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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것만 생각해
카림 르수니 드미뉴 지음, 김혜영 옮김, 조승연 그림, 곽이경 해제 / 검둥소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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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권정생 선생님께서 생전에 “어떤 책을 좋은 책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읽고 나서 무거워지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하셨단다. 좋은 책을 읽으면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거나,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겨서 무거워지나 보다. 그런데 소설은 어떨까?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고 무거워지는 것은 좋지만, 소설이 무거워 흥미가 사라지면 좋은 소설이라 하기 어려울 게다.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으며, 읽고 나서 생각이 많아진다면 정말 좋은 소설 아닐까. 오늘 그런 소설을 읽었다. 72쪽짜리 짧은 청소년 소설 <난 그것만 생각해>이다. 

  “난 내게 몸이 있다는 걸 몰랐다”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한편의 동화 같기도 하고, 시적 영상을 느끼게도 한다. 간결한 문장, 톡톡 튀는 대화, 그리고 돌발적인 상황과 반전이 이어지는 빠른 전개가 소설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주인공 이스마엘은 사춘기다. 성에 눈을 뜨게 된 청소년은 자신에게도 몸이 있다는 것을 안다. 

  성, 낸 눈에는 이 단어만 보였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 아니, 내가 이해한다고 믿는 단어. 왜냐하면 바로 이 순간, 처음으로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나는 문에 기대 앉아 내 털들을 바라보았다. 그 후로 난 그것만 생각했다.

  나도 그것만 생각했었다. 내 몸의 털을 바라보거나, 이스마엘처럼 백과사전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성’적 관심의 영역을 넓혀갔다. 어린 시절 혼자 가슴 콩닥이던 소년에게 ‘성’의 세계는 경계 밖으로 넘어가 금단의 땅에 발을 딛는 모험이었다. 소년에게 우주가 열린 것이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말해 왔다.
  사춘기는 …… 성이다. 

  그렇다. 사춘기는 성이다. 성적 관심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그때가 지금이나 ‘성’은 위험하다. ‘성’은 몰래 훔쳐봐야 하는 것이고, 성적 표현은 불온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이런 관념을 깊이 심어놨을까?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성적 표현을 하면서 살아갈 아이가 성을 깨닫고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불안과 혐오로 시작하게 하는 이 불순한 사회에서 ‘성’을 직접적으로 다룬 소설 또한 얼마나 위험하게 볼까.
  괴물 같은 중학교 2학년 되어 털이 나기 시작한 이스마엘은 친구 아맹의 놀림감이 된다. “야 너 호모야?” 친구의 짓궂은 장난에 반격은커녕 도망을 가, 다른 친구들까지 놀려대기 시작한다. 일을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이스마엘은 호모라고 따돌림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학교에는 곤경에 빠진 사람이 더 있었다. 앙글레 선생님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사촌이고, 엄마의 절친인 선생님은 이스마엘이 소문을 퍼뜨려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녀는 레즈비언이었다. 

  “레즈비언이라고!”
  “그게 어때서요? 여자를 좋아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며 엄마는 눈썹을 찌푸렸다. 보통 엄마가 눈썹을 찌푸리는 것은 아주 불길한 징조다.
 
  “물론 나는 정상이지. 나는 결혼도 했고, 직장도 다니고, 아이도 있고, 이만하면 정상이고말고!”
  “당신, 정말…… 웃기는 거 알아요?
  엄마의 눈썹은 더 이상 찌푸렸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엄마 이마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같았다.
  “우리가 결혼할 때 내 부모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봐요. 아랍인과 결혼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거든요.”
  “그건…… 그게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
  “‘정상’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이곳에서 정상인 것은 다른 곳에서는 아닐 수 있고, 당신에게 정상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비정상일 수도 있다고요. 모로코에 있는 당신 가족을 봐요. 우리가 자연주의를 지지하는 걸 비정상이라고 하잖아요.”
  “그건 다른 이야기지. 자연주의자는 변태가 아니잖아!”
  “뭐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모하메드?”

