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받지 못한 환영들이 모이는 집, 환영의 집. 이 책은 청림에 지어진 적산가옥을 배경으로 1945년의 나오, 1995년의 규호, 2025년의 수현과 규호의 이야기를 넘나들며 무형의 공포와 실체적 공포를 선사하는 하우스 호러 장르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인간의 욕망과 상처, 기억과 죄를 전승하는 매개체로 개인 내면의 공포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집을 지켜라." 규호는 큰아버지로부터 여섯 글자의 편지와 함께 1995년에 기이하고 끔찍한 일을 겪었던 집을 상속받게 되며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향한다. 큰아버지에게도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조카인 규호에게 그 집을 넘긴다는 건 이것이 단순한 유산이 아님을 명시한다. 이사 후에 이어지는 소름 끼치는 현상들은 규호의 과거와 죄를 상기시킨다.
규호의 부인인 수현은 처음 그 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어떤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다. 처음에는 좀 소름 끼치고 섬뜩한 형태로 다가왔지만, 점점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집 안에서 나오의 오래된 편지와 실험 일지 등을 발견하며 과거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분명 사람이 아닌 듯한 명숙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그러는 사이 규호는 점점 공포에 사로잡혀 집 여기저기를 들쑤신다. 그들의 쌍둥이 자녀 중 지병이 있던 언니 실비는 병세가 깊어진다. 수현과 나오가 가까워질수록 수현은 집과 명숙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명숙이 말한 대로 실비는 죽음을 맞이한 후 6시간 뒤에 깨어난다.
일제 강점기 교토에서 조선-일본 혼혈로 태어나 오사카와 경성을 거쳐 식민지 조선의 청림에 정착한 의사 나오. 결혼을 하고 살게 된 집에서 이질적인 존재를 느끼고,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후 방황의 시간을 보낸다. 아랫마을에 사는 명숙과 만나게 된 후 나오는 명숙을 자신의 딸처럼 애틋하게 여긴다. 함께 의대를 다녔던 과거의 연인 고타로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실험을 하며 그 실험 일지를 나오에게 편지로 부친다. 실제로 되살아난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와 함께. 일련의 사고로 명숙을 잃게 된 나오는 고타로의 편지에 나온 실험 일지를 떠올리며 명숙을 되살리려 한다. 그 후, 나오는 편지와 실험 일지 등을 남기고 사라진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누가 현실의 존재이고 누가 환영인지, 어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닌지 매우 혼란스러워졌고, 이것이 이야기를 더 공포스럽게 느끼게 했다. 이 적산가옥의 존재 자체가 삶과 죽음에 걸쳐있는 장소로 묘사되어 더 그랬던 듯하다. 다행이랄까 어느 순간부터는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까지 공포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수현이 환영을 대하는 태도와, 어쩐지 그들이 익숙한 느낌이 든다는 수현의 생각 때문일지도. 의사로서 그곳에서 계속 일하기를 희망했던 나오와 상담사로서 다시 일하고 싶어 했던 수현의 비슷한 바람. 환영을 싫어했다던 '주인'들이 사라지고 집, 혹은 환영들이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들과 환영들이 서로 환영하는 모습.
환영의 집은 80년의 세월을 넘어 따뜻한 휴식처가 된 걸까.
환영받는 환영들이 모인 환영의 집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들이 있다.
누가 죽인 걸까? 현실에 남은 '사람'은 누구일까? 이 집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답을 아는 것 같긴 한데 정답이라는 확신이 없다.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읽어 본 공포 소설이 공포로만 다가오지 않아서 좋았다. 되살아나는 과거의 상흔과 희생, 상황에 따라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는 모순과 불안정함, 내면의 균열과 공포가 어떤 현상이 되어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들은 사실 현실 그 자체를 문학을 통해 비춰낸 듯 보인다. 그 집을 거쳐간, 혹은 그 집에 깃든 사연에 한 인간으로서,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공감하는 바가 있기에 책장을 덮은 후에도 진득한 여운이 남는다. 몰입감 가득한 한국형 하우스 호러를 만나보고 싶은 분들께 특히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