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의 소설에는 항상 소년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할머니다. (다른 모습의 소년이 나오기는 한다) 유독 문장의 호흡이 긴 느낌인데 경계심 많고 공허한 주인공의 이미지와 어울린다. 그러면서 클라이막스는 제법 현장감과 박진감을 유지하며 순식간에 대단원에 도착한다.냉장고 안의 잊혀진 과일이 주제라기에는 주인공이 마냥 시들어보이지 않는데, 잊혀지려고 하지만 결국 머문 자리에 하나씩 기억하는 이를 남기고 마는, 그가 자신도 모르게 숨겨놓은 생기가 흘러나와서가 아닐까싶다.+) 근데 왼손은 대체 어쩐거지...
재밌으면 좋겠다 정도의 바람이었는데 의외의 취향 대적중이다. 사람이 어마무지하게 죽어나가는데 일단 주인공이 킬러다보니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인상처럼 가볍게 스쳐지나간다.킬러의 작업보다 사생활이 더 비중있게 펼쳐지는데, 그렇다고 또 마냥 시트콤처럼 가볍게 주워삼키게 두지않고 끊임없이 조약돌을 떨어뜨려놓아 마지막으로 이끌었다. 뒷맛 찝찝하게 두지도 않고 깔끔하게 문 닫고 나가도록 커튼콜까지 안내한다.전체적으로 시시하지만 굉장히 응집력있고 전개 내내 힘빠지는 부분 없이 페이스가 일정하고 약간의 막판 스퍼트 후 맺음이 분명하다.
역시 미시마야 이야기가 좋다.그리고 이번 연작은 새삼 ‘아 정말 이야기꾼이구나‘ 싶은 감탄이 나올 정도. 책 홍보에 등장한 먹부림귀신은 소개에 안 쓸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워서 몇 번이나 현실웃음 터짐.흑백 안주 피리술사를 재주행하고싶은 마음이 드는 적절한 시즌1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