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판매 주식회사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2
로버트 셰클리 지음, 송경아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작년인가에 읽었었는데 얼마 전 다시 꺼내 읽었다. 자기 전에는 추리소설을 잘 안 읽게 된다. 나중에 가면 졸려서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리소설 읽을 때의 그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을 쪼개 즐기고 싶을 때는 SF 쪽을 택하는 일이 많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대부분 동서추리문고와 아이디어회관 SF문고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양대 장르가 우리나라에 뿌리 내리도록 한 가장 강력한 요인이다. 무엇보다 '장르' 자체에 대한 눈을 열어주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래서 '추리' 또는 'SF'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된 데는 이 두 문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둘 다 방대한 목록이 특징이었고 이것은 지금도 따라갈 시리즈가 없다. 물론 일본 문고판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긴 하다. 그러나 국내에 이와 필적할 만한 시리즈가 있었던가? 그리고 이만 한 영향력을 가졌던 시리즈는? 이 두 문고는 우리나라에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지금 그 씨앗이 나무로 자라나고 있다.

  아이디어회관의 큰 미덕 중 하나는, 목록의 뒤쪽에 정말로 희귀한 국내 창작물들이 몇 권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불사판매주식회사>는 아이디어회관 문고의 목록에 있었다. 아직도 그 표지가 기억난다. 바로 소설 속에 나온 회사 광고 포스터와 같은 그림으로, 부서진 자동차에서 거대한 손이 한 사람을 끄집어내는 그림이었다. 왠지 무시무시한 그림이었기에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정작 난 그때 이 작품을 읽지 못했다. 100권이 넘는 목록인지라 초등학생으로서는 전부 접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어린이회관 도서실에서 읽은 것, 기회가 되는 대로 샀던 몇 권, 학급문고에서 읽은 것 등이 전부였다. 2000년쯤인가에 '직지 프로젝트'라고 해서 SF 팬들에 의해 스캔본이 올라와 몇 권을 다시 읽거나 새로 읽을 수 있었고 그때서야 이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행책에서 새로이 완역된 이 책의 처음에는 역자 송경아 씨의 해설이 실려 있다. 어째서 해설을 맨 앞에 실었는지 모르지만, 책의 결말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결말을 알지만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송경아 씨는 아이디어 회관 문고를 언급하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SF 장르를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유치한 책이라고 보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게 된 원흉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조잡한 요약본을 그대로 베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이 문고 때문에 이런 작품이 알려졌으니 100퍼센트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솔직히 나는 분노했다. 아동판은 글자 그대로 아동을 위한 것이다. 사변적이고 복잡한 원작을 이해하고 즐길 수 없는 아동이 장르문학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것이다. 비판하려면 완역판이 나오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비판해야지 어째서 그나마 수많은 어린이에게 SF를 읽는 설렘을 가르쳐 준 아이디어회관 문고를 비판하는가. 이건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이야기가 아닌가.

  SF는 추리소설보다 읽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장르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소설 요약판은 존재한다. 나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요즘 유행하는 전작주의와 완역주의에 대해 때로 좀 지나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물론 당연히 모든 것이 갖추어진 그대로가 좋지만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모든 문장을 빠뜨리지 않고 번역했어도 그것이 어색한 직역체라면 그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 보면 빠뜨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다 된 거라고 만족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내 또래의 사람들은 아이디어회관 문고를 읽으면서 무한한 경이의 세계를 경험하고 희열을 느꼈다. 그렇지만 <비글 호의 모험>을 읽으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국인 학자가 실제로 한국인이 아닐 가능성을 모르진 않았다.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이게 있는 그대로의 그 소설이 아닐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던 것처럼. 송경아 씨는 설마 몰랐던 걸까? 

