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 알고 보면 가깝고, 가까울수록 즐거운 그림 속 철학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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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어른이 되면 엄청 재밌게 잘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아무데나 갈 수 있고 아무 때나 친구를 만나고 뭐든 신나게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 지루한 어린 시절이 하루라도 빨리 지나가 버리길 원했었다.
웃긴 건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마음대로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먹고 놀 수 있지도 않을뿐더러 특별한 취미생활이 없는 한 별달리 하고 놀 게 없다는 거였다. 분명히 자유로운데 하나도 자유롭지도 않고 인생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학창시절 좋아하던 심리학과 철학 서적을 다시 읽고 미술작품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철학과 미술은 내가 꾸준히 좋아해온 분야였다. 그런데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이라는 이 책의 제목을 보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예술가로 태어났다는 말은 여기저기서 자주 읽었지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철학자라니 이 말은 무척 매혹적으로 들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철학자이자 예술가인 샘이니까.
작가는 캔버스 곳곳에서 철학자 할머니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온다고 했습니다. 난해한 철학적 개념을 스위치 같은 예술작품을 골라서 눈으로 보면서 생각해 보는 놀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그건 미술에 철학을 올려놓고 싸 먹는 쌈이 될 거라고 한다.

책은 철학 서적이기도 하면서 예술 서적이고 에세이 같았다가 옆집 언니랑 수다를 떠는 거 같기도 한 정말 커다란 쌈을 입안에 넣고 이 맛 저 맛을 한참 씹어 먹는 느끼이다.
천지 창조 이야기가 나오다가 니체가 등장하고 선과 불교, 김연자 언니의 아모르 파티까지 갔다가 다시 인간 이성과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게 롤러 코스터를 타듯이 멈출 수 없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후루룩 지나온다. 어색한 구석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두 개의 사과그림을 가지고 홉스와 로크의 자연 상태와 리바이어던까지 연결시켜 비교 설명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자코모 발라의 가로등과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이라는 미래주의 작품과 파시즘 이야기도 흥미롭다. 미래주의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동양 철학의 자연주의를 가지고 하는 혜시와 장자의 배틀 에피소드도 매우 흥미 진진 하다. 대낮 같이 밝은 발라의 가로등과 대비되는 여유로움의 상징으로 달을 소재로 한 어몽룡의 월매도가 오만 원권 지폐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평소에 클림트의 그림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클림트의 그림과 정의에 관한 파트가 가장 인상 깊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 천정화를 그리게 된 클림트는 교수들에게 많은 비난과 조롱을 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빈 대학으로부터 다시 요청되어서 클림트의 그림이 걸렸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디스 슈클라는 하버드 정치학과 최초의 여성교수로서 거침없이 핵심을 찌르는 똑 부러지는 성격이다. 슈클라의 주장은 정의라는 모호한 개념을 쌓기 위해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허송세월하지 말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학살, 야만 같은 현실적인 공포부터 제거하자고. 모호한 ‘선’ 보다는 ‘악’을 제거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클림트의 천정화에 나타난 이념과 일맥상통한다.
‘자유를 위해서는 공포에 시선을 두어야 하듯 철학은 모호함을 통해, 의학은 죽음을 통해, 법과 정의는 죄와 불의를 통해 그 본질이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다.’
그 뒤로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파울 클레와 뭉크-의 작품을 비롯한 많은 미술작품이 동서양 사상과 맞물려 전개된다. 황지우 시인의 시와 드라마 스카이 캐슬 그리고 유아인 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들도 여기저기서 불쑥 불쑥 튀어나와 장단을 맞춘다.
마지막 장에서는 처음에 시작했던 니체로 다시 돌아온다. 이부분에 등장하는 그림은 펠릭스 발로통의 ‘공’ 이라는 작품인데 처음 본 이 작품에 오랜 여운이 남는다. 이 그림을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 나오는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 위버멘쉬에 비유해서 해석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부분을 정리하며 글을 마친다.

“아이는 바람처럼 가벼워 보인다. 짐을 내던진 사자처럼 홀가분하고 가벼워 보일 뿐 아니라 공을 쫒아 경쾌하게 뒤고 있다. 순진무구함, 망각, 새로운 출발, 놀이, 성스러운 긍정. 이것은 니체의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를 떠올린다."

한겨레 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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