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합리성의 심리학 - 왜 인간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반복하는가
스튜어트 서덜랜드 지음, 이세진 옮김 / 교양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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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이라는 것은 "개인이 지닌 지식 수준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를 말한다. 그렇지 못한 행위는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리던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합리적이기를 바란다. 어느 조직이든지 보면 많은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위원회에서 여러 사람의 중지를 모으는 것이 더 올바른 판단을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이 내리는 결정보다 못한 결정을 빤히 위원회에서 내놓는다. 이건 분명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현대사회는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어색하지 않다. 인간 행동의 여러 심리적 요인들을 분석한 심리학 저서들 또한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심리학 관련 책을 읽자면 용어 이해에 대한 부담감은 언제나 상존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심리학 실험을 기술하면서 기술적 용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또한 각 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비합리성에 대한 실험들이 현실적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상을 바탕으로 <비합리성의 심리학>은 인간이 자기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통해 비합리적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흥미있었던 부분으로 '죄수의 딜레마'라는 것이 있다. 공범으로 지목된 두 사람에게 어떤 진술을 하느냐에 따라 형량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서로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중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끼로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생각의 오류를 일으키게 하는 비합리성의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 책은 복종이나 순응, 잘못된 일관성, 보상과 처벌, 증거의 무시와 왜곡 등 우리가 실제 경험하기도 하는 사례들을 통해 비합리성의 사회적 원인을 예리하게 담아내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합리적인 사람이고 결정을 할 때에도 합리적으로 결정하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이 책은 똑똑한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일으키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의 원인을 비합리성으로 본다. 무지비하고 간교하게 행해진 피험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왜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되는지와 비합리성의 깊은 원인을 고찰하고 있다. 그런 실험들을 통해 저자는 사람들이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으로 행동하려고 할 때 오히려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규정 짓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비합리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건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만이 오직 옳다는 자기정당화의 심리가 그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밝혔듯이 비합리성을 치유할 수 있는 단방약은 그렇게 쉽게 처방할 수 없음 또한 자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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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살아라 - 신정일이 쓴 조선의 진보주의자들
신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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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요?" 라는 물음에 "똑바로 살아라"라고 답한다면 현문우답이 될까?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똑바로 산다는 것은 그만치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기존 질서에 타협하고 비겁해지는 게 너무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와 진리를 위해 죽음 앞에서도 똑바로 살다간 선인들의 삶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진보는 '사회의 모순을 변혁하려는 전진적인 사상'이며 보수의 반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이데올로기는 동전의 양면같이 늘 양립하여 왔다. 그런 역사 속에서 진보는 언제나 약자였으며 탄압과 고통의 대상이 되었다. 때로는 회유에 의한 변절을 하기도 했지만, 고난과 죽음을 담보로 한 진보주의자들의 앞선 정신에 의해 세상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똑바로 살아라>는 조선시대 진보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와의 불화를 겪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동시대의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의 진보적 사상은 그 시대에는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역사는 그들의 정신을 영원히 잊지 않고 그대로 실현시키고 있는 중이다. 

 

조선에서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웠던 진보주의자들은 누구였을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허균, 양반이면서도 사대부가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했던 이중환, 유배지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집필에 열중했던 정약용, 이 세상의 중심인 농민에 의한 농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봉기했던 김개남, 비록 삼일천하로 끝났지만 양반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김옥균 등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면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그들이 바꾸고자 하는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지한 패자였지만 그들의 정신만은 역사 속에서 생생한 울림을 주고 있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자신과 타협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적으로 사는 것인지는 잘 몰라도 어떻게 사는 것이 편안하게 한 평생 사는 것인 줄은 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을 얕게 살아가는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죽음 앞에서도 세상을 향해 <똑바로 살아라>는 조선시대 진보적 삶을 살다간 그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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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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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외설스런 활자를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시절의 얘기다. 남들의 눈치를 보며 책방 서가에 꽂힌 책들을 서둘러 검색한다. '금서, 외설이냐, 예술이냐'라는 문구가 확 들어오는 <북회귀선>이 보인다. 달뜬 마음으로 집으로 한 걸음에 달려와 서부시대에 사금을 채취하듯 정성스레 활자를 훑는다. 그러나 관능적이고 원초적인 활자를 기대한 것과는 달리 지극히 자기관념적이었다. 무조건 돈을 벌기 위해 쓰여진 호색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소설에서 외설을 기대하는 건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성적 관심은 자연스레 더 자극적인 비쥬얼 쪽으로 넘어왔다. 그런 탓에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도 별반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요즘 시대는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 성에 대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또한 성 산업의 발전(?)으로 성적 호기심을 쉽게 충족시킬 수 있다. 성에 대한 담론이 활자에 머물기보다는 우리의 오감을 더욱 자극시키는 곳으로 이동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발랄한 라라>는 도발적이다. 어쩌면 인터넷 야설에서 눈에 핏발이 서면서 읽었음직한 단편들이 수록돼 있다. 마광수 교수는 자신의 글이 '성적으로' 보이기 보다는 '유미주의적으로' 보이길 원한다. 괴롭힘을 당하거나 남을 괴롭히면서 얻어지는 성희, 5센티미티 이상의 손톱이나 18센티미터 이상의 하이힐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페티시, 거기에 관음과 마조히즘, 새디즘 들이 난무한다. 그 속에서 작가의 탐미적인 성 판타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그 결말은 사정 후의 허무함 같다.    

