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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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로맨스로 가득하길 바라지만 우리의 삶은 대체로 블랙 코메디에 가깝다. 이 책이 우리집에 도착했을 때 나와 남편은 백일을 갓 넘은 아기의 이앓이와 잠투정에 맞서 아이를 재우려고 여러차례 시도하며 진이 빠진 상태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책 제목이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라는 강렬한 제목의 책을 보고 우리는 그래,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될 거야- 하고 말했다.

86년 아시안게임을 시청하다 나를 낳은 엄마는 내 이름을 '승리'라 지었다. 열다섯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 이제는 눈앞이 어둠으로 가득하지만, 엄마가 지어준 이름 덕분에 나는 대한민국의 승리로서 신나는 일을 찾아 오늘도 어둠 속을 헤매 다닌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이력과 책에 끼여있는 편집자의 정성어린 편지를 읽으며 나는 벌써부터 책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의 삶이 으레 그렇듯 언제나 행복하고 기쁘기만한 것도, 슬프고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은 잊을만 하면 번갈아가며 우리를 찾아온다. 그렇기에 늘 어둠 속을 걷고 있지만, 신나는 일을 찾아 헤매는 발걸음은 그럼에도 항상 무겁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씩 그녀의 인생에 가까이 가기 시작했다.

📖 서행하던 택시가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통제구간을 빠져나온 것이다. 택시는 목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일이 끝난 뒤 김 선배에게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만의 별과 불꽃을 꺼내볼 수 있었노라고. 내 안에 살아 있는 별과 불꽃들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여전히 아름답고 생생하게 잘 있더라고, 말해야겠다. P. 20.

📖 관광지에서 마주친 한국인 할머니들이 걱정을 담아 우리에게 건넨 말은 이렇다.
"앞도 못 보면서 여길 힘들게 뭐 하러 왔누!"
보이지 않아도 보고 싶은 욕망은 있다.
들리지 않아도 듣고 싶은 소망이 있다.
걸을 수 없어도 뛰고 싶은 마음은 들 수 있다.
모든 이들은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비록 제한적인 감각이라 해도 나는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으며 낯선 바람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으로 행복하다면 여행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P. 49-50.

📖 외조부가 없는 고향은 낯선 언어로 듣는 익숙한 노래처럼 어색하고 괴기스러웠다. 외조부가 지키지 않는 고향은 더는 본향이라 할 수 없었다. 순간 깨달았다. 인간의 귀소본능이란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P. 60.

📖 수미씨를 돌려보내고 샤워를 길게 했다. 에어컨을 켜고 인공지능 스피커로 파도소리를 재생시켰다. 창 앞에 의자를 가져다두고 진한 커피를 마셨다. 습관처럼 창밖을 내다본다. 내게는 밤과 낮의 경계가 없다. 단지 시간으로 밤과 낮을 구분할 뿐이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 했던 어떤 선배는 밤에는 밤의 냄새, 낮에는 낮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나는 비웃었다. 냄새는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니라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P. 158.

📖 나의 새로운 장래희망은 한 떨기의 꽃이다. 비극을 양분으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뻗고, 비바람에도 결코 휘어지지 않는 단단한 줄기를 하늘로 향해야지. 그리고 세상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품은 꽃송이가 되어 기뻐하는 이의 품에, 슬퍼하는 이의 가슴에 안겨 함께 흔들려야지. P. 238.

잠자는 사자, 노루를 사랑한 아저씨, 조제를 닮은 숙희씨, 운동화 할머니, 끝까지 한 방!을 외치는 영웅, 유령남매, 돼지코, 그리고 후천적 장애를 가지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까지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인생을 거쳐간, 혹은 앞으로 만나게 될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내가 만나온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제는 그리움이 된 사람도, 여전히 나와 함께 오늘을 견뎌내는 사람도 모두 내게는 고마운 사람.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이 저릿해지는 기분과 함께 느꼈던 냉정과 열정, 나는 누군가의 부끄러움과 자랑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과 같은 무수한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좋은 에세이를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은 책이다.

* 본 서평은 달 출판사로부터 블라인드 서평북을 지원받아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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