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몽스트르 Le Monstre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박철호 옮김 / 제철소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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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쁘게 만들어져서 더욱 설레는 책입니다
작품성이야 당연할테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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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나관중 본의 첫 구절인 ‘분구필합 합구필분分久必의 의미대로 중국의 역사는 분열과 통일을 거듭한다. 춘추시대는그 분열의 첫 장이었다. - P190

존왕양이는 주양이尊周라고도 하는데 주나라를 보존하며 오랑캐를물리친다는 것이고, 계절존망은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잇고 끊어짐과 존재하고 망함을 뜻하는데 단절과 멸망을 함부로 결정하지 않았다는것이다. - P193

이들 사상 중에서도 신상필벌과 엄벌주의의 엄격한 법체계를 이용해 빠르게 질서체계를 세우는 수단으로 법가가 그 효과를 인정받았다. 특히 전국시대를 끝낸 진이 채택을 하면서 효과를 검증받아 가장효율적인 통치사상으로 떠올랐다. 뛰어나지도 못했고 촌스럽기 그지없었던 진이라는 학생이 법가라는 빨간펜 학습법으로 전국 수석을 한 셈이다.
이후 중국의 모든 제국들은 유학을 표면적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인 통치수단으로는 법가를 채용하게 되었다. - P206

도편추방제는 오랫동안 아테네의 민주정을 대표하는 제도로 알려져 왔다. 이 제도는 언뜻 보기엔 민주주의라는 이념에 잘 맞는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허점이 많은 제도였다. 흑색선전과 선동으로 얼마 되지 않는 시민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면 얼마든지 왜곡된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P213

AD 21C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었던 벤 버냉키Ben Ber-nanke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경기부양을 위해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겠다고 해서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아테네에서는 2500여 년전에 이미 ‘헬리콥터 페리‘가 있었던 것이다. - P217

춘추오패는 시간 순으로 등장하여 차례로 세를 과시했던 반면 전국칠웅은 한꺼번에 존재하여 난전을 펼쳤다. 종적인 개념과 횡적인 개념의차이이다. 그래서 전국시대는 춘추시대보다 더 대등한 세력들의 헤게모니싸움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치열해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모든 역사서에서 전국시대는 본격적인 약육강식의 시대로 표현한다. - P227

합종연횡은 합종책과 연횡책의 결합으로 후에 종횡가라 하여 제자백가의 반열에 들어가는 사상으로 발전한다. 합종책은진 강성함에서 비롯되었는데 2강이었던 초를 중심으로 6개국이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는 책략이다. 반면 연횡책은 진이 6국의 각국과 하나하나 관계를 맺고 공존하자는 것으로 합종책을 깨뜨리기 위한 책략이다. - P232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순식간에 지나간존재였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제국은 헬레니즘 문화라는 큰 영향력을 남겼다. 알렉산드로스 이후부터 로마에 의해 이집트가 멸망하기까지 300여 년 동안 헬레니즘 문화는 동서양을 융합하고다시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 하나로 간다라 미술은중앙아시아와 중국과 한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양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의 정복은 그리스 문화를 확산시켰고 시각을 세계로 넓혀 수많은 민족이 보편주의를 갖게 되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정복당한 민족은 죽을맛이었겠지만 말이다. - P255

현재 중국 최대 민족인 한족은 한나라가 성립할 시기에 중원의 질서와 문화에 편입되어 있던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집단이다. 한의 카테고리는 결코 혈통이나 DNA의 문제가 아니다. - P271

그렇다면 왜 중국의 대표는 진[China] 이 아니고 한漢일까. 그것은 한이 실질적인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이기 때문이다. 진은 15년 만에 멸망했고, 그기간이 너무나 짧았기에 진의 통치 아래에서 중국인들은 어떠한 소속감도동질성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한, 그것도 전한 200년의 치세 동안 중국은 처음으로 통일되어 안정된 천하를 체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은 중국의 브랜드가 될 수 있었다. 중국인의 의식 속에 이상향은 주, 정신적 고200향은 한漢, 가장 성했던 때는 당으로 자리 잡고 있다. - P272