 

소설이 허구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 작가는 경험담처럼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지만(혹 실제로 마광수 교수 본인이 등장하기도 하지만)그걸 실제로 믿을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라라를 통해 감각적 쾌락과 성에 대한 탐미 속에서 궁극적으로 성해방을 꿈꾼다. 쾌락과 관능적인 성을 다소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더러는 변태스럽고 역겨움을 느낄 만큼 집요하다.  

 

아무튼 이 책은 그다지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다. 보통 다른 매체를 통한 성에 대한 정보들이 집중력(?)있게 습득되는 것과는 달리, 성적 판타지 속에 역설과 아이러니를 삽입한 작가의 예술로서의 집착은 그다지 공명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발랄한 라라>에 나오는 성적 장치들은 기존에 성에 대한 가치와는 색다른 성적 취향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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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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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도 하다보면 중독 된다. 아무리 힘들고 지친 하루였더라도 잠 들기 전에 책을 본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편두통이 심해도 책을 본다. 사무실에서 어렵게 처리할 일 생각에 불면이 와도 책을 펼친다. 책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위안을 주길래 습관적으로 책을 드는 것일까? 정작 책 읽기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독서란 무엇인가? 보르헤스는 잊기 위해 읽는 셈이 되는 독서를 참으로 부조리한 것으로 보았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뇌리에 깊이 새겨진 것들이 뜻하지 않게 의식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부산물이 독서에 있다고는 봤다. 그런 반면 김열규 교수는 과정만 귀하고 결과에는 관심이 없는 그런 책 읽기를 원한다.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를 물을 것 없이 다만 읽는 일, 그 자체가 유일한 보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빈다. 이런 것을 보면 그야말로 독서는 읽는 데 들인 노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이문이 남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독서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혹자는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한다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인생을 감성적으로 풍부하게 살기 위해 한다고도 하고, 더러는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해 독서를 한다고도 한다. 독서를 하는 목적은 사람의 성향과 목표에 따라 다르겠지만 책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 분명하다. 김열규 교수에게 있어 독서는 자신과 세상을 연결해 주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든든한 통로로 보인다.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독서>에는 김열규 교수가 유년시절, 아이시절, 소년시절, 청년시절, 노년시절을 거치면서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열정적인 책 읽기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할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책 읽기는 소설과 고전읽기를 통해 낭독과 몰입의 즐거움으로 이어지고, 산책하듯 즐기면서 읽는 노년시절 책 읽기로 끝을 맺는다. 저자의 실제 경험에서 얻어진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면서 책 읽기의 재미가 무엇인지, 책 읽기는 방법에 대해 서정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열정은 중독과 다르다. 자아를 찾고 정돈된 가치관을 정립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얻는 독서야말로 열정적인 행위라고 하겠다. 평생 독서를 최고의 가치로 살아온 저자의 모습은 활자와 너무 닮아 있는 것 같다. 책 읽기가 잊기 위해 읽는 부조리한 행위일지는 몰라도 책 읽기 그 자체가 유일한 보람일 수 있게 되기를 나 역시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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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전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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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1번지'라는 프로그램이 한참 인기있던 시절이 있었다. 펭귄으로 분장한 코미디언 심형래가 동물들과 좌충우돌하는 코너는 특히 인기 있었다. 그때는 너나없이 펭귄 흉내를 내며 다녔고, 그걸 보지 못하면 친구들과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유독 형만은 다른 채널을 고집했다. 곁에서 몇 번 봤지만 전혀 흥미를 끌 수 없었다. 재미도 없는 프로그램을 보는 형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 채널의 주도권은 언제나 형에게 있었다.

 

독서도 그렇다. 소설은 재미있다. 가끔 역사서나 에세이 정도 읽기는 하지만 소설만큼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없다. 그런 탓에 자연스레 소설 위주의 독서 패턴이 고정화됐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책은 거의 읽지 못했고, 특히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인식하여 연구하는 인류학은 일반적 독서가라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책임에 분명하다. 어찌 생각하면  너나없이 보던 '유머1번지'를 보지 않는 형의 선택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시절 필독서였던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은 문화인류학의 연구목적을 충실히 충족시켜 준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과 도부 족, 아메리카 북서 해안의 부족들의 생활과 관습을 통해 문화에 대한 고정된 타입은 없으며, 사회와 개인은 적대적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임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미신이나 주술처럼 보여지는 행동이나 습관들이 잔혹하거나 불쌍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부족들의 섹스, 결혼, 친족 관계 등의 진지한 연구를 통해 문화가 인간의 생활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쉼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인류학은 유독 백인들의 종교와 관습에 익숙했다. 원시부족의 관습과 생활 패턴은 야만적이고 샤먼적으로 바라보고 무시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문화적 우월성을 생물학적 차이에서 찾으려는 서구의 시각은 변해야 한다. 문화의 패턴은 생물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일 뿐이다. 문화인류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의 독서였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 책을 통해,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관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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