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주류다운 몸짓과 표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제 모습이 민망해서였다. 다만 이연은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그들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상대에게 직접 가하는 힘이라기보다 스스로를 향한 통제력이라 할까, 오랜 시간 ‘판단‘과 ‘선택‘이 몸에 밴 이들이 뿜어내는 단단하고 날렵한 기운이었다. 얼핏 사람 좋아 보이는 박도 마찬가지였다. 이연은 자신이 대상을 편견 없이 대하는 태도에 작은 만족을 느꼈다. 타고난 성정이라기 보다 수양의 결과였다. ‘어렸을 땐 정말 타인을 시시콜콜 판정했는데…’ 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었다.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 P23
-매일 쓰는 물건이 아름다우면 좋죠. 그리고 그냥 시간을 견딘 것들이 주는 위로가 있잖아요? - P28
살면서 어떤 긴장은 이겨내야만 하고, 어떤 연기는 꼭 끝까지 무사히 마친 뒤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걸, 그건 세상의 인정이나 사랑과 상관 없는, 가식이나 예의와도 무관한 , 말 그대로 실존의 영역임을 알았다. - P39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 P141
기태는 ‘아! 앞으로 나는 부하 직원들에게 존중받는 은따, 대우받는 꼰대가 되겠구나‘ 자책했다. 그렇지만 그날 기태를 괴롭힌 건 자신이 실언했단 사실이 아니었다. 기태가 진정 후회하는 건 그 순간 자신이 굳이 ‘진심‘을 말했다는 거였다. 그날 기태는 이혼한 이래 처음으로 희주가 그리웠다. SNS에 가입해 처음으로 희주의 계정을 찾아본 날도 그날이었다.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부정과 경멸의 대상이 된 것 같았던 날. 이제 자신이 빼도 박도 못하는 기성세대가 됐음을 자명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밤 말이다. - P160
나이드니 마음이 넓어지는 대신 얇아져서 쉽게 찢어지더라. - P163
환갑 무렵에는 문장을 끈기 있게 읽고 이해하는 근육이 거의 퇴화해버렸다. 같은 이유로 기진은 오래전부터 부모의 통역을 맡아왔다.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선주와 경수는 병원이나 관공서에서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들었고, 관련 문자나 서류를 해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기진은 주위에 그런 어른이 꽤 많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기진의 후배나 동료들은 ‘그건 너무 옛날 어른, 옛날이야기가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요즘에도, 아니 우리 세대 부모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느냐‘면서. 그때마다 기진은 자신에게 무척 가깝고 생생한 현재가 누군가에게는 빛바랜 과거처럼 아득하고 낯선 일임을 실감했다. ‘같은 또래라지만 저 친구와 나는 정말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구나. 아마 앞으로도 쭉 다른 고민과 다른 돌봄, 다른 고독 속에서 살아가겠구나’라고. - P199
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맛을 음미하며 지금 이 순간 홀로 집에 가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 P214
-당신에게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나는 당신의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두의 안식과 평안을 빕니다. - P231
나는 로버트가 평소 옷을 잘 갖춰 입는 게 좋았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노동 앞에서 어떤 격식과 약속을 지키는 것 같아서였다. 그건 본인뿐 아니라 상대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 P232
헌수는 내게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다 엉뚱하게도 우리가 <러브 허츠>를 들은 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만약 지금 너를 다시 만난다면 네가 틀렸다고, 이건 ‘안녕‘이 아니라 ‘암영‘ 이라고 고쳐주는 대신 그래, 가만 들어보니 그렇게도 들리는 것 같다고, 콘크리트 보도에 핀 민들레마냥 팝송 안에 작게 박힌 한국어. 단순하고 오래된 ‘안녕’이란 말이 참 예쁘고 서글프다 해줄 텐데‘라며 작게 훌쩍였다. - P252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나‘는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잃어버린 건 집도 학생도 아니다.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142) 자신의 모습이다. 그도 그것을 안다. 그런데 이 상실의 진정한 핵심이 다른 데 있음을 아는 건 우리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그런 나‘만이 아니라 그런 나가 훼손되는 것을 ‘막을 나‘다. 내가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이 훼손되고 있다는 자각은 고통스러운데, 그걸 막아낼 힘이 내 안에 남아 있지 않다는 건 수치스럽다. 남편에 대해서도 그렇다. 남편이 변했다는 사실도 아프지만, ‘나’가 그를 제지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몇 걸음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고 있을 뿐 둘이 흘러가는 방향 자체는 같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중 시우의 질문은 정곡을 찌른다. "공동체, 이웃, 연대"를 주제로 한 수업에서 그는 ‘나’에게 그런 가치들을 믿느냐고 묻는다. "그런 걸 믿으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묻고 있다. 그런 가치들이 옳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할 힘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근본 정서는 진행중인 패배의 현장을 지켜보는 치욕이다. - P301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어권에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본다’는 관용적 표현으로 가리키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학술용어로는 ‘인지적 공감 cognitive empathy‘이라고 부른다. 감정적 동일시가 아니라 인지적 판단이다. 타고나는 게 아니라 노력하는 것이다. 노력하면 알게 되는 것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을 전처럼 해석하고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이연이 한 수 가르쳐준 것이다. 우리 시대의 보이체크처럼. 물론 파티 참석자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는 나빠서 틀리는 게 아니라 몰라서 틀린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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