많은 학자들은 유방이 자신을 제대로 파악한 점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사실 유방은 자기가 별다른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분수를넘지 않고 각 분야에 능력 있는 인재들을 기용했고 그 사람들의 말에 귀를열었다. 스스로 엄청난 용력을 가져 남을 무시했던 항우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던 것이다. - P275

고대로부터 승전국은 패전국의 민중을 노예로 삼거나 재산을 약탈하며 군림했다. 하지만 로마는 패전국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로마의 일원으로 만드는 정책을 펼쳤다. 자치를 인정하고 자존감을 손상시키지 않는전략으로 아군을 만들었다. - P290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시기적으로 적절했고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한마디로 단기적으로는 로마에게 큰 이익을, 장기적으로는 큰 폐단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마리우스는 자신의 개혁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고,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사병처럼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를 독재자로 변질시킨다. 이러한 때에 마리우스의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바로 술라sulla이다. - P347

아우구스투스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예수는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할 때 믿음으로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흔히 로마는 세상을 세 번 정복했다고 말한다. 한 번은 영토로, 또 한 번은 문화로, 마지막한 번은 종교로.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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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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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한계를 자각하고 그 속에서 안주하는 것이 매우 현명한 것인 양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한계짓는 삶은 그 한계성이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데 근원적 아이러니가 있다. - P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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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정Plutocracy이란 이런 와중에 생겨난 것으로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자연스럽게 권력을 거머쥐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돈을 벌면 출마를 생각하고, 가난하면 정치에 관심을 둘 여유조차 없는 현대사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 P148

가장 자유로운 아테네와 가장 엄격한 스파르타 아마도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무식한 도리아놈이라고 업신여겼을 것이고, 스파르타 또한 뺀질뺀질한 아테네가 굉장히 아니꼬왔을 것이다. - P150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은 그리스가 소아시아에 건설한 식민도시들인 이오니아였다. 많은 전쟁이 소소한 영토분쟁에서 시작되는데 이런 영토분쟁은접경지역에 대한 서로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즉동양과 서양의 접경지역이 바로 이오니아였던 것이다. - P166

역사적으로 BC 499년에 일어난 이 반란은 이오니아 회복을 위한 그리스인의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당연히 다리우스 1세는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제국 내 분란을 모조리 잠재운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반란의 원인이 아테네에 있다고 간주하고, 오랜 종양의 근본적인 해결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이다. - P169

나라 팔아먹고도 대대로 호의호식하는 매국노들의 천국인 대한민국의입장에서 본다면 히피아스 정도는 매국노 축에도 못 낄 터이지만 히피아스라는 이름은 그리스를 넘어 서양사 전반에 걸쳐 나라 말아먹은 자의 심벌Symbol로 남아 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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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역사는 오로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해석에 달린 것이기에 ‘좋은‘ 사람이 해석을 하면
‘좋은‘ 역사가 되고, ‘나쁜 놈‘이 해석을 하면 ‘나쁜‘ 역사가 되며, 무엇인가
‘원하는 게 있는‘ 사람이 해석을 하면 역사는 그 의도를 담게 된다. - P23

카데시 전투는 시기가 BC 1308 년에서부터 BC 1274년까지 그 설이 다양하다. 참고로 브리태니커Encyclopaedia Britannica에는 BC 1299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 전투를 위한 준비와 이동, 전투가 끝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는 이집트의 기록에서 실제 전투로 추정되는 시점을 역사가들이 달리 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어찌되었건 카데시 전투는 기록상으로알 수 있는 문명 간에 발생한 최초의 전쟁으로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CLEARNIRE RES세와 히타이트의 왕 무탈리스 2세가 카데시라는 지역을 놓고 싸운 전투이다.

카데시 전투는 나름 기록의 나라인 이집트의 기록에만 의존하여 3000년동안이나 이집트의 드라마틱한 승리로 남아 있다가 20C 초에 히타이트의기록이 발굴되면서 드라마틱한 번복이 이루어진다. 공식적인 결과가 무승부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카데시 전투의 절정 부분은 람세스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통남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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