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개척은 고려 초기에 추진되었고, 사실상 평안남도는 영토화에 성공하였다. 공민왕대 남은 과제는 평안북도 일대의 수복, 함경남도·함경북도의 장악이었다. 군진軍鎭의 설치는 고려왕조 500년 동안 일관된 사업이었고,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국경을 늘려가는 정책은 일관되게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작은 반도라고 폄하되었던 우리나라의 국토는 실제로는 고려-조선 1000여 년간 북벌의 꿈으로 왕정시대 사람들이 일군 위대한 업적이었다. - P168

그러나 일본은 처음으로 습격이 아니라 전면전을 기획하였다.
불과 수백 명이 지키던 진관체제하 수군진에 수만 명이 상륙하였고 내지에서 집결지로 향하던 군사들이 차례로 각개격파당하였다. 민간의 인식과 달리 이때 수군진 역시 포를 거두는 수포군收布軍으로 전락해 있지 않았고, 오히려 1년 이상 전쟁을 준비해 지방 백성의 극심한 원망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모두 규정대로 갖추고 있었다. 첫 방어를 맡았던 경상도 내지의 군사 역시 대부분 도망치지 않고 결사적으로 항전하거나 평소의 작전 계획에 따라 집결지로 이동하여 중과부적衆寡不敵인 줄 알면서도 적의 출진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적의 침공(약 15만 명)은 임진년 첫해 9개월 남짓, 그리고 정유재란丁酉再亂 직후(약 14만 명) 첫해 9개월 이내에 불과하였다. 조선군은 전쟁 발발 당시 신립이 집결시킨 군사는 약 8,000명에 불과했으나 1년 뒤 전국에 포진한 병력은 약 17만 명으로 불어났다. 명군 역시 전쟁 기간 동안 약 10만 명이 참전하였다.
조선에서 일본의 전면전을 예상치 못했다고 해도 조선과 명의국력이 더 컸기 때문에 장기전에서 국민국가 개념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던 일본이 승리하기는 어려웠다. 일본이나 유럽은 영주제하에서 전문 군인만 전투하고 농민은 전쟁을 수수방관하는 형국이었다. 물론 일본 역시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농민을 참전시키는 등 총력전 양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나, 이미 조선 수군과 민간 의병·승병이 초창기부터 적을 막아냈고, 그새 조정 역시 관군을 재편하고 명군의 참전을 성사시켜 병력을 확장시켰다. 서구 사회에서 세계대전 이후에나 출현하던 총력전이 이미 동북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일상화되어 있었다. - P173

막심한 피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은 승전으로 기억되었다. 고려시대 여타 전란과 비교해보아도 실제 침공기간은 몇 년 되지 않을 정도로 방어에 성공하였으며, 전후 복구 역시 수백 년이 걸릴 필요도 없었다. 고려는 비교적 규모가 큰 전쟁·전투만 해도 거란전쟁, 여진전쟁, 몽골전쟁, 홍건적 침입, 왜구 침입 등으로 나타나며 수십 년간 지속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에 비해 조선은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었는데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것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 시각이다. 이렇게 임진왜란을 ‘패전‘으로 기억하고 조선 후기 약 300년간을 붕괴의 시기로 설명하는 방식은 일제강점기에 등장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영웅사관하에서 조선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사례로 제시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자성은 중요하지만 ‘기억 전쟁‘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정책에 따른 일방적인 세뇌 교육을 그대로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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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에게 왕의 권능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하여 문무 관료를 통솔하게 하였다. 왕은 재상을 장악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이른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집정대신이 탄생하였다. 정도전의 재상정치는 『주례 』의 총재冢宰(태재)를 염두에 두고 있으나 역설적이게도실제 모델은 영도첨의領都僉議 신돈으로 추정된다. 무신정권과 다른 점은 집정대신은 어디까지 국왕의 대리자로서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돈 역시 왕의 신뢰를 잃자 즉각 실각하였다. - P138

북한의 ‘이밥(쌀밥)‘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그 어원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이성계가 내려준 밥‘으로 이해하고 있다. 곧 회군 직후 추진된 전제 개혁으로 인한 결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조선왕조를 봉건 체제(혹은 구체제)로 비판하는 북한에서 여전히 이 같은 용어가 살아남아 있음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북한은 심지어 국호조차 왕정시대 유산을 쓰고 있다. 그것은 대한제국을 계승한 우파 독립운동가와의 차별화 노선의 결과이겠으나 결과적으로 오늘날 가장 왕정에 가까운 체제를 유지하고있는 곳은 모순적이게도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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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내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인사들조차 모든 권위를 상대화하여 무엇이든 비판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영미권 이론에 경도되어 정작 우리나라나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맥락은 도외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본 제국주의가 개념화하고 극우가 새롭게 재탄생시킨 ‘헬조선‘을 오히려 진보 매체가 적극적으로 사회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보수나 진보를 자칭하는 언론 매체가 일본 극우가 만들어낸 담론을 역사적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각자의 정치적 편향성에 기반하여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퇴행적인지, 과거 지식인 집단으로 자처했던 언론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조선 망국론‘과 ‘화려한 고대사‘라는 쌍생아가 지금까지도 진보·보수할 것 없이 대유행하고 있다. 보수라는 매체가 외세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기획 기사를 싣는 나라, 진보라는 매체가 고대 대제국의 유사역사학을 특집으로 다루는 사회는 실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 P118

