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빨간 공
서은영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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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지 않은 자연스러운 은빛 머리칼, 편안한 옷차림, 단촐한 살림과 매일 내달리지 않아도 되는 삶. 의무와 속박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진 너와 나, 2인분의 삶.

할머니와 빨간 공과 나. 나의 이름은 하나, 세상에서 하나뿐인 강아지라는 뜻이다. 내가 세상에서 하나뿐 이듯이 할머니도 빨간 공도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뿐인 존재다.

늦은 오후가 되면 낮고 작은 정겨운 집들 사이로 우리는 걷는다. 언제나 똑같고 그러나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골목들을 지나 너른 백사장과 바다가 있는 곳을 향해서. 할머니와 나의 시간 속에는 슬픔과 기쁨과 크고 작은 많은 이야기들이 차여있다. 낡고 바래지고 어쩌면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는 그런 우리 곁에는 항상 나의 빨간 공이 있었다.

물려고 하면 자꾸 도망치는 빨간 공을 따라 바다 멀리까지 헤엄쳐 간 날 나는 엄청나게 커다란 공 섬을 발견했다. 그 공섬엔 친구를 잃어버린 각종 공들이 가득했다. 푹신한 섬에서 나는 욱신거리는 다리도 빨간 공도 잊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뛰어 놀았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집에 가자, 하나야.’ 하고 나를 부르는 할머니 목소리만큼 좋은 것은 없다. 아니 하나 있다. 나의 빨간 공. 나는 나의 하나 뿐인 빨간 공을 물고 힘차게 바다를 헤엄쳐 온다. 온통 붉게 물든 바닷가에서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부드러운 손길 따뜻한 목소리 오늘도 나는 빨간 공과 함께 할머니 곁에 앉는다.

돌아오는 길, 언제나 같고 또 조금은 달라진 듯한 골목에 저녁의 기운이 스며든다.
옆집 야옹이는 돌담에 기대 우리를 마중하고 저 모퉁이 끝에서는 강아지가 반갑게 살랑살랑 꼬리를 흔든다. 언제나 영원할 것 같지만 또 금방 사라질 것 같아서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메모해 놓고 싶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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