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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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홍대에서 합정으로 향하는 대로변을 걷다가 수족관 안에 대게가 늘어져 있는 걸 봤다. “수족관 유리에 배를 바짝 붙이고 집게발로 유리를 톡톡 두드리고 있”(50~51쪽)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튼실해 보이는 대게였다. 그래서 왠지 러시아 말을 할 것만 같았는데, ‘Помогите……. (도와주시오…….)’하고 중얼거릴 것만 같았는데 역시 픽션은 픽션일 뿐이었던 건지 대게는 조용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대게가 말을 안 해.

내가 말했다.

근데 원래 대게는 사람 말 못하잖아…….

그다음 들었던 생각.


하지만 정보라의 소설에서 대게는 사람 말을 한다. 그것도 러시아어…… 아무래도 러시아 정부가 고용한 대게라니까 러시아어를 하는 거겠지.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당연함을 더 이상 통용되는 사실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소설가다. 이제 수족관 안 대게만 보면 아닐 비(非)자로 뻗어서 자는 술 취한 대게를 떠올리게 생겼다.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27쪽)라고 중얼거리며 대학 교정을 굼실굼실 활보하는 거대 외계 문어의 얘길 읽으면서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고 당분간 문어를 먹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얘길 들어 보니 외계 문어는 총장이 개인 사업자와 몰래 거래해서 들여온 거란다. 사람 말을 할 줄 알고 지구 생물체에 미약한 적대감을 가졌으며 지구에 대한 정보 수집차 클론을 파견시킨 것일지도 모르지만 뒤통수 한 방이면 혼절해 버리는 최약체 생물. 그리고 인간에게 납치당해 신약의 재료가 되어버린……. 정말로, “인간 때문에 위협받고 죽고 다치고 노예로 잡혔던 생물들이 모두 힘을 합쳐 인간에게 복수하기로 결의했다면 인간은 오래전에 멸종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마땅할지도 모른다.”(208쪽) 우스운 건 내가 생선회 내지 각종 해산물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비인간 생물종을 위해 인류가 멸종해야 한다 해도 남편만은 살아남기를 원한”(208쪽)다고 말하는 주인공처럼, 나 또한 별 수 없는 인간이다. 이따금 다른 종의 생물을 요리해 먹는 걸 즐기는…… 마치 교정에 나타난 외계 문어를 싱싱한 채로 끓여 먹던 것처럼……. 


아무런 힘도 써 보지 못하고 숙회가 되어버린 외계 문어나 부당 계약에 당해버린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게, 인간의 신약 개발 목적으로 납치된 각종 해양 생물들…… 그들에게 인간은 포식자일 뿐이겠지. 하지만 “착하거나 나쁜 동물 같은 건 없”(172쪽)다. “우리는 그냥 동물”(172쪽)이다. 인간이나 비인간 생물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중이니까. 그리고 어떤 인간은 비인간 타자와 공존하려 한다. 먹이사슬에 따른 식습관과 무관하게, 인간의 사적인 이익 때문에 어떤 비인간 생물의 터전이 침해되는 것은 부조리함을 알기 때문이다. 비인간 생물들이 사라지면 인간도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Beautiful Whale』에서 브라이언 오스틴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두뇌에서 500만 년 이상 진화한 문화와 의사소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들을 영원히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그리고 “기울어가는 새벽 달 옆에 떠서 기다리는 우주선을 향해 날아올랐”(252쪽)던 검은 고래를 생각한다.


▷ 래빗홀클럽 독서 기록입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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