  호모로 놀림을 당한 아이와 레즈비언 선생님. 그런데 레즈비언이 정상이라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지, 이 소설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원숭이와 사촌간이라는 것도 비정상이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말도 살려둘 수 없는 범죄였다.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게 비정상이지,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이스마엘 엄마의 말대로라면 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레즈비언을 이해하던 엄마도 이스마엘이 성 정체성을 고민하자 차갑게 굳어버린다. 
  “만약 제가 호모라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스마엘의 질문에 포크를 떨어뜨리고, 엄마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깨닫는다.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동성을 좋아하는 유전인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야 아는 것일 텐데,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전에 선을 그어 놓는 일은 옳지 않다. 그런데 내가 이스마엘의 아빠라면 어땠을까. 썩 훌륭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누구는 뼛속까지 ‘친일’, ‘친미’라고 자랑하는데, 왜 우리의 뼛속까지 이성애자만 정상이라는 편견을 심어 놓았나.
  많은 아이들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지나치고, 또 바뀌고 하면서 성장해 간다. 모든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아파하면서 한 인간으로 서면 안되는 걸까? “나는 왜 이성애자인가?” 난생 처음 질문을 해본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연스러운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성애자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로를 밟지 않았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남은 인생 동안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인생이 깜짝 놀랄 일들로 가득 차는 것이다. 

  선생님의 기지로 따돌림에서 벗어난 이스마엘은 목울대에 혹이 생겨나는 사춘기 지난다. 소년은 강해졌다고 느낀다. “이제 난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 같다”라고 마침표를 찍는 소설처럼, 훌쩍 커 버린 이스마엘처럼, 우리 아이들의 인생에도 깜짝 놀랄 일로 가득 차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 아름다운 소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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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지구 미션 11 - 과학을 이해하는 새로운 프로젝트
신규진 지음 / 우리교육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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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은 참 어렵다.

  나는 과학과 친해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70년대 중고등학교는 과학을 살갑게 대할 수 없는 조건이기도 했고, 시험 대비 외에는 어떤 활용도 가능하지 않게 만든 중등교육의 내용은, 과학에 관심이 생기기도 전에 질리게 만들었다. 요즘처럼 어려서 현장체험과 노작교육을 하고, 과학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실험을 해보고, 우리 땅 곳곳을 다녀보는 경험이 가능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하여간 과학은 내게 너무도 먼 영역이다. SF소설에도 흥미를 갖지 못할 정도니, 과학이란 단어만 들어가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고 보니 과학과 관련된 책을 읽은 적도 별로 없는 듯하다. 제인구달의 <희망의 밥상>이나 최재천 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같은 책이 과학서의 범주에 들어가면 그나마 손에 꼽을 수 있겠다. 왜 내게 과학은 멀고 어렵기만 한가.

  학교를 졸업한 지 30여 년이 넘어, 아이가 참고도서로 읽는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기적인 분량도 그렇지만, 중학생이 이런 책을 참고도서로 읽는다는 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너무도 과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건가, 아니면 아이에게 살인적인 지식의 무게를 얹고 있는 건가. 한번은 아이 시험을 거들어 준다고 나섰다가 앗 뜨거워 한 적이 있다. 세계올림피아드 과학 경시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어찌 이리도 어려운 공부를 하는지!

  그나마 과학 교양서를 읽어내는 아이가 대견하기도 하고, 이해도 안되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붙잡고 씨름하던 나의 중학교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여전히 우리 아이들에게 과학이 친근하고 흥미진진한 과목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대를 이어서 과학을 어려워하고, 경원시하면서 보내길 원치 않으니, 어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할 책이 없을까, 늘 갈증을 느끼게 된다.

  수학, 과학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책들은 계속 나오지만, 그다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쉬운 길을 찾기보다는 관심이 생기게 해주면 좋겠는데, 과학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든 책은 없는 걸까? 오래된 답답함을 조금은 풀어줄 책이 최근에 발간되었다.

  과학 소설, 과학교양서, 학습참고서 세 영역에 두루 걸쳐 있는 책은 <판도라 지구미션 11>이다. 제목만 봐서는 도대체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지만, Eaeth Science라는 영문 표기가 지구과학 책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다. 조금은 불편한 과정을 거쳐 책의 내부로 들어가면 따뜻한 일러스트와 사진, 그리고 소설식 구성이 어울려 있어 언뜻 보기에는 과학책보다는 청소년 교양서 또는 문학서 같은 느낌이 든다. 과학서는 어떻게 해서든 진입장벽을 만드나 보다. 
 
