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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6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모호함 속에서 마주하는 진실의 그림자>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과 그 일의 불가능성을 다룬다"
p.28
≪기억의 유령≫은 제발트의 문학과 사유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심층 인터뷰와 평론가들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제발트의 작품 세계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며, 그가 꾸준히 탐구해온 ‘기억’, ‘망각’, ‘역사’, 그리고 ‘진실’의 복잡한 문제들을 다룬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유령’은 단순히 잊힌 기억이나 상처를 지칭하는 은유에 그치지 않는다. 제발트가 말하듯, 소설에는 어딘가 유령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제발트의 ‘유령’은 문학에서 현실을 다루는 고유한 방식, 즉 명확히 존재하지만 형체 없이 스쳐 지나가는 기억과 감정, 혹은 불가해한 진실을 상징한다. 유령은 영혼이나 환영 그 자체라기보다, 부재하면서도 강하게 현존하는 어떤 ‘느낌’에 더 가깝다. 이 유령은 잊힌 사람들, 말해지지 않은 기억, 사회가 외면한 진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불분명하게 부유하는 감정의 형태일 수 있다. 독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유령의 정체를 해석하게 되며,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태도야말로 제발트 문학의 핵심적인 매력 중 하나다. 어떤 평론가들은 제발트를 ‘유령 사냥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산 자와 죽은 자, 기록된 역사와 사라진 목소리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불가능의 글쓰기를 수행해온 데에서 비롯된다.
제발트 문학의 특징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경계의 흐림이다. 그의 글쓰기는 역사적 사건을 단순한 기록이 아닌, 기억과 상상, 개인적 체험이 결합된 다층적 서사로 재구성한다. 명확한 설명보다 암시와 조합, 문서와 이미지, 단절된 기억의 파편을 통해 불완전한 진실을 구성한다. 사진, 지도, 기록물들은 삽화 그 이상으로 작용하여, 기억과 감정을 매개하는 증거물로서 독자에게 모호한 실재의 흔적을 남긴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홀로코스트, 전후 독일 사회의 침묵, 망명과 이주의 경험처럼 개인과 집단이 감당해온 상흔들이다. 그는 유럽 도시의 폐허나 낯선 경로를 따라 걷는 방식으로 공간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을 추적하며, 공간을 망각과 기억이 교차하는 장으로 재구성한다. 공간은 배경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이 만나며 진실이 머무는 자리다.
제발트의 글은 독자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그는 침묵된 과거를 다시 말하게 하는 글쓰기, 쉽게 잊히는 진실에 저항하는 문학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진실은 언제나 완전하거나 단정적인 것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중첩되며, 때로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 그대로 머문다. 그 모호함 속에서 독자는 각자의 기억과 감정, 해석을 통해 제발트가 쫓고자 했던 ‘진실의 그림자’에 다가서게 된다. 이 책은 단순한 작가 인터뷰나 평론집을 넘어, 제발트 문학의 본질과 그가 추구한 기억의 윤리를 복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기억의 앞에 서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도록, 제발트는 유령처럼 조용하지만 끈질긴 목소리로 우리를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