  한국에서 'SF=유치한 아이들 놀이'라는 공식은 아이디어회관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송경아 씨는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디어회관 이전에도 SF 문고는 상당히 많았다. 비록 축약판이지만 아이디어회관의 목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뭐랄까, 매우 암울한 작품이 많아서 읽다 보면 우울해질 정도였다. 베리야예프의 그 비관적인 <양서인간>이나 <머리만 살아있는 도우엘>, 그리고 지금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합성인간 이야기를 다룬 작품 등. 오히려 이 시리즈를 읽으며 SF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문제는 이런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지 책에 있지 않다. 만약 이 시리즈가 '본격 SF 장르소설선'을 표방하고 냈다면 책임을 지울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동을 대상으로 한 문고본으로 나왔는데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건가. 이 무슨 해괴한 망발인가. 그렇다고 추리소설처럼 결말을 알고 읽으면 매력이 반감되는 장르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과학'은 언제나 '꿈'이었다. 서양식 학문을 등한시하여 후진국 대열에 빠진 자신을 한탄하며 무조건적인 '개발'만을 이상화하던 사회에서 '과학'은 해저농장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공중을 떠다니는 자동차로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마법으로 보였고 모든 어린이들이 꿈꾸는 세계였다. 따라서 SF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시대에 과학이 보여줄 수 있는 암울한 사회 따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과학은 적을 물리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힘이어야 했다. 따라서 SF의 세계 역시 선악 구도가 분명하고 단순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졌고, 힘들고 초라한 현실을 그리지 않는다면 허무맹랑하고 대책 없이 낙관적인 공상 세계를 그려야 하는 만화가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어린 나이에도 민망한 졸작들을 양산했다. 

  어릴 때 본 무명만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우주인은 무조건 지구를 정복하려 드는 악당이었고 고래나 코끼리 같은 동물들은 로봇이나 주인공의 초인적인 힘을 시험하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죽여버리는 실험 대상일 뿐이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가졌던 총체적인 문제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과학은 '꿈'이었고 그 꿈이 실재가 아님을 깨달을 때 꿈은 빛을 잃는다. 그것을 경험한 우리나라의 어른들은 '꿈' 자체를 경멸했다. 우리나라에서 '꿈'은 '경제'와 '권력'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SF 장르는 제아무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고 해도 맥을 못 추는 이유가 되었고 추리소설, 무협지, 판타지 등의 장르소설이 힘을 얻고 있는 지금도 SF만은 유독 여전히 마이너 중의 마이너 장르로 남아 있는 이유가 되었다. SF 영화가 성공하는 예는 오로지 주인공들이 이상한 우주복이 아닌 현실의 양복을 입고, 광선검이나 광선총이 아닌 쌍권총을 휘두르며 주먹과 발차기로 적을 무찌르는 경우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장르가 경제소설과 역사소설인 이유이다. 

  나는 어떤 책이든 읽은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릴 때 억지로 읽어야 했던, 최악의 종이질을 자랑하던 반공도서마저도. 어떤 이는 최악의 책에서도 자기만의 보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으스대듯 어떤 책이 우리나라 독서계를 망쳤다고 비아냥거리는 인간을 싫어한다. 어쩌면 내가 어려서부터 SF를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절대로 SF 팬덤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쪽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이 떠오른다. 

    제목에는 <불사판매주식회사>를 적었으면서 이 책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매우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며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러나, 스캔본으로 읽은 아이디어회관의 책에 없었던 무언가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두 번째 읽는 것이지만 어릴 때 읽은 고전과 뼈대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송경아 씨의 '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라는 것은 아시모프의 장르에 충실한 그것과는 다르다. 어디서나 인정받는 문학성이라는 것이다'(이것은 내가 대충 요약한 이야기다)라는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아이디어,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미래 디스토피아의 상은 대단하나 이것은 장르의 특성에 입각한 장점이 아닌가.

  주인공이 계속 다른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자기 전문 일을 맡지 못하고 부수적인 일만 하는 인생에 얽매이는 아이러니 같은 것은 좋다. 그러나 그가 보는 미래 사회는 매우 평면적이고 주변 사람들도 아무 개성 없이 플롯을 이어가는 역할에만 충실하다.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이들이 사실은 좀비와 다를 바 없다. 장르문학을 넘어서는 찬사를 받으려면 뭔가 조금 더 있어야 한다. 완역본이라지만 나는 역시 또 하나의 축약본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이것이 나쁜가? 왜 이래서는 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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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카, 짖지 않는가 미스터리 박스 2
후루카와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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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33회 나오키 상 후보작, 2006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7위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나온 작품이다. 그러나 추리소설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장르일까? 딱히 말하기가 어렵다.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이 책은 '개'의 역사이다. 이것이 이 책의 특징을 가장 잘 말해주는 표현이다. 