  만화책 제목 같기도 한 판도라의 지구 미션은 지구에서 6만 광년 떨어진 판도라 행성이 생명을 다하게 되면서부터 시작한다. 지구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판도라 행성의 원로회의는 지구를 병들게 만들고 수많은 종들을 멸종상태에 빠트린 지구인들이 앞으로 자신들과 함께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그것도 어른들은 가능성이 없으니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영물상자를 보내 테스트를 하기로 한다.  

  아이들은 11개의 미션을 해결해야 하고, 단 하나의 미션이라도 실패하면 지구인은 멸종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가장 먼저 한국 아이들이다. 과제는 태양계의 문제를 푸는 것이다. 아이들은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협심하기도 하면서 10가지 문제를 풀어 가는데…….

  현직 과학교사인 저자는 소년 시절 소설가가 꿈이었던 게 분명하다. 사실에 상상력을 더했다는 문화장르인 팩션이 지구과학의 영역에서는 <판도라 지구미션 11>으로 완벽하게 성공했다. 저자는 소설의 형식을 빌어, 흥미진진하게 사건을 만들고, 이를 긴박하게 풀어가면서, 지구과학의 이해를 깊게 한다. 

  지구과학 올림피아드에 참가한 세계 청소년들은 11개의 미션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 미션은 태양계, 별, 은하, 달, 지구 구성, 광물, 암석, 화석, 판 구조, 대기, 해양학 등 지구과학 학습 범위 전 영역을 아우른다. 이쯤해서 저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으면서 고등학교 지구과학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게 한다. 그런 면에서는 새로운 지구과학 교과서라고 할 만큼 충분히 재미있고 알차다. 

  공룡박사인 이융남 지질박물관 박사는 “이 책은 팩션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책 속의 과학적 내용은 사실에기초하고 있어 재미와 함께 자연스럽게 지구과학에 대한 올바를 정보를 얻을 수 있다.”라면서 청소년들에게 좋은 학습서로 추천한다.

  예전에 이런 책이 있었다면 나도 과학과 친근해질 수 있었을까. 아쉬움 반, 부러운 마음 반이다. 내 아이가 읽고 나처럼 반가워하려는지는 미지수지만, 아마도 나처럼 오랜 세월 과학을 경원시하고 살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다. 과학은 정말 어려운가. 어렵게 만든 것일까. 후자가 아닐까. 상상력이 충만하고 감수성 예민한 10대의 뜨거운 가슴에 끝없이 외우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과학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조금씩 관심이 생기고, 원리가 궁금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텃밭을 가꾸고, 꽃씨를 구해 싹을 틔워보면서, 자연의 순환의 과정이 눈에 들어온다. 고라니, 두더쥐, 땅강아지, 새들의 자취를 보면서 생명체의 공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시골 캄캄한 밤길,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은 은하계 넘어의 우주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지구라는 행성의 생명체와 역사, 지구를 유지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조금은 더 알고 싶어진다. 

  이 책의 저자가 지구 미래의 주인으로 희망을 품은 한 청소년들은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되길 바란다. 아이들이 가능하면 많은 경험을 하고, 우리 땅 곳곳을 밟아보고, 살아 숨쉬는 강을 따라 걸어도 보면서 과학을 몸으로 느끼고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활 속에서 과학적 원리를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감성 충만한 젊은이로 성장한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희망을 가져 본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과학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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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마돈나
자케스 음다 지음, 이명혜 옮김 / 검둥소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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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행복한 마돈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어떤 나라일까? 내가 아는 정도라고는 만델라와 아파르트헤이트라 불리는 인종차별 정책 정도이다. 조금 더 아는 체하면 럭비를 좋아하는 백인들의 식민지로 차별을 받아온 나라, 진실과화해위원회로 유명한 과거청산,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뭔가 많이 아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생각해 보니 빈약하기만 그지없다. 인류 조상의 땅 아프리카의 최남단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어떤 나라인가? 2010년 월드컵이 열린다는 그 나라는 이제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선 민주국가일까? 그들이 겪은 식민지 침탈과 인종차별의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역사책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고, 공부하기를 즐기는 사람도 아닌 나에게, 검둥소에서 발간한 소설 <행복한 마돈나>를 만난 건 행운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문학을 서점에서 골라볼 수 있다니. 이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첫 소설은 아닐지 몰라도, 어쨌든 내겐 처음 다가온 만델라의 나라, 남아공의 첫 소설이다.

