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다.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씩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와 달리 어린이들은 ‘착하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근다. 주로 친구를 설명할 때 그런다. 그럴 때 나는 꼭 "그 친구의 어떤 점을 보면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하고 물어본다. 대답은 대체로 이렇다. "누가 뭘 빌려 달라고 하면 잘 빌려줘요.", "다른 애들이랑 안 싸워요.", "하기 싫은 일도 잘 해요." 이따금 "염전해요"라고 답하는 어린이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스스로를 착하다고 하는 어린이는 드물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 역시 친구한테 준비물을 잘 빌려주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고, 종종 솔선수범하면서도 그렇다. 겸손해서일까? 그보다는 ‘착하다’는 말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차마 손을 대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은 남에게 들어야 의미 있다는 것을 어린이도 알기 때문이다. ‘착한 어린이’라는 말에는 ‘남의 평가’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이때 ‘남’은 주로 어른들이다.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애쓰다 멍드는 어린이가 어딘가에 늘 있다. - P33
마리아 몬테소리의 <어린이의 비밀>에는 ‘코 풀기 수업’에 대한 경험이 적혀 있다. 몬테소리는 ‘재미있는 수업’이라고 생각해 손수건 사용법 등을 가르쳤는데, 어린이들은 전혀 웃지 않고 귀 기울여 수업을 들었을 뿐 아니라 수업이 끝나고는 깜짝 놀랄 만큼 열광적인 박수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몬테소리는 어쩌면 자신이 "어린이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건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더러운 코 때문에 끊임없이 야단맞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제대로 코 푸는 방법을 몰라 애를 먹어 온 것이다. 어린이라고 해서 코를 훌쩍이며 지저분한 모습으로 다리고 싶을리 없었을테니, 배움의 기회가 너무나 소중했으리라는 이야기였다. 이 귀렵고 애틋한 일화에는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다. 어린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도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도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 양식을 고민하며,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 어린이들의 이런 노력을 보면서 새삼 깨닫는 게 있다. 사회생활이란 결코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해서는 안 되고, 보고 배워서 일부러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과자 부스러기를 모아 바닥에 버리는 것처럼 실수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바닥을 치워 주고 다음에는 부스러기가 덜 생기는 과자를 대접하는 것은 내 몫의 사회생활이다.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세상이 혼란가고 떠들썩한 때일수록 더 많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음만으로 되지 않으니 나도 보고 배우고 싶다. - P41
나는 현우의 생활 계획표에서 ‘놀기’가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 어른들의 ‘놀자’나 ‘놀이’와 달리 현우가 쓴 ‘놀기’에서는 반드시 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어디서 놀지, 무엇을 하고 놀지, 누구랑 놀지는 몰라도 날마다 놀기는 놀겠다는 의지. 그러고 보면 놀이의 핵심은 이런 ‘예측 불허’에 있지 않을까? ‘놀자’프로그램이며 온갖 ‘놀이’가 제공하는 적당한 환경과 도구, 규칙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이다. 결험의 폭을 넓히고 지식을 얻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놀기’는 예측할 수 없을 때 확실히 더 재미있다. 소득이 없어도 된다. 그 점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거창한 절차를 만들어 보물을 숨기고, 제대로 운영되기 어려운 대화를 꾸리고, 몇 번을 지옥을 탈출했다 다시 들어갔다 하는 데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아니, 정말 소득이 없을까? 그때그때 필요한 규칙을 만들고 고치고 응용하면서 배우는 것이 없을까? 여럿이 어울려 놀다가 억울한 처지가 되어 보고, 박수도 받아 보고, 믿기지 않는 승리나 아까운 패배를 경험하는 것은 어떤가. 같은 편이 되고 싶지 않던 아이와 한편이 되어 보고, 힘을 합치고, 의외로 손발이 맞아 가까워졌다가 다실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는 것도 소득이 아닐까? 복잡한 감정들을 곱씹으며 집에 갔다가 다음 날이면 모든 것을 깨끗이 잊고 어린이는 다시 놀이터로 달려 나간다. 나는 이런 순간들이 어린이가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자양분이 된다고 믿는다.
