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마을 간호사들과 고아원 자원봉사자들의 경험이 남아와 여아 출산 수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실제로 많은 외국 언론이 인도의 여아 부족 현상을 영아 살해와 유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길모토는 이 문제를 조사하면서 그런 원인들은 작은 부분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길모토가 현장 조사를 했던 타밀나두의 시골 외곽 지역 말고는 인도인들이 영아를 살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길모토는
"모든 사람이 영아 살해에 관해 이야기했다. 좀 더 감정적인 무게가 실리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실제로 영아 살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타밀나두는 사실 여아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주 가운데 하나였다. 반면 인도의 곡창지대라 여겨지는 부유한 북서부 지역은 출생 성비가 여아 100명당 남아 126명으로 보고되었다. 길모토는 성비 불균형의 진짜 원인이 임신부들에게 널리 알려진 저렴한 성감별법(초음파)을 이용해서 여아를 낙태시키기 때문임을 곧 알게 되었다.
걱정스러운 점은 이런 일들이 기술과 관련 있다는 것이었다. 인도의 편향된 출생 성비가 후진적인 전통 때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물이라는 의미기 때문이다. - P25

길모토는 "이 현상을 대변혁이라고 보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라고 말했다. 몇 년 내에 그런 대변혁이 서아시아와 동유럽에 퍼질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불길한 생물학적 변화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분야들에서 정작 이 문제가 빠져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세계의 성별 문제에 관한 보고서들은 여성의 상태에 관해서는 방대하고 상세하게 다루면서, 여성 구성원이 줄어들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간과한 채 성비 불균형 문제를 완전히 생략했다. 개발도상국의 인구 계획에 자금을 지원하는 유엔인구기금UNFPA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성비 불균형 문제는 성과 생식에 관한 권리를 주창하는 기관들의 관심이나 주요 자선단체의 자금 지원을 받지 못했다. 아시아의 몇몇 열정적인 의사와 보건 관련 종사자들을 제외하면이 문제를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제 파리에 있는 개발연구소IRD의 선임 연구원이 된 길모토는 지난 몇 년간 사람들에게 성비 불균형의 심각성을 알려 그 빈틈을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2005년에 길모토는 아시아에서 과거 몇십 년동안 자연 출생 성비인 100 대 105가 유지되었다면 이 대륙에는 1억 6,300만 명의 여성이 더 살고 있을 것이라고 산출했다. 즉 초음파와 낙태의 조합이 아시아에서만 1억 6천만 명이 넘는 잠재적인 여성과 소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 P26

경제 발전과 여성 발전 간의 관계가 너무나 신성시되어 아시아에서 성 감별이 확산되는 동안 개발도상국의 학자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 P29

라가 부유해질수록 그런 행태가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서울에 있는 한국여성개발원의 사회학자 변화순은 1980년대에 한국에서 성별선택이 성행할 때 이 문제가 지닌 위협이 먼 나라 얘기라고 생각했노라 고백했다. "나는 교육받은 여성이라면 여아를 선호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내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서툰 사회학자였다." 한국은 1996년에 엘리트 국가들의 단체인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할 때까지 편향된 출생 성비를 쭉 유지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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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 변혁기 이론을 여말선초에 적용함으로써 애초의 순수한 의도와 무관하게 영미 학계에서 한국을 중국보다 500여 년 이상 늦춰진 정체된 사회로 이해하게 된 측면이 없지 않다. 당송 변혁기가 동시간대에 우리 역사에서는 10세기 나말여초羅末麗初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동북아시아 전역에서는 당에서 송으로, 발해에서 요로, 신라에서 고려로 전환되는 막대한 사회변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대의 역사적 사실은 왜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고 500여 년이나 떨어진 14세기 말 고려·조선 교체기와 비교되어야만 했을까? 또한 14-15세기 급변기에 세계 제국인 원元의 붕괴로 명과 조선이 각기 향유했던 자국 중심의 문화 운동은 어째서 동시대에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르네상스와 비교하면 안 되었을까? 이의 연장선에서 조선의 18세기 문물제도의 재정비를 동시대 계몽주의시대의 흐름과 비교하지 않고, 굳이 ‘문예부흥文藝復興‘으로 상정하여 서구의 14-16세기 르네상스기와 견주는방식도 과연 그 비교 대상이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다. 이러한 모순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설계해오고 만들어온 역사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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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는 ‘반도사‘로 이해되지 않았다. ‘반도peninsular‘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 근대 지리학의 용어였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국제 관계인 조공朝貢ㆍ책봉冊封 체제에 오랫동안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만들어낸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중국을 타자화하여 ‘지나支那‘로 폄하하고 조선을 대륙에서 분리시켜 협소한 영토라는 인식을 퍼뜨린 것이다. 식민지 침탈을 겪던 중국과 망국의 현실을 목도한 조선의 사람들은 일본의 ‘동양관‘에 길들여졌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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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가 조선시대에서 가장 평이 좋은 세종대나 정조대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은 조선을 정체된 사회로 설정하는 데두 임금이 가장 큰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식은 극우 사이트에서 ‘헬조선hell朝鮮‘이라는 신조어로 재등장하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혐한嫌韓 표현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른바 ‘진보 매체‘에서조차 일본 제국주의잔재라고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비판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 이 용어를 무차별적으로 가져다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극우와 진보 모두가 제국주의시대 잔재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 의식이 없다. 이는 사실 국망 직후 우리 지식인 사이에서 왕정에 대한 비판 의식이 ‘구체제‘ 혹은 ‘봉건 체제론‘으로 귀결되었고, 일본 제국주의 역시 이러한 곱지 않은 시선을 악용하여 ‘조선망국론‘을 조장하였기 때문이다. 진보가 전자를, 친일 성향의 극우가 후자를 각기 계승한 것이다. 결국 양자가 모두 일본 제국의 조선 왕정 부정이라는 대전제를 용인한 셈이다. - P29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표현했는데, 그는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사회의식 내지 시대정신에서 자유롭기 어렵기 때문에 역사가의 평가에 따라 역사가 좌우된다고 여겼다.
실례로 우리에게 익숙한 탕평군주蕩平君主 정조는 1980년대까지만해도 홍국영洪國榮(1748-1781)에게 조정당하는 우둔하고 바보 같은 허수아비 군주 내지 아버지(사도세자)를 잃은 가련한 임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일약 대성하여 정조대왕, 개혁군주, 절대계몽군주 등의 칭호가 붙여졌다. 정조의 삶은 한 번뿐이었으나 우리 사회가 급격한 정치 변동을 겪으면서 역사적 평가마저 바뀌어버렸다. 여기에는 민주화가 큰 시대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동일한 역사상이 ‘현재적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카가 설명한 ‘과거와 현재의 대화‘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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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일용은 『역경 』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의 본질을 말할 때 어진 사람은 선善이라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知라고 한다. 하지만 백성은 매일 그것을 활용하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즉 자각이 없는 대중 쪽이 자각이 없기 때문에 쓸데없는 분별 없이 현실에 밀착해서 생활해간다.
성인이나 부처를 속세의 중생과 동일한 지평에 둔다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당위를 인간의 현실에 근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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