  이 작품은 두 가지-정확히 말하면 세 가지 관점에서 전개된다. 하나는 개의 시점, 하나는 '대주교'의 시점, 다른 하나는 스트렐카의 시점이다. 그렇지만 세 번째는 스트렐카뿐 아니라 앞의 두 시점 외의 모든 사람의 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의 이야기는 1940년대부터 시작한다. 2차 대전 당시, 알류산 열도의 한 섬에 주둔한 일본군이 미군의 공격을 받고 철수한다. 일본군이 키우고 있던 군견 네 마리가 버림받아 남는데, 이들은 혈통이 좋고 충성심이 강한 개들이었다. 그러나 주인에게 버림받은 후 혼란에 빠지고 다시 들어온 미군 손에 키워지다가 각기 미국, 러시아 등으로 퍼지게 된다. 

  이들은 많은 후손을 남겼고 그 후손들은 또 각기 다른 개들과 교배하며 우수한 혈통과 야성의 본능, 잘 훈련된 군견으로서의 기능을 갖춘 개들로 자라난다. 그들은 각기 이름을 가졌고 인간의 손에 키워지거나 야생에 떠돌며 질긴 잡초처럼 살아간다. 이 책은 이들 혈통의 연대기를 매우 끈질기게 그려낸다. 제각기 가지를 치며 다른 이야기로 가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로 합치는 등, 매우 장대하고 복잡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주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한 노인의 이해할 수 없는 암살 행각을 보여준다. 그는 이미 70에 가까운 노인이지만 혼자 몇십 명의 마피아를 학살하는 등의 괴력을 갖고 있다. 그의 행각은 무정부주의적인 암살 행위와 함께 개를 훈련하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러한 역사는 2차 대전 이후 소련, 미국, 중국의 정치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작가의 주장에 의하면 개의 역사가 바로 이들 냉전 시대의 역사인 것이다. 우주로 올라간 최초의 생물 라이카는 흐루시초프의 신념의 산물이었고 지구상의 수많은 개의 역사를 바꾼 존재였다. 그뿐 아니라 정치적 권력 다툼과 정책 변화의 와중에서도 라이카는 초기 소련의 이념을 일깨워주는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몇십 년에 걸친 개들의 끈덕지고 피로 얼룩진 투쟁사와 초기 공산주의 이념을 가슴에 간직한 냉전 시대 유물 인간의 투쟁사가 한 점으로 모이는 것이다. 사실이 어떠하든, 참신한 시각으로 현대사를 재구성한 작가의 노력은 가상하다. 

  수많은 폭력과 잔혹한 살인 장면(묘사가 잔혹하다는 뜻이 아니다)으로 점철되어 있으나 특별히 스릴러나 서스펜스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너무나 진지한 현대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술방식은 해설에 나와 있듯 매우 경건한 서사시에 가깝다. '전장의 개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지만, 이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전장의 개들'을 그리고 있다. 2차 대전, 베트남 전쟁, 동남아와 동유럽, 중국, 한반도의 여러 전쟁의 한복판에서 인간에게 이용되다 버림받고 죽어가는 개들의 이야기이다. 
 