코로나19 이후로 우리는 결코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고들 한다. 나는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어떤 세상이 펼쳐지든 되도록 열린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가지는 꼭 지켜 내고 싶어진다.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진짜로 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바깥이 위험한데도 어린이를 나가 놀게 하자는 게 아니라, 어린이가 놀 수 있는 환경만은 어떻게든 만들자는 뜻이다. …….. "떨어져도 술대, 잡혀도 술래예요.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 하는 게 제일 좋아요. 더 많으면 정신없고, 더 적으면 심심해요." 나는 또 걱정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떨어져서 다치면 어떡해?" 그러자 하준이는 웃는 얼굴로 나를 안심시켰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그렇지, 모래가 있었다. 놀이터의 모래 때문에 뛰기 어렵고, 모래가 자꾸만 신발 속에 들어가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하준이는 바로 그런 모래를 믿고, 떨어져도 다칠 걱정 없이 아찔한 정글짐을 올랐던 것이다. 나는 마치 격언인 것처럼, 하준이의 말을 그대로 외웠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 P60
장 폴 사르트르의 자서전 <말>에는 그가 처음 글자를 익히던 때의 일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어린 사르트르는 책을 읽어 주겠다는 어머니 말에 미심쩍어하며 "요정들이 이 속에 있어?하고 묻고, 책에 매료된 뒤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책이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면서 책을 읽는 척한다. "한 줄도 거르지 않고 검은 흔적을 따라가면서 큰 소리로 아무 이야기나 혼자 지껄여 댔다."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거정, 노벨 문학상을 비판하며 수상을 거부한 날카로운 지성도 글자를 익히지 전에는 ‘지어내서 읽기’를 시연한 평범한 어린이였다.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난다. 마침내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뒤 사르트르는 인류의 지혜와 씨름하며 세계를 만났다고, 그것이 자신의 오늘날을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가리킨 ‘오늘날’은 그의 명성이 한창 높아진 60세 무렵이다. 그런데 사르트르 어린이도 글자를 익혔다고 해서 바로 읽기의 세계로 돌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호를 읽는 것과 의미를 아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초심자인 어린들은 책을 소리 내어 읽다가 머뭇거리는 순간이 자주 있다.
읽기는 쓰기와 나란히 간다. 읽기 시작한 어린이가 힘껏 글자를 쓰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대견하다.
나는 어린이가 글을 쓰다가 모르는 글자를 물어보면 되도록 책에서 찾아서 가르쳐 준다. ‘책에는 뭐가 많이 있다’ ‘선생님도 책을 보고 알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어린이가 읽고 쓰게 되면 더는 어른 무릎으로 올라오려 하지 않는다. 더군다가 속으로 읽기 시작하면 성큼 자기 세계로 들어가 버려 어른과 어느 만큼 거리마저 생기는 것도 같다. - P67
학년이나 성별 같은 것을 지우고 보면 어린이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느낌이다. 하나하나의 정보는 색다른 점이 없지만, 그런 것이 모이면 어린이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누구랑 비교할 필요가 없는, 어린이의 고유한 모습이다. ……… 독서교실 가방 말고도 늘 조그만 보조 가방을 메고 오는 어린이도 있었다. 정중하게 부탁해서 그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 구경한 적이 있다. 빗, 호루라기, 물휴지, 메모지, 볼펜, 예쁜 돌멩이 같은 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종일 놀이터에서 살다시피 하는 어린이라 솔직히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어린이 말은 이랬다. "놀다가 필요한 게 있어서 집에 갔다 오면 놀 시간도 없고, 엄마가 자꾸 그만 놀고 들어오라고 해서 한 돼요." 나중에 어머니께 들으니 그렇게나 신나게 뛰어놀면서도 틈틈히 머리도 빗고 손다 닦고 한단다.
내가 보기에 자녀들은 애초에 부모를 그렇게 닮지 않았다. 물론 얼굴이나 체형은 한 번씩 ‘아 맞다, 가족이지!’할 만큼 꼭 닮은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생활 습관, 말투 같은 것도 닮은 데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린이를 설명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이의 개성은 그보다 복잡하게 만들어진다.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과 스스로 구한 것, 타고난 것과 나중에 얻은 것, 인식했거나 모르고 지나간 경험이 뒤섞인 존재다. 어른이 그렇듯이.