소설은 ‘모든 것은 우리 어머니의 죄에서부터 시작된다.’로 시작해서 ‘모든 것은 우리 어머니의 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로 끝이 난다. 의미심장하다. 어머니의 죄는 무엇일까?

가장 오랜 인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모든 인간의 조상인 아프리카인들이, 그들과 생김새는 좀 다르지만 그들의 후손임이 분명한 유럽의 백인들에게 살육당하고, 침탈당해 결국은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식민지의 역사, 바로 그곳 대지에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십대의 꽃다운 처녀로 성장한 니키는 농장주에 겁탈당하고, 노리개로 전락한다.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은 언제나 마음놓고 자신의 성적욕구를 풀 수 있었다. 그것이 관습이 되고, 그 관습 아래서 엑셀시어의 백인 남성들과 흑인 여성들간의 성 스캔들이 벌어진다. 이들은 백인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백인과 흑인간의 성관계를 금지한 부도덕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기소된다.

인종차별 정책과 백인과 흑인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유색인들의 생각과 갈등이 성 스캔들과 법적 공방, 흑인 여성들의 옥살이, 그리고 집으로의 귀환을 관통하면서 소설은 남아프리카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남아프리카의 붉은 빛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시골길을 걷고, 농장의 한귀퉁이 창고에서 비릿한 냄새에 코를 찡그릴 것만 같다. 니키를 집요하게 좇는 요하네스 스미트를 통해 성과 집착, 그리고 남성사회를 지배하는 봉건성을 옅볼 수 있고, 니키를 떠나는 남편과 색깔이 다른 아이들을 통해서 세상 어디에서나 모든 짐을 지어야만 하는 여성의 신산한 삶에 전율하게 만든다.

소설은 성 스캔들에서 머물지 않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변화, 인종차별 정책이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을 따라 간다. 니키의 흑인 아들 빌리키와 컬러드(혼혈) 딸 포피가 의회에 진출하면서, 새사회의 주류가 된 세력과 여전히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백인들간의 혼란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 주류의 분열과 갈등도 낯설지 않다.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극한대립을 하고 있는, 진보는 분열하고, 보수를 타락하는 우리 현실과 너무도 닮아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실이 빌리키와 포피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그려진다. 의욕에 불타기도 하고, 갈등에 휩싸이기도 하면서 남아프리카는 요동친다. 진보와 보수, 중도, 그리고 그것들의 혼재가 작은 마을 엑셀시오도 뒤흔들어 놓고,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게 만든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니키는 지난 과거의 여인으로 침묵한다. 벌을 치면서 사람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고, 잊혀진 여인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컬러드인 포피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머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니키 정부의 아들인 트자르트, 포피의 이복오빠와 격한 갈등에서 벗어나 화해를 하는 과정은 아름답기만 하다. 화해의 과정을 통해 분노를 이겨내는 힘이 무엇인지 웅변한다.

“모든 죄는 어머니에서 비롯되었다.‘

금기를 어기는 것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남아프리카의 가브리엘 마르케스라 불리는 자케스 음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프리카너로 불리는 백인 정착민과 지배받는 흑인, 그리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컬러드, 그 모두에도 속하지 않는 여성의 삶을 섬세하고 묘사하고 있다. 음다는 모든 것의 출발을 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일까,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까.

소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지만 무겁거나 과도하게 진지함에 빠지지 않고 있다. 또 성 스캔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도 선정적이지 않다. 작가의 문장도 유려하고, 노래를 하는 듯 가락을 탄다. 좋은 소설을 만난 기쁨은 남다를 수밖에. 장면 장면이 영상을 보는 것만 같고, 책을 읽은 뒤에도 잔상이 오래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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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만세! 힘찬문고 47
이현 지음, 오승민 그림 / 우리교육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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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장수만세라!