  다 읽고 나면 기묘한 감동이 남는다. 하지만 그 정체를 확실히 알기 어렵다. 작품 자체가 매우 모호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탓이다. 개들의 심리를 자세히 그리는 반면 인간의 심리는 매우 불친절하게 그린다. 하지만 오로지 생존본능과 모성본능만으로 온갖 역경을 헤쳐가는 개들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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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서브 로사 1 - 로마인의 피 로마 서브 로사 1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역사 추리소설의 붐도 이제 한풀 꺾인 듯하다. 실제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재출간된 이후 반짝했던 관심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같은 팩션과 뒤섞이면서 좀 심한 거품이 불었었는데 이제 그 거품도 많이 걷힌 것 같다. 오히려 국내 역사물은 워낙 국내 역사소설을 선호하는 독자들 때문에 그럭저럭 명맥을 이어가는 듯하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외국 역사 추리소설 중에는 물론 수작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공급의 과잉이 그런 작품들의 가치를 다소 바래게 한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역사추리소설과는 성격이 다른 팩션이 경계 구분 없이 뒤섞여 독자들이 질리게 되었고 팔코 시리즈나 환관 야심 시리즈 등이 계속 나올 것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간된 술라 독재관 시절부터 카이사르의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방대한 시리즈 첫 권이 나왔다. 총 13권 정도의 책이 나와 있으니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뗀 셈이다.  

   로마 유일의 사립탐정이라 할 만한 '더듬이' 고르디아누스는 유능하고 원칙주의자인 젊은 변호사 키케로의 의뢰를 받는다. 자기의 부친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 농부의 무죄를 증명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장차 로마의 재목이 될 젊은 귀족들과 고르디아누스의 기묘한 팀이 결성된다.   

   사건을 파고 들어갈수록 고르디아누스는 거대한 악의 근원을 발굴해 내게 된다. 그리고 끔찍스러운 폭력의 자취를 발견하고 그 자신이 몇 차례나 살해당할 위험을 겪는다.  

   그리고 막판에 가서야 그 이면에 담긴 추악한 진실과 맞닥뜨린다. 이 반전은 미스터리의 측면에서 보면 다소 평이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충격은 단순한 의외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으로 큰 울림을 전해준다.

    작가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어쩌면 LA의 뒷골목을 로마의 뒷골목으로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고르디아누스는 귀족의 의뢰를 받아 행동하지만 그 자신은 아무 힘도 없는 평민으로서 핏자국이 선연한 뒷골목을 헤매며 진실을 더듬어 간다. 그가 보는 로마의 이면은 가진 자들이 마음대로 남의 재산과 목숨을 빼앗는 권력 중심 사회 그늘에서 신음하면서도 비겁하게 가냘픈 목숨줄을 이어가는 서민들로 가득 차 있다.  고르디아누스는 이런 모습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귀족들의 손발이 되어 움직여야 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   

   그러나 '비열한 거리를 지나면서도 그 자신은 타락하지 않는다'는 챈들러의 경구처럼 고르디아누스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진실과 악에 직면해서도 인간다움을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것은 챈들러 등의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통과 통하는 것이다. 사실 챈들러보다는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와 정서적으로 닿아 있다. 고르디아누스는 쿨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잔정을 주고 대화를 나누려 애쓰는 인물이다.  

   '당시의 사회상을 손에 잡힐 듯 보여준다'는 찬사는 역사추리소설에 언제나 따라 붙지만, 이 작품은 그런 구태의연한 찬사를 넘어선다. 문장은 아름답고 인물들은 매우 인상적이며 대화는 재치있다. 어떠한 선입견을 배제하고도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수많은 사건들이 매우 스피디하게 발생하며 미스터리적인 면도 꽤 강하다. 단순히 당대 사회상을 고려하여 사건을 배치했다기보다는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보편적인 사회적 모순을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읽어본 중 최고의 역사 추리소설이라고 극찬하고 싶지만, 실제로 역사 추리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여진다. 아무튼 손을 놓을 수 없었고 막판으로 갈수록 흥분이 고조되었던 경험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특히 마지막 한 줄의 대사는 숨 막힐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몇 년 전 로렌스 블록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의 마지막 대사가 격찬을 받은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로마 서브 로사 1>의 이 마지막 대사는 그것을 능가할 정도의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30대의 젊고 혈기왕성한 고르디아누스가 시리즈 초중반에서 벌써 노인이 된다는데 그 이야기만 듣고도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노인이 되어 더욱 지혜롭고 관대해졌을 고르디아누스의 활약담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북하우스의 엘리스 피터스 '캐드펠 수사 시리즈'처럼 고집스럽게 전권을 다 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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