어린이를 만ㅁ드는 것은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말로 사무적으로 보일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 P87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 주면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나도 TV가 환상을 판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화려한 것을보여 줘야 한다면 차라리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면 좋겠다. 어느 집 넓은 거실보다는 그쪽이 더 좋은 환상 아닐까. - P102
선생님은 어린이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만나는 전문가이고, 때로는 유일하게 만나는 지식인이다. 어떤 어린이에게는 자기가 아는 가장 친절한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선생님들은 밀려드는 크고 작은 업무 때문에 어떤 부분에는 소홀할 수 있다. 어린이와 밀착한 생활을 하는 만큼 사적으로 감수할 일이 많으니, 때로는 냉정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개인적인 한계로 어린이나 보호자를실망시킬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선생님들의 실수에 너무 엄혹한 것이 아닐까? 한 명의 노동자이기도 한 ‘교사‘에게 ‘스승‘의 모습만을 요구하는 것 아닐까? 특히나 특수학교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그 길에 들어선 것 자체를 ‘헌신에 대한 약속‘으로 여기고 그분들의 희생을 당연하게여기는 것은 아닐까?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어서 선생님들이 나를 오해했거나 아프게 한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런 선생님들의 얼굴은 그저 뿌옇게만 남아 있다. 반대로 뚜렷이 기악나는 것도 있다. "소영이는 인사할 때 웃는 얼굴이어서 소영이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져"라고 하신 선생님의 웃는 얼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밥은 꼭 먹고 다녀야 한다고 근엄한 얼굴로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다정한 눈동자, 우리 모둠에서 제일 냄새가 많이 나던 아이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도시락을 드시던 선생님의 모습, 전학생인 나를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으며 "나는 새로운 아이가 너무 좋아"라고 환영해 주신 선생님의 목소리만은 어제의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른 김소영이라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어린이 김소영은 선생님의 사소한 실수들을 쉽게 용서한 것 같다. 아마 내가 자라느나 바빠서 서운한 순간들을 되도록 흘려보낸 모양이다. 대신에 선생님들에게서 배운 것, 좋은 느낌, 행복한 감정은 모두 남아서 나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 P118
동네 식당에서 어린이 둘과 함께 와서 식사하는 어머니에게 사장님이 "아기들 덜어 먹을 그릇 따로 드릴까요?"라고먼저 물어보시는 것을 보았을 때, 아파트 1층 현관으로 자전거를 끌고 다가오는 어린이를 보고는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가 자동문이 닫히지 않게 붙잡아 주시는 아랫집 할머니를보았을 때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어린이들에게 세상에대한 좋은 인상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보는 듯하다. - P146
나는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쓰고 나니 후련하다. 그런 내가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일단, 내가 수업료를 받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선택한 어린이와 부모님으로부터 수업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그런데 사랑으로 가르치면 어떻게 되나. 돈을 받아서 사랑을 주는 것이 된다. 만일 어린이와 수업을 그만하게 되면, 어린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도 중단해야 하나. 계속 사랑한다면 수업료를 내는 어린이들에게는 불공평하지 않나. 이쯤 되면 어떻게 해도 계산이 이상해지고, 계산을 하고 있는 나도 이상해진다. 유료 수업에 사랑을 개입시킬 수는 없다. 그것이 나의 직업 윤리다.
