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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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에세이에 푹 빠져있다가 갑자기 박완서 별세, 라는 뉴스 속보 알림창이 떠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시는 소중하신 분이 우리곁을 떠나셨구나.
고 박완서씨의 명복을 빌며, 뒤늦은 후기를 쓴다.


아마도 이책이 박완서의 마지막 에세이가 되겠지. 항상 그런건 아니지만 생애를 마감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은 더 소중하고 더 빛나보인다.
삶을 마감할 준비를 하며 나의 어린시절을 추억하고 내 삶을 지나간 소중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이 글을 쓴건 아니었을까.
나도 언젠가 삶의 마지막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지나간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글을 쓰고 싶다.  

 

 막 대학 문턱에 들어선 초년생에게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공간이었고, 만 권의 책이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었고, 지적 갈증을 축여줄 명강의였고, 사랑과 진리 등 온갖 좋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로 나만의 아름다운 비단을 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 베틀에 앉아 내가 꿈꾸던 비단은 한 뼘도 짜기 전에 무참히 중턱을 잘리고 말았다.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지나간 삶의 생애가 어떻게 항상 아름답기만 할까.

작가들의 생이란 왠지 특별해서 아주 예술적으로 미화되거나 아니면 아주 슬프게 그려질거라고, 그래서 현실과는 먼, 어느 이상속에서 그들만의 세상이 있지 않을까 내심 생각해보았으나, 그 역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참담했던 현실에 대한 기억을 잊기 위한 방황을 참으로 솔직하고 담담하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 겨울의 추위가 냉동보관시킨 기억은 마치 장구한 세월을 냉동보관된 식품처럼 썩은 것보다 더 기분 나쁜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건 기억이 아니라 차라리 질병이다. 기억 중 나쁜 기억은 마땅히 썩어서 소멸돼야 하고, 차마 잊기 아까운 좋은 기억이라 해도 썩어서 꽃 같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

 

 우리가 가진 크나큰 축복 중 하나가 건망증이라는 말처럼, 기억은 어쩌면 기억 그대로 간직해야 하는 것이기보다는 소멸하거나 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 맞나보다. 적어도 생을 마감하기전에는. 누군가를 용서하고. 앙금같은 기억들을 씻어낼수 있기를. 나도 남몰래 희망해본다.

   

바쁜 사람의 휴식을 흔히 충전한다고 말한다. 휴식은 어디까지나 일을 위해 있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요즘의 나를 바라볼 때 아무것도 안하는 동안의 달콤한 충족감을 줄기기 위해 일을 하는 것 같다. 일로 충전을 안하면 휴식은 심심하고 무료한 시간밖에 안 될 테니까.

 

 <내 생애의 밑줄>의 한구절. 자신만의 추억이 담긴 책에 잊지 않기 위해 꼭꼭 밑줄을 그어놓는 것처럼, 나도 이렇게 주옥같은 작가의 말을 꼭꼭 적어둔다.
내가 표현하지 못하는 걸 표현해주는 사람이니까.
지금의 휴식을 달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이게 솔루션이야>라고 속삭이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 지구상에서 나에게 허락된 시간도 이제 골인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비슷한 기억을 되풀이하며 어디로 가고 있을 뿐 처음은 없다는 사실 정도이다.

 

 이 글을 쓸때 <삶의 골인> 지점에 가까워져 생의 소풍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고인의 힘은 그렇게 위대한가 보다. 

  

...........나이 드는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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