어릴 때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 가운데 <장수만세>가 있었다.

말 그대로 장수 만세다.

설마 어르신들 이야기를 가지고 동화를 만든 건 아니겠지.




호기심과 장난기를 곁들여,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에게 주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몇 줄 읽어 넘겼다.

어, 이거 봐라!

글이 통통 튀었다.

생동감이라고 해야 하나,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좀 진부한 소재인 염라국과 귀신 이야기가 흥미를 덜 만한데도

동화는 재미를 더하기만 했다.

그러다 자살을 준비하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나오고,

가족 모두가 희생과 절망을 안고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장수가 자살하려는 이유가 난독증이라는 데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큰 아이가 장수의 시기를 전쟁 치르듯이 보냈고

작은 아이가 혜수와 같은 또래라,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건가’라는 구절은

지금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만든다.




생생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면서

입시지옥을 건너야 하는 벼랑 끝에 내몰린 아이들의 처지를 온전히 드러내고는

가족 모두가 제자리를 찾는, 행복을 향해가게 하는 정돈된 결말은

이현이라는 작가를 주목하게 한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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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니야
루비 슬리퍼잭 지음, 정미영 옮김 / 검둥소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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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혼자가 아니야,

제목이 말을 건네기보다는 소리치는 느낌이다. 그래도 시선은 끈다.

깊은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에 혼자서 카누를 타고 가는 표지와

‘나는 결코 인생을 혼자서 짓지 않았다’라는 선전문구.

알쏭달쏭하다.

인디언 오잡와족 출신의 저자.

선명하진 않지만 뭔가 궁금증을 자극한다. 이런 책이겠구나, 떠오르는 게 있긴 한데…….

380쪽 가량의 두툼한 소설.

주저하다, 집어든다.

 

 이 책의 출발을 자못 심각하다.

새엄마 사라의 폭력도 리얼하고, 아들을 저주하는 아버지도 광포하기 그지없다.

죽음의 위험에서 도망쳐나오는 어린 소년 대니의 모습은 너무도 처연해서 진저리를 치게 한다.

가출을 아이들의 성장통 정도로, 약간의 낭만적 색깔을 가미한 추억꺼리 정도로 삼고 있는

나를 꽤나 불편하게 만들면서, 대니는 숲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화물칸에 숨어들기도 한다.

조바심이 난다.

늙어가는 증세일까, 자꾸 마음이 흔들리는 걸 보면 곧 TV 드리마 앞에서 눈물을 쏟게 생겼다.




곧 숲속에서 기진해 쓰러지거나, 선로를 가로지르다 사고가 날 것만 같던 대니는

찰리라는 아저씨를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만든다. 

캐나다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인디언들의 문화 속으로, 

광대한 숲, 그리고 1만년 전 빙하기에 만들어진 호수 한가운데로 미끄러지듯 풍덩 빠져 버린다.




이제부터는 긴장의 끈을 풀어놓아도 좋다.

대니는 인디언 오지브웨이족이었고, 그들은 모두 한 가족이었다.

그들이 그곳에 살아가는 모든 생물을 대하듯, 대니도 그들의 일부로 대하고, 가슴으로 품어준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과 폭력으로 점철되는 도시의 생활이 대비되어 교차한다.




대니가 만나는 짐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 헨리와 여러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여정도 자연 그대로이다.

풍경화, 잘 짜여진 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




저자의 고향인 캐나다 온타리오 주 화이트워터 호수로 여행을 떠난 듯한,

카누를 타고 호수 위를 떠다는 것만 같은,

눈보라에 뒤덮인 설원의 눈썰매를 끌고 달려가는 것만 같은 장면들.




이제 대니는 안심해도 된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자연의 품으로 돌아온 아버지와 극적이고 가슴 아픈 화해를 한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을 안고.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이 가슴을 뻐근하게 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 호수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떠오르곤 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묵직한 감동이다.




우리와 오지브웨이족 인디언들과는 무엇이 다른 걸까.

난 누구의 멘토가 될 수는 있을까

소박하게나마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 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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