어린이는 이성으로 가르친다! 이것이 나 자신의 사훈이다. 어린이 한 명 한 명을 존중하고, 그들의 지적 정서적 성장을 돕고, 좋을 때 좋게 헤어지는 것. 직업 윤리와 진실한 자세만 있다면, 굳이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고도 성과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랑’이란 내가 다루기에 너무 크고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마음이 드러날지도 모르니 늘 조심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 P149
묻어 두었던 이 일이 생각난 것은 5세 어린이의 사망 사건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기사에 의하면 이 어린이는 3세때 어머니의 동거남에게 학대를 당했다. 어머니의 신고 이후 어린이는 동생과 보호시설로, 어머니는 여성 쉼터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머니는 퇴소 후 그 동거남과 결혼했다. 계부, 즉 가해자는 아이들에 대한 접근 금지 기간이 끝나자 보호시설에 있던 아이들을 되찾아 왔다. 기사는 가해자의 불우한 어린 시절, 아이들을 ‘부모 손으로 키우려던 의지 등을 상세히 다루었지만 내가 보기에 요지는 폭력 피해자, 그것도 자기방어가 불가능한 5세 어린이를 가해자의 품으로돌려보냈다는 사실이다. 집에 돌아온 어린이는 ‘훈육‘이라는 명목의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굶어야 했고, 목검으로 수백 차례 맞았으며, 개와함께 화장실에 갇혔다. 결국 묶인 채로 탈진한 어린이는 복부 손상으로 죽었다. 검찰은 가해자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징역 22년을 선고했다. 가해자가 어렸을 때 부모의 이혼, 폭력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형을 낮춘 이유였다.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결과 앞에서도 가해자의 사정을 헤아려 준 것이다. 형을 모두 채운다 해도 가해자는 중년에 자유를 찾는다. 가해자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일을 범행을 정당화하는 데 소비하는 것은 학대 피해 생존자들을 보욕하는 일이다. ‘학대 대물림’은 범죄자의 변명에 확성기를 대 주는 낡은 프레임이다. 힘껏 새로운 삶을 꾸려 가는 피해자들을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예비 범죄자’로 보게 하는 나쁜 언어다. 가정에서 아이를 학대해선 안 되는 이유는 아이를 아프게 하고, 존엄을 무너뜨리고,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러니까 칼국수를 먹다가, 빨래를 널다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갑자기 생각하는 것은, 다섯 살 어린이의 삶이다. 모든 인간은 소중하다거나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간은 소중한지 아닌지 따질 수 없는 존재라고 배웠다.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똑같은 자격을 갖는다고 배웠다.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내 말은 다섯 살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 P161
독서교실을 열면서 나는 양육서를 열심히 읽었다. 어린이를 가르치고 어린이와 함께 지내려면 부모님들이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린이에게 옳지 않은 사인을 주면 어떡하나, 내가 어린이의 ‘발달 단계‘를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하나, 혹시라도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어린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양육서를 읽는다고 해서 자신감이 생긴다거나 감이 잡힌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어떤 책은 설명이 모호하고 자꾸만 ‘아이마다 다르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서 허탈했다. 어떤 책은 너무 단호하고 독자를 ‘아무것도 모르는엄마‘ 취급해서 읽기 불편했다. 너무 극단적인 사례를 끌어와 부모를(사실은 엄마를) 야단치듯 가르치는 책도 있었다. 내가 당장 어린이를 만나려는 게 아니라면 읽고 싶지 않은 책들도 있었다. 그러니 부모님들은 어떨까. 비로소 ‘자녀 교육시장은 불안을 먹고 큰다‘라는 말이 실감났다.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내용이나 어조를 떠나 대부분의 양육서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이의 개성을 존중해라’인데, 어째서 부모의 개성은 존중하지 않는 걸까? 세상의 엄마 아빠는 다 비슷한가? 양육서니까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당연하지만, 양육자에게 이렇게 관심이 없어도 되나? 그런 상태에서 ;이럴 땐 이렇게‘ 식으로만 접근하면 결과적으로는 아이들도 비슷해지는 것 아닐까? 나의 경험으로는 어린이만큼이나 부모님들도 각자 개성이 뚜렷하다. 부모님들은 각자 자기 방식으로 아이를 돌보고 사랑을 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부모님들만큼이나 아이들도 부모를 사랑한다. 부모님보다 아이들을 더 자세히 보는 입장이라 그럴 수도 있는데, 사실은 아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다. 나이가 더 어린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들은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것 정도가 다르다고 할까. 물론 부모로서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위해 인생의 속도와 방향을 조정하고, 어느 순간까지는 아이 몫의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도 감수하는 것이 양육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까지가 양육이 아닐까 하고.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겠지만 아마 그만큼 무겁지 않을까 그것 역시 짐작만 해본다. - P176
나는 어린이들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했다. 마음 같아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서로서로 존댓말을 쓰고 친한 사이에만 반말을 쓰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그런날이 오기 전까지는 어린이의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겠다고 다짐한다. 어린이가 표현한 것만 듣지 않고, 표현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겠다고. 어린이가 말에 담지 못하는감정과 분위기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어른이 되겠다고. - P192
