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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필립 로스는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 중 한 명으로 불리는 대가이다. 그의 수상내역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전미 도서비평가협회상을 두 번, 미국의 대표적인 문학상이라 할 수 있는 펜포크너상을 세 번, 그리고 1998년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야말로 필립 로스 자체가 미국 문학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울분’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번역된(개인적으로는 처음 접한)그의 작품이다. 반세기 동안 연마한 거장의 소설을 통해 우리들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의 극찬을 받은 ‘에브리맨’이 한 남성의 일생을 그렸다면 ‘울분’은 질풍노도처럼 갈등했던 한 청춘의 짧은 일기와도 같다. 70대 후반의 작가가 썼지만 ‘울분’은 아주 뜨거운 소설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책을 이렇게 평했다.
청춘의 격정으로 불탈 만큼 여전히 분노하고 동시에 그 격정이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음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현명한 작가로부터 나오는 폭발을 볼 수 있는 소설.
이야기는 ‘나’(마커스)가 뉴어크 시내에 있는 작은 대학 로버트 트리트에 입학하면서 시작된다. 1950년 당시 그의 가족이 운영하던 코셔 정육점(유대인의 율법에 맞는 정결한 고기를 파는 정육점)은 동네에 슈퍼마켓이 생기면서 점차 쇠퇴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지면서 친밀했던 부자 사이에는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마커스는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이 당신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소중한 아이를 세상에 내주어야 한다는 두려운 사실이, 인생의 위험성을 간과하는 아들의 모습이 아버지는 걱정되었을까.
아버지의 감시를 벗어나야 했던 마커스는 집에서 800킬로미터 떨어진 대학 와인스버그로 학교를 옮긴다. 하지만 도피처로 선택한 그곳에서의 생활은 아버지와 함께 살던 때보다 더 괴로웠다. 잠잘 시간에 전축으로 베토벤을 듣는 룸메이트 플러서와 갈등을 빚는다. 결국 다른 방에서 새로운 룸메이트 엘윈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집에서 시작된 갈등은 그를 끈질기게 쫓아왔다. 룸메이트들과 아버지, 그리고 여자 친구 올리비아까지……. 문제는 쌓여만 간다. 그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하고 자문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문제들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다만 주인공이 그것을 깨닫기에는 너무 젊었고 또 너무 일렀다.
나는 엘윈을 이해하지 못했다. 플러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올리비아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p. 85)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이해부터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당한 말이긴 하지만 솔직히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다. 더구나 19살 청춘에게 그러기를 바란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청춘은 질풍노도의 시기, 그야말로 혼란을 겪으며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시기이다. 마커스가 문제투성이가 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일종의 성장통이었다.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는 게 인생이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마커스는 결국 함정에 빠지고 만다.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받아온 여자 친구 올리비아가 자살을 기도한데다 임신까지 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자 대학 당국에서는 사건의 원인 제공자로 마커스를 지목한다. 그는 자신이 그 일과 무관함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욕설을 내뱉으면서 폭발하고 말았다.
한마디의 욕설로 인해 정육점집 아들은 퇴학을 당하고 사병이 되어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마커스 메스너 이등병은 스무 살 생일을 석 달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여기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독일 문학의 최고봉 괴테는 “청년은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감동이나 자극을 받기를 원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감동이나 자극을 제어하는데 취약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는 곧 순간적인 감정으로 한 선택이 그릇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필립 로스 또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p.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