지난 100여 년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사회과학의 객관성이란 한번도 문자 그대로의 객관을 유지한 적이 없었으며, 실제로는 제국주의 국가의 주관적 입장을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포장해왔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경우를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일본 내 진보 그룹의 사회과학의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들이 뉴라이트가 되는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마치 서구 근대화를 일본을 통해 배운 이들이 ‘문명개화‘를 내세우며 친일파가 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 P118

‘비판을 위한 비판‘이 자유로운 언론 활동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의 부끄러움은 해당 매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런데도 역사적 맥락은 간과하고 다른 나라의 최종 국경선이근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만 단장취의해서 우리나라에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앞서 제시했듯이 유럽사에서는 일반적인 국가 탄생의 기준은 적어도 동북아시아보다는 상당히 뒤쳐진다. 한국-중국의 국경 윤곽은 늦어도 15세기에는 대체로 기준이 잡혔다. 현대 중국의 영토 경계 확립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17세기 무렵이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명·청이나 조선을 근대국가로 부르지는 않는다. 이를 통해 ‘근대‘라는 허상이 유럽사에서 얼마나 과도하게 인식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P119

공민왕대 최대 목표는 압록강 유역에 대한 안정적이고 영구적인지배였고, 이를 위해서 먼저 근거리(파사부/단동)의 적의 요충지를공파하고 향후 적의 배후까지 장거리(동녕부/요양) 기동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전술은 후대 세종 · 세조 · 성종 · 선조 연간에 압록강-두만강을 방어하기 위해 적(여진)의 배후지 깊숙이 원거리로 기동하는 전술의 교범처럼 쓰였다. 이후 명 · 청은 압록강 유역을 국경으로 인정하였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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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국호를 바꾸는 일을 추진하여 한편으로는 사회 전반에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나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국호를 제시하면서 형식상으로나마 명의 위신을 세워주었다. 그러면서도 명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요동에 대한 정벌을 암암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실제로 태조 초반 정도전이 주창한 사병私兵 혁파 정책은 바로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국호 변경과 북벌은 거의 동시에 추진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었던 명으로서는 조선이 늘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조선‘이라는 국호는 고려 후기에 민족체의 통합이 고양되면서 새롭게 형성된 역사의식의 소산이었다. 이것이 신유학과 결합하여 중국과 대등한 문명권을 지칭하였다. 더욱이 이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중국의 고사 세계가 우리의 역사와 나란히 존재하며, 고조선을 계승한 현세의 조선왕조에서 이를 언제든지 구현할 수있고 또 초월조차 가능하다고 자신했음을 의미한다. 아득한 고조선의 영화를 내세운 조선왕조는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제 자국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유교적 이념을 통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고자 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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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은 <복거론> ‘서설‘에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네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라고 했다. 겉으로 보아 비중이 동등한 네 가지 기준을 장소를 평가할 때 적절히 적용하였다. 가장 중요하고도 창의적인 기준은 바로 생리였다.
청담은 생계를 유지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최적의 주거지로 보았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한 걸음 나아가 재산을 축적하여 후손까지도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장소를 찾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 시대 지식인이 감히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조건이라도 당시에는 거의 적용하기 불가능했다. 사대부는 이익을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온 뒤에 홍중인은 《아주잡록》에 《사대부가거처》를 초록하고 발문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 글에서 "대저 사람들이 길을 잘못 들어가는 원인으로는 이익을 탐하는 것이 가장 중대하다. 향촌 사람들이 누군가를 천하게 여기고 이웃끼리 원망하는 원인 또한 오로지 여기에 있다."라며 생리를 조건으로 내세운 《택리지》의 관점을 비판하였다. 홍중인은 아예 〈복거론〉 ‘생리‘를 삭제하고 싣지 않았다. 거의 모든 사대부가 이와 같은 관점을 지닌 전통 사회에서 청담은 이단적 사유의 소유자였다.
바로 그 이단적 사유가 택리지의 독창성을 보장하고 가치를 드높인다. 사대부라 해도 마음속에는 경제적 이윤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숨어있는데, 이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실현할 수 있는 장소를 《택리지》는 알려주었다. 관찬 지리지에서 제공해온 정보나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택리지》는 전국 지방을 파악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의 틀을 제시하여 국토를 새롭고 혁신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 P30

청담은 행정 중심지보다 경제적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지역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교통과 물류 거점 지역을 부각시켰고, 한양과 떨어진 거리를 기준으로 지방을 평가하였으며, 산과 들의 접경지, 육지와 바다가 서로 통하는 경계 지역을 중시했는데 이러한 시각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생리를 중시한 청담의 사유는 독창적이고 획기적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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