어린이는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우야 한다. 어디서 배워야 할까? 당연하게도 공공장소에서 배워야 한다. 다른 손님들의 행동을 보고, 잘못된 행동을 제지당하면서 배워야 한다. 좋은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그에 걸맞은 행동을 배워야 한다. - P213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성별이나 자녀가 있고 없고가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 P219
행사를 반복하다 보면 지역마다 ‘어린이회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도서관 강당이나 학교 시설도 쓸모가 있지만, 나는 ‘어린이 전용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도서관은 좋은 곳이지만, 어린이가 하고자 하는 모든이 책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 학교는 좋은 공공시설이지만, 어린이의 일을 모두 교육의 틀에서만 진행할 수는 없다. 어린이가 도서관과 학교 외에 어린이 전용 공간을 가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부득이 학교 강당에서 공연한다면, 어린이가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다른 학교에 가서 보도록 기획하자. ‘학교‘라는 공간을 객관적으로 보는 한편, 모르는 어린이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기회가 될 것이다. 어른들은 지역의 모든 어린이들이 공연을 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보호자가 관심이 없거나 정보를 모르더라도 어린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도록 공무원과 통반장이 나서야 한다. 지역 어린이들을 챙기는 것은 선생님만의 몫이 아니다. 지역 사회 전체가 어린이를 찾아 나서고, 어린이를 알아보고, 어린이를 챙기면 좋겠다. - P242
온 나라 국민이 힘을 합쳐 점검할 게 또 있다. 어린이 권리 교육이다. 나는 어린이날에 맞추어 어린이가 있는 가정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가정에도 해마다 ‘유엔 아동 권리협약‘이 배포되었으면 좋겠다. 어린이가 있는 집에서는 어린이와 함께 소리 내어 읽고, 다른 어른들도 꼭 되새겨 읽어보면 좋겠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다. "아동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해 자유럽게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동의 의견을 잘 듣고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12조) 이런 글을 쓰는 김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린이날과 관련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볼 때 내가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어린이 여러분,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금지하는 것이다. 모든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어린이날을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을 뜻으로 하는 축복의 말이겠지만, 어떤 어린이에게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말이다. 어른들은 그런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 P245
어린이, 청소년을 포함한 ‘어린 세대’의 그릇된 면이 드러날 때면 곳곳에서 ‘교육의 실패’, ‘시민 양성의 실패’ 같은 탄식을 보게 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혹시 나는 이 말에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담았던 게 아닐까? 마치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는 잘 못한 게 없고, 신입을 잘 훈련시키지 못한 가정과 학교를 점검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어린이는 사회 바깥에서 다 자란 다음 사회에 배치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 속에서 자란다. 가정에서 보는 것,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기초로 삼아서 세상을 보고 세상에서 배운다. 사회의 문제는 학교, 가정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온라인개학 이후 학교가 단지 건물과 교과 과정으로 이루어진 게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학교 자체도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학생과 학생이 관계 맺는 사회다. 가정도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 사회의 돌봄 없이 어린이를 가정에만 내맡길 때 어떤 참혹한 학대가 일어날 수 있는지 뼈아프게 확인하고 있다. 교육을 이야기하려면 사회를 보아야 한다. 성범죄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감염병 사태 중에 도서관보다 성매매 업소가 먼저 문을 열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함부로 대하고, 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마이크가 주어지는 세상에서 학교와 가정이 청정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교육의 실패를 선언하고 싶다면 세상의 실패를 선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결심했다. 냉소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절망적인소식들이 쏟아질 때면 자연히 포기하는 쪽으로 몸과 마음이기운다.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짐을 결국 어린이가 떠안을 것이다. 나는 조그마한 좋은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어린이에게 주고 싶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자라면서 모양이 잘못 잡힌 부분을 고칠 것이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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