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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피플
차현진 지음 / 한끼 / 2025년 1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그저 가볍게 생각한 기분 전환이 이토록 깊게, 이토록 질기게 내 인생에 자리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p.218
사랑 이야기는 즐겨 읽지 않는다. 글로 읽는 사랑은 대부분 비현실적이고, 애초에 내가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현실의 누구에게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공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뭘까? 비현실적인데 현실적인, 아니, 이게 오히려 소설 같지 않게 현실적인 건가? 이 소설을 읽으며 끊임없이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했다. 공감하고, 또 공감하지 못했다. 두 인물의 시점이 번갈아 나오며 한 편의 영화처럼 이야기가 흘렀다. 장면마다 환청처럼 BGM이 흐르고, 장소가 변하고, 계절과 함께 시간도 흘러갔다. 하지만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계속해서 그날에 머문다. 내가 지금이 아닌, 좀 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은, 경로를 이탈한다."
나를 이 소설로 이끈 문구. 나는 제법 평범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평범하지 않길 꿈꿔왔다. 현실과의 괴리가 괴롭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내면의 평온함과 안정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사랑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경로 이탈'이라는 말에 손을 뻗고 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평범하지 않은 것들을, 조금은 엇나가고 길 잃은 것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항공 승무원 정원은 엄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암스테르담에서 귀국을 서두르지만, 화산 폭발로 발이 묶이고 만다. 기자 해든 역시 인터뷰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마지막 남은 한 대의 렌터카가 그들의 만남을 본격적으로 부추긴다. 어디로 향해갈지 모르는 경로 이탈, 드라이브 피플의 시작이다. 그들의 우연한 동행은 둘 모두의 인생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뒤흔들며, 삶에 균열을 만든다.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만, 결국 정원은 어떤 사실과 함께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떠난다. 해든을 만나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이 되어.
지금 내겐 두 남자가 있다. 한 명은 빛을 준 남자, 한 명은 그늘을 준 남자.

정원의 과거에는 끔찍한 기억을 남기고 떠난 한 남자가 있다. 정원과 그녀의 남편 건영 사이에도 복잡 미묘한 과거와 사연이 있다. 정원과 그녀의 절친 아진 사이도 해든이 끼어들며 껄끄러워진다. 몇 번이나 반복된 정원과 해든의 우연한 재회와 엇갈림. 정원과 건영은 계속해서 결혼생활을 이어나간다. 어느 날 정원과 건영 각자의 전 연인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며 오랜 오해가 풀리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다시 해든과 재회하는 정원.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 정원이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선택은 어쩌다 알게 된 사실로 인해 확고해졌다. 그녀의 베이스캠프가 완전히 옮겨졌다.
얽힌 입자는 아무리 떨어져도 서로 영향을 준다. 한번 얽히면, 어디에 있든 서로 연결되어 버린다. 양자역학은 그렇게 말했다.
p.316

정원의 마지막 선택이 처음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언제 이혼해도 좋을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한 사람과의 짧았던 추억만을 의지해 살아가던 그녀는 어떻게 한순간에 반대의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포기하지 않고 달려와 결국 이룬 꿈이 사실 자신만의 노력이 아닌 건영의 지지와 함께였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재정의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해든만큼 큰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자신이 선택했던 자신의 자리에서 지금껏 몰랐던, 이제서야 깨달은 자신이 가진 보물들을 하나씩 발견해 내며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아가는 것. 하지만 끝까지 의문으로 남았던 것은 그녀가 지키고 싶었던 사랑이 결국 과거의 망령인지, 현재의 의리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루지 못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그 마음인지, 어떤 것이 현재의 정원에게 사랑으로 남았는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굿 브레이크, 굿 럭… 그리고 당연히 굿 또라이!"
p.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