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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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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사랑한 게 언제였을까. 사랑이란 단어가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천명관의 신작소설 <고령화 가족>은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한 막장 가족의 초콜릿상자와 같은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충무로의 낭인으로 떠도는 영화감독 나(오인모)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낭떠러지 끝에서 몸을 날리느냐, 아니면(죽기보다 싫지만)엄마의 집에 얹혀사느냐.

만약 내가 그였다면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

 

인모는 낡고 종이가 누렇게 변색된 헤밍웨이 전집을 읽으며 엄마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그 후 이혼한 여동생 미연과 조카 민경까지, 거기에 삼 년째 눌어붙어 있는 전과 5범의 형 한모(오함마), 이렇게 엉겁결에 재구성된 가족의 평균 나이는 사십구 세였다. 언젠가부터 엄마에게 활기가 느껴졌고 고기가 빠짐없이 상 위에 올라왔다. 이 대목에서 엄마가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 사람은 어려울수록 잘 먹어야 된다. (p. 59)

 

이는 바로 엄마의 마음일 것이다. 세상에 나가 무참히 깨지고 돌아온 자식들에게 다시 그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을 주기 위해 질리도록 고기를 해 먹이는 모정은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아무리 마이너리그 중의 마이너리그, 인생의 패배자들만 모아놓은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가족은 소중한 것이며 어머니에게 있어 자식은 모두 다 안쓰럽고 귀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천명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고령화 가족>은 엄마를 위한 소설이기도 하다. ‘엄마’하면 바로 떠오르는 소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이다. 두 작품 모두 가족과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바라보는 시선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엄마를 부탁해>가 전통적인 가족,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이 책은 좀 더 현실적이고 파격적인 가족상을 보여준다.(마치 한 편의 블랙 코미디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삼류 막장드라마와 비슷한 장치도 소설 곳곳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불길하고 우울한 유머의 끝에 ‘희망’이라는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흡사 판도라의 상자처럼 말이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다 사연을 갖고 있다.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형, 성질 좀 있는 조카, 과거를 알 수 없는 미용사, 마지막 사랑에 불을 지피는 엄마 등등…….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처럼 해체되고 또한 뒤섞인 이 인물들을 보며 우리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할 것이다.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박장대소하는 시청자마냥. 소설의 인물들은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삶에 있어서 사랑이 중요한 요소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주인공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날 밤 나는 옆에서 오함마가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한 게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지만 마치 누군가를 단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사랑이란 단어가 낯선 외국어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래, 마침내 나는 괴물이 되고야 말았구나!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술에 찌들어 사는 동안 어느 틈엔가 메마르고 사랑을 믿지 않는 괴물……. 그게 바로 마흔여덟에 발견한 나의 모습이었다. (p. 91~92)

 

최악의 사태를 뜻하는 스페인어 ‘살라오’ 영원히 해독되지 않을 암호가 남아 있어도, 집구석에 멀쩡한 사람이 없어 보여도 정말 최악의 사태는 아니다. 가족과 희망, 그리고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다. 천명관을 희대의 이야기꾼이라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가족, 희망 같은 평범한 주제를 평범하지 않게 서술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고령화 가족>을 읽는 동안 들었다.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 본인의 경험 때문인지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소설은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각 장의 제목들 중에는 영화제목도 있다.)

 

이 <고령화 가족>은 복잡하고 미묘하다. 인상적인 부분이 많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거의 마지막 부분이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p. 286)

 

흔히들 삶을 연극에 비유하곤 한다. 삶이 연극이라면 우리 각자는 주연배우인 셈이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나는, 우리는 삶이라는 거대한 연극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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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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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당한 도시의 폐허를 관통하는 도로를, 미군과 하얀 관의를 입은 소녀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는 광대하게 느껴지는 어두운 실내에 앉아 있던 소녀가 일어서서 걷는 모습이 비치고 있다. 소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한 여인의 삶에 대한, 아니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우리 모두에 대한 소설이다. 세월이 흘러 소녀가 여인이 되고 자신이 미처 몰랐던 비참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고통은 실체를 드러낸다. 이것은 아픔의 기록이자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노인이 언덕에서 뒤를 돌아다본다. 그의 눈에 세련된 사람의 걸음걸이가 보였다.

노년의 곤경에 빠진 채 괴팍하게 고립되어 있는 나는 바로 이 소설 <애너벨 리>의 저자이자 등단 50주년을 맞은 오에 겐자부로이다. 친구 고모리의 등장으로 나의 기억은 3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여배우 사쿠라를 만났을 때 그는 은사를 잃은 슬픔이 사라져 있음을 깨닫는다. 고모리는 사쿠라와 함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영화로 제작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에게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세 사람의 협력 관계가 형성되면서 아픔과 치유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오에 겐자부로의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오에의 다른 작품들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우리들의 상처를 볼 수 있고 그것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분주하게 뛰어다녔지만 그 어떤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영화 제작은 실패한다. 아역배우에서 출발해 세계적인 스타가 된 사쿠라였지만 그녀는 고통과 악몽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영화에 정열적으로 몰두하지만 결국 영화는 좌절되고 자신이 후견인이자 남편이었던 데이비드의 끔찍한 장난에 당했었다는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조용히 절규한다. 그 아픔은 타인이 대신할 수 없고 자신만이 그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고양이가 제 상처를 핥듯이.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야 사쿠라의 상처는 치유되고 영화는 완성이 된다.

 

이 소설은 치유의 소설이다. 아름다운 소녀의 혼령을 위무하는, 모든 이들을 위무하는 의미를 가진 소설이다. 고모리는 사쿠라 등에게 ‘애너벨 리 영화’ 무삭제판을 보여준 후 이렇게 말한다. 격양된 얼굴을 드러내면서.

 

“끝까지 자네가 봐주어서 다행이야!” 하고 말했다. “분명히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있어, 그러나 영화의 흐름은 상처받은 소녀를 위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어. 뿐만 아니라 소녀는 살아 있지. 자네가 곧잘 쓰는 치유 쪽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이 말에 나는 이렇게 답한다.

 

“영화는 자네가 만든 것이 아니잖아. 그런데 그 억지 논리는 저열하다고 생각해” 하고 나는 말했다.

 

문제와 직면해서 근본적인 치유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모리와 그런 방법은 인격적으로 저열하다고 생각하는 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치유의 옳은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를 모티브로 하여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아름답지만 고통에 시달리는 한 여인의 모습을 새로운 형식으로 탄생시켰다. 아마도 오에였기에 이런 소설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작품의 해설부분에 이런 말이 적혀있다. “<애너벨 리>는 오로지 소설 쓰기만으로 인생을 살아낸 작가가 ‘문학’에 바치는 오마주이기도 하다.” 이 말처럼 <애너벨 리>에는 대가의 흔적들이 요소요소에 보인다. 소설가라는 직업으로 50년을 살아온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총화이다. 늙고 기억력은 쇠퇴했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별과 같은 존재, 오에 겐자부로야말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여러 가지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 독자들은 그 소재들을 발견해가는 과정에서 표면화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읽어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말을 인용할까 한다. 그가 추구하는 문학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 문학의 근본적인 형식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출발해 그것을 사회와 국가와 세계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20세기가 테크놀로지와 교통수단의 가공할 만한 발전을 통해 쌓아온 피해를 묵직한 아픔으로 받아내고 특히 세계의 변경에 위치한 자로서 변경에서 전망할 수 있는 인류 전체의 치유와 화해를 위해 어떻게 하면 예의바르면서도 위마니스트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지 모색해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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