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서브 로사 1 - 로마인의 피 로마 서브 로사 1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역사 추리소설의 붐도 이제 한풀 꺾인 듯하다. 실제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재출간된 이후 반짝했던 관심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같은 팩션과 뒤섞이면서 좀 심한 거품이 불었었는데 이제 그 거품도 많이 걷힌 것 같다. 오히려 국내 역사물은 워낙 국내 역사소설을 선호하는 독자들 때문에 그럭저럭 명맥을 이어가는 듯하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외국 역사 추리소설 중에는 물론 수작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공급의 과잉이 그런 작품들의 가치를 다소 바래게 한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역사추리소설과는 성격이 다른 팩션이 경계 구분 없이 뒤섞여 독자들이 질리게 되었고 팔코 시리즈나 환관 야심 시리즈 등이 계속 나올 것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간된 술라 독재관 시절부터 카이사르의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방대한 시리즈 첫 권이 나왔다. 총 13권 정도의 책이 나와 있으니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뗀 셈이다.  

   로마 유일의 사립탐정이라 할 만한 '더듬이' 고르디아누스는 유능하고 원칙주의자인 젊은 변호사 키케로의 의뢰를 받는다. 자기의 부친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 농부의 무죄를 증명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장차 로마의 재목이 될 젊은 귀족들과 고르디아누스의 기묘한 팀이 결성된다.   

   사건을 파고 들어갈수록 고르디아누스는 거대한 악의 근원을 발굴해 내게 된다. 그리고 끔찍스러운 폭력의 자취를 발견하고 그 자신이 몇 차례나 살해당할 위험을 겪는다.  

   그리고 막판에 가서야 그 이면에 담긴 추악한 진실과 맞닥뜨린다. 이 반전은 미스터리의 측면에서 보면 다소 평이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충격은 단순한 의외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으로 큰 울림을 전해준다.

    작가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어쩌면 LA의 뒷골목을 로마의 뒷골목으로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고르디아누스는 귀족의 의뢰를 받아 행동하지만 그 자신은 아무 힘도 없는 평민으로서 핏자국이 선연한 뒷골목을 헤매며 진실을 더듬어 간다. 그가 보는 로마의 이면은 가진 자들이 마음대로 남의 재산과 목숨을 빼앗는 권력 중심 사회 그늘에서 신음하면서도 비겁하게 가냘픈 목숨줄을 이어가는 서민들로 가득 차 있다.  고르디아누스는 이런 모습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귀족들의 손발이 되어 움직여야 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   

   그러나 '비열한 거리를 지나면서도 그 자신은 타락하지 않는다'는 챈들러의 경구처럼 고르디아누스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진실과 악에 직면해서도 인간다움을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것은 챈들러 등의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통과 통하는 것이다. 사실 챈들러보다는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와 정서적으로 닿아 있다. 고르디아누스는 쿨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잔정을 주고 대화를 나누려 애쓰는 인물이다.  

   '당시의 사회상을 손에 잡힐 듯 보여준다'는 찬사는 역사추리소설에 언제나 따라 붙지만, 이 작품은 그런 구태의연한 찬사를 넘어선다. 문장은 아름답고 인물들은 매우 인상적이며 대화는 재치있다. 어떠한 선입견을 배제하고도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수많은 사건들이 매우 스피디하게 발생하며 미스터리적인 면도 꽤 강하다. 단순히 당대 사회상을 고려하여 사건을 배치했다기보다는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보편적인 사회적 모순을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읽어본 중 최고의 역사 추리소설이라고 극찬하고 싶지만, 실제로 역사 추리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여진다. 아무튼 손을 놓을 수 없었고 막판으로 갈수록 흥분이 고조되었던 경험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특히 마지막 한 줄의 대사는 숨 막힐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몇 년 전 로렌스 블록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의 마지막 대사가 격찬을 받은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로마 서브 로사 1>의 이 마지막 대사는 그것을 능가할 정도의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30대의 젊고 혈기왕성한 고르디아누스가 시리즈 초중반에서 벌써 노인이 된다는데 그 이야기만 듣고도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노인이 되어 더욱 지혜롭고 관대해졌을 고르디아누스의 활약담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북하우스의 엘리스 피터스 '캐드펠 수사 시리즈'처럼 고집스럽게 전권을 다 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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