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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은일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설익은 인생 성장기
작은콩 지음 / 스튜디오오드리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병을 만나고 깨달았습니다.
삶은 어떤 담보를 걸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요.
p.232
«설은일기»는 20대에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진단받은 저자의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투병생활 이야기를 담은 만화 에세이다. 처음엔 단순한 투병일기라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실제론 그보다 더 깊은, 단단한 열매가 되어가는 한 사람의 회고록이자 고백으로 다가왔다.
담담히 써 내려간 진심들과 진솔한 현실의 이야기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 앞만 보고 달리며 자신을 불태웠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방황 끝에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과정.
몇 번이나 생의 의욕을 잃어도, 예정된 고통 속일지라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걸어나가며 누구보다 용기 있게 살아내는 저자의 모습은 큰 울림을 준다. 우리는 살아내려 애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고통을 바라보는 일도 막막하고 두렵지만,
오히려 밀려오라고 받아들이고 나니
아프더라도 차라리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며
도망치는 삶보다는 나았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제 삶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p.288-289
저자는 병이 생긴 뒤, 몸이 아픈 것을 돌볼 생각보다는 그저 귀찮고 화가 났었다고 한다. 귀한 물건이 물에 빠지면 누구나 건지려 애쓰겠지만, 소중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냥 가라앉게 두듯, 통증이 심하면 진통제를 삼키며 자신의 몸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고.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레 내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저자처럼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나도 출산 후에 몸이 많이 망가졌는데, 처음 몇 년 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까지도 병들어갔다. 병원에 가 봐도 대부분 큰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고, 가끔 힘줄이 좀 찢어졌는데 몸을 쓰지 말고 좀 쉬라는 말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통증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계속되었다. 몸이 아파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는 화가 났고, 누군가의 조언에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더욱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티를 내지 않았고, 너무 참기 힘들 때는 진통제를 삼키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를 괴롭혀온 건
병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p.148
저자는 이제 자기 자신을 돌보며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관찰하며 소중히 대한다. 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욕심과 과거를 내려놓고 내 몸 상태를 인정하고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는 벌써 12살이 되었고, 통증은 아이의 나이만큼 나와 함께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지속되는 통증은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내 상태를 받아들이고 나니 더 이상 화가 나지는 않는다. 오늘 어딘가가 더 아프면 어제의 나를 돌아보고, 어딘가가 더 좋게 느껴질 때도 내가 무엇을 다르게 했는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받아들임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에 가깝다.
이런 정도의 변화로 나 자신을 사랑하거나 소중히 대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가끔 진통제를 삼키고, 무리인 줄 알면서도 욕심껏 몸을 움직인다. 어떤 일들은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돌아서기도 한다. 아이에게는 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정작 나는 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을 뿐, 아직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우울함을 삼키고 있었구나. 책을 읽으며 새삼 크게 느껴지는 현실에 머리가 멍했다. 나로 살아가기 위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를 조금 더 아끼며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병명이 없으니 완치도 없겠지만,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 조금 덜 아프게 만들 순 있지 않을까.
달리지 않고서야 알게 됐습니다.
달리지 않고도 사는 사람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사실, 달리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p.173
치열하게 살아왔던 과거를 뒤로하고 남과는 다른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의 평화와 삶을 관조할 여유를 준다. 그래도 가끔은 불안한 마음이 든다.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아니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이대로 멈춰버릴까 봐. 끊임없이 달리며 무언가를 증명해내려 애쓰던 나는 한참 먼 과거에 있고, 무엇을 증명해낼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가끔씩 흔들리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인 지도 모른다.
오늘은 미래의 내가 그리워할 과거이며, 어제의 내가 바라보던 미래이다. 그저 숨만 쉬고 있었던 하루라도, 실수만 가득한 하루라도,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소중하다.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삶 속으로 걸어가 보자. 저자가 말하는 '고통을 알고 있음에도' 원하는 것을 위해 다시 나를 내던지는 그 '진짜 용기'를 품고서. 넘어지고 다쳐도 다시 일어나는 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