가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삭이듯 묻게 된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신체 강탈자의 침과 입

이번엔 외계인 이야기다. 그것도 은하계 7분 면에 살고 있는 인격신 계열의 종파로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들을 침으로 감염시켜 신체를 강탈하는 외계인. 그들이 드러내는 모습은 이마에 달팽이처럼 가느다란 더듬이가 돋아있다(음..이 단편은 묘하게 상상력을 자극한다. 읽으면서 계속 상상하게 되니까 마치 엽기 SF 시트콤 영화를 보는 것 같다 ㅎㅎ)

"응. 대외협력 본부장이 직접 실토했으니까 거의 확실할거야. 외계에서 온 바이러스인데 이름이 무슨 '순수' 라던가. 이걸 감염시키는 게 외계인 놈들한테는 종교의식 같은 거라더라고." 250p

직장에서 회식을 하다가 사장이 외계인이라는 걸 알게 된 한나는 평소 위생 관념이 철저한 수진, 미주, (이것도 웃기다..위생이 철저하니 외계인에게 감염되지 않았다는 설정)심실장과 함께 직장 내에 침과 입으로 먹는 음료 등으로 감염된 인간 외계인들을 박멸하기 위한 전투를 벌인다. 이 외계인들은 마치 신흥 종교인들이 벌이는 행태처럼 다들 모여 집회를 열고 온갖 말도 안되는 쇼를 벌여가며 정수기 회사를 통해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감염 바이러스 '순수' 대감염을 일으킬 작당을 벌이고 있다.

"우주의 가을이 찾아오면 지구는 멸망하나니!오직 6성 S-S-R 순수-레어 카드를 소지한 진짜 신도만이 안드로메다은하의 중심인 '순수'본성으로 이주할 수 있다! 어서 가챠를 돌리거라!한 번에 100만 원!"

천 부장이 소리치자 신도들은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 QR코드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휴대폰에서 번쩍번쩍 카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별 하나부터 여섯 개까지 제각각 다른 등급의 카드가 뽑혀 나왔다. 여기저기서 기쁨의 환성과 슬픔의 탄식이 쏟아졌다. 255p


오직 씻지 않은 자만이 방주를 타고 안드로메다의 천국에 가리라는 외계인 집단의 주동자이자 마치 신흥종교 교주 같은 외계인 리더는 '순수 선교단' 의 전도 계획서도 가지고 있다.(음..읽는 사람의 사고도 안드로메다로 가는 것 같다. 스토리의 구성이 마치 온갖 영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그리고 환상이 뒤섞여 짬뽕이 되는 한밤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순수'라는 외계에서 온 신도들은 지구를 완전히 정복하여 '순수' 의 재림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모양이다. 4명의 감염되지 않은 주인공들을 쫓아 옥상까지 모인 외계 감염자들. 그때, 멀리 구름 속에서 한줄기 새하얀 광선이 쏟아지면서 패닉에 빠진 감염자들은 갑자기 주인공들 주변에 텅 빈 옷가지들만 무수히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이 또한 외계로부터 '순수' 종교를 잡아들이기 위해 등장한 또 다른 외계인이었으리라.

이 사건을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한나는 설명한다.

"우리 태양계를 포함해 은하계 7분 면은 소위 말하는 인격신 계열의 종파들이 주류인 곳이에요. 감염신들이 아니라요. 말하자면 그 괄대충은 개척교회를 세우러 지구에 숨어들어 온 선교사였던 겁니다.(중략) 사라진 분들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셨죠? 저도 몰라요. 아마 은하계 어딘가의 외계 행성에 감금되었겠죠. '순수' 라는 감염신을 숭배한 죄로.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268p

이 사건 이후 네 사람은 직장을 옮겼고 사건은 점차 잊혀갔고 국내에서 손꼽히던 회사가 하루 만에 망하고, 수백 명이 실종되었어도 세상은 뒤집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한나와 수진의 묘한 동거가 있고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언니! 손 안 씻었죠?"

음..작가가 이 작품을 쓴 시점이 코로나 팬데믹이 확산되는 시점에 웹진에 개재된 걸 보면 '전염병' 이라는 소개를 가지고 SF 작가로서의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 것 같다. 특히, 이 책 속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브랜드나 기업명이 코믹하게 바뀌어 곳곳에 등장한다. 카뉴 믹스 커피, 코코아톡, 고에이 정수기 등 ㅎㅎ

한편, 엽기적인 스토리 구성에 나도 모르게 살짝 심리적인 거리 두기가 되었다가도 사회 현실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시선은 내 눈에도 명확히 보여 묘하게 매력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수백 명이 실종되었어도 세상은 뒤집어지지 않았고, 외계인들과 야합했던 국회의원은 재선에 성공했고, 최저임금은 오르지 않았다..라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글을 통해 냉소적인 사회의 모습, 국민의 정서는 무시하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외계인과도 뒷거래를 했던 의원의 재선 성공,, 물론, 최저임금 부분은 양날의 검 같아 뭐라 말하고 싶지 않지만.. ㅎㅎ

나머지 4개의 스토리는 사실 나에겐 그다지 몰입되어 읽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 2개의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었다. 아직은 엽기적인 환상의 롤러코스터를 타야만 하는 이경희식 SF 소설보다는 고전 소설을 나는 더 선호하는가 보다 ㅎㅎ

하지만, 그럼에도 신선한 소재를 픽한 작가의 안목에는 작은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SF장르에 대한 관습적인 시선-미래, 우주, 기술, 신세계-을 확실히 깨부수고 새로운 신장르를 개척한 분인 것 같다.


그렇게 인류의 종말이 찾아왔으니......

뭐, 어쩌겠는가. 모두 그들의 오지랖이 원인인 것을.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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