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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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은 그럴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다. 너무 많은 관심도 진한 감정 표현에도 진절머리를 내는 사람. 슬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는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사람. 그리고 그런 눈물을 갖고 있는 누군가를 알아보는 사람이다.

절친의 따뜻한 모닝커피 한 잔에 가슴이 따뜻해지지만 고마워 이게 정말 필요 했어 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팔짱 따위 낄 수 없는 사람. 늦은 시간 귀갓길에 마중 나온 아빠를 피해 쏜살같이 집에 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자는 척을 하는 사람, 그런 나를 붙들고 대체 애가 왜 그렇게 못돼 먹었느냐고 이불을 걷어내고 내 몸을 흔드는 아빠에게 설명커녕 나가! 라는 소리만 뱉을 줄 아는 사람.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린 호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그렇게 큰일이란 건 없었다. 누군가 호정을 때린 것도 욕을 한 것도 굶긴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한 동안 쓸모없이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고 느꼈을 뿐. 갑작스레 생긴 아이 덕에 부모는 꿈을 접고 돈을 벌어야 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호정은 할머니에게 키워질 수밖에 없었고 좀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 부모는 무리한 사업을 벌이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조금 더 내는 욕심에 찾아오는 그런 불운이 찾아왔을 뿐이다.

호정은 돌아갈 집을 잃었고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의 전 재산을 해먹은 사람이 되었으며 고모와 삼촌의 미래를 망친 사람이 되었다. 고모와 삼촌은 하루아침에 호정이 밥그릇을 싹 비우는 것도 맛있다고 말하는 것도 경멸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건 어떤 언어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언어로 동정과 파렴치한을 배우기 이전에 호정은 몸으로 그것을 익혀야 했다.

어떤 것은 몸에 새겨진 채로 좀처럼 떠나지 않고 계속 돌아온다. 7살 호정이 느꼈을 그 유기감. 그것은 호정의 주위를 맴돌며 계속 그녀의 삶을 파괴한다. 진심을 말하는 건 왠지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 같은 감정. 다정함과 따뜻한 관심은 그저 거부감과 불행의 전조현상으로 읽히는 것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실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데 말이다.

부서진 존재는 부서진 존재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호정에게 은기가 다가왔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사이. 말하지 않고 눈물만 흘려도 곁에서 커다란 손과 온기로 그녀를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하지만 세상은, 특히나 별난 작동을 더 유별나게 뽐내는 사춘기의 파충류들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기어코 상처를 덮은 붕대를 잡아 빼고 파헤쳐서 다시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상처를 드러내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호정과 은기는 결국 차디찬 호수 바닥으로 가라 앉아 버렸다. 더욱 안전한 더욱 고요한 차디찬 호수의 바닥으로.

세상의 일, 끈적하고 더럽고 쉽게 전염되고 비열하고 하찮은 그 모든 일을 과연 호수의 일로 할 수 있을까.
다행히 호정에게는 친구들과의 우정이 부모와 할머니의 사랑이 선생님의 보살핌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 어느 면에서는 호정의 분신과도 같은 은기가 있었다.

‘어떤 일은 절대로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나쁜 일만 그런 건 아니다. 좋은 일도 사랑한 일도 그저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 눈처럼 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눈 내리던 날의 기억마저 사라지지 않는다.“

“내 마음에 빈 방이 생겼다. 그 때문에 나는 슬플 것이다. 그러나 잊지 않으려 한다. 그 방에 얼마나 따뜻한 시간이 있었는지를,”

“은기는 슬픈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런 얼굴은 어떤 말보다 나를 아프게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인사 같은 것. 은기가 슬프지 않기를 오래 아프지 않기를 언젠가 오늘을, 나를, 우리를 웃으며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328p)

“잘 지내.”
“응,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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