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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반타 / 2025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반복되는 일상은 도돌이표와 같다. 악보 속의 도돌이표를 따라 같은 구간을 연주하듯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삶이 반복된다면 어느새 기대감은 사라지고 지루함만이 남는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 전체를 반복하는 일이라면 어떨까? 정답을 아는 문제를 풀듯 인생이 더 쉬워질까? 이불킥을 날리게 만든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을까? 의문과 궁금증이 생겼다는 점에서 지루함보단 흥미가 조금 생기기는 한다. 그런데 이 삶 또한 두 번, 세 번, 그리고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살아가는 것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은 이러한 반복되는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인 해리 오거스트와 칼라차크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칼라차크라들은 반복되는 인생을 살며 감정이 마모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격정적이기보단 담담하며, 오랜 삶을 살아온 만큼 시간에서 오는 무게감이 있다. 이 무게감은 마치 중력처럼 끈적하게 독자를 끌어당긴다.
칼라차크라들이 특별한 능력 대신 지난 기억만을 매개로 동일 시간선을 반복하는 삶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마치 지난주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처럼 다음 주에 일어날 일을 기억하는 것뿐인 평범한 사람들. 그들은 과거의 기억만 더 가지고 있기에 이번 생에서는 결정된 결말 없이 자유의지로 개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역사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모인 거대한 흐름이다. 따라서 칼라차크라들의 자유의지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모여 상호작용하며 역사를 이루고 지난번과 달라진 칼라차크라의 행위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만든다.
크로노스 클럽이 네트워크 효과를 통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네트워크 효과는 사용자(노드)가 많아질수록 그 제품이나 서비스가 기존 사용자 및 신규 사용자에게 주는 가치가 더 높아지는 현상이다. 크로노스 클럽은 먼저 한 칼라차크라가 자기 재산을 사후에 다른 칼라차크라가 쓸 수 있도록 남기는 호의에서 시작한다. 이 호의적 관계는 두 칼라차크라 사이에 링크를 구성하고, 그들의 반복되는 삶 속에서 그 링크는 계속 실행되며 강화된다. 각 칼라차크라가 살아가는 시간선과 겹치는 시간선을 살아가는 다른 칼라차크라들과도 호의에 기반한 링크를 구성하기 시작하면 그 링크들이 연결된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구성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먼 과거부터 먼 미래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네트워크가 크로노스 클럽이라는 플랫폼으로 발전했다.
한편 크로노스 클럽은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한 칼라차크라를 단죄하기도 한다. 기억의 반복과 전달로 형성된 크로노스 클럽은 역사를 바꾸려 시도한 한 명의 칼라차크라로 인해 문명이 파괴된 집단적 기억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중대한 역사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도록 암묵적으로 약속했고 새로 태어난 칼라차크라들에게도 이 지침을 공유한다. 지침을 어기고 공동체의 위협을 초래하는 칼라차크라는 배제한다. 서로를 돕는 호의에서 시작된 공동체가 그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구성원을 해치는 것을 보며 국가가 국민을 위해 사형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역설이 떠오르며 씁쓸하게도 느껴졌다.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균형이 필요한 지점일 것이다.
클레어 노스는 지루할 수 있는 누군가의 반복되는 인생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끈적한 느낌의 매력적인 글로 만들었다. 기억으로 얽힌 방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로의 신념이 충돌하고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SF 마니아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서 인문과 과학을 아우르는, 철학적인 주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