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이자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중요한 기본권이다. 표현은 사람마다 그 해악을 느끼는 정도가 각기 다르고 사회의 자정 능력에 의해 그 해악이 치유될 수도 있다. 그래서 표현에 대한 개입은 항상 신중해야 한다. 일베나 여성 혐오가 문제라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표현에 머물러 있는 한은 쉽게 규제 카드를 꺼내들 수 없다는 것이다. - P14
표현의 자유는 권리 중의 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권리 주장의 출발점이다. 부당노동과 저임금으로 고통받는 노동자, 부당한 차별에 시달리는 이주자, 고속버스 탈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장애인,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 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없이 다른 권리의 보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 특히 소수자의 문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란이 ‘자유 확대’가 아니라 ‘자유 축소’로 귀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사 ‘아주 공평하게’ 진보와 보수, 강자와 약자, 좌파와 우파의 표현의 자유를 모두 축소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제약받는 정도가 커질수록 이득을 보는 쪽은 강자다. 서로 할 말을 못 하는 상황은 ‘현상 유지’를 바라는 강자의 입장에서 그리 나쁘지 않다. 반면 소수자의 입장은 정확히 그 반대다. 소수자에게는 더 많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야 현재의 부당한 현실을 바꿀 수 있고 그들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 P19
사전적 의미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혐오는 ‘혐오시설’, ‘혐오식품’처럼 시설이나 음식을 수식하는 말로 주로 쓰여왔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 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인데, 영어에서 ’헤이트‘도 극도의 싫음, 역겨움, 적대감을 뜻한다. 헤이트나 혐오 모두 상당히 강한 늬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혐오표현에서의 혐오는 이러한 일상적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여기서 혐오는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뜻한다.
혐오표현은 ’차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유권규약은 차별, 적의, 폭력 등을, ’유럽 평의회 권고‘는 민족주의, 자민족중심주의, 차별, 적대 등을 나란히 혐오표현의 개념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 혐오표현은 소수자를 사회에서 배제하고 차별하는 효과를 낳는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승진시험에서 탈락시키는 것도 차별이지만, 회사 내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을 하는 것 역시 차별과 다름없다. 혐오표현 자체가 성소수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줄 분만 아니라 차별로 직결되는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현과 행위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없으며 표현이 곧 차별의 "사회 현실을 구성"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 P24
표현 방식 중 가장 해악이 크다고 간주되어온 것은 ‘선동 incitement’이다. 대중들에게 차별과 적대를 선동하여 구체적인 행동이 촉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면 선제적인 개입이 불가피하다. 자유권규약은 사실상 혐오의 선동, 고취를 금지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개별 국가의 혐오표현금지법도 대개 이 선동형 혐오표현을 주된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 반면 유럽평의회 권고처럼 선동, 고취뿐만 아니라 확산과 정당화 등도 혐오표현의 개념에 포함시켜 혐오표현을 광범위하게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 정리해보자면, 혐오표현이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정도로 그 개념을 정의해볼 수 있다. - P31
"우선 필자는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이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맹활약했던 이준석 씨는 동성애에 대한 칼럼을 이렇게 시작했다. 칼럼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면서 동성애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취하자는 주장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히 ‘합리적’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칼럼이었다.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점은 그 칼럼이 놓여 있는 현재 한국 사회의 맥락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혐오표현이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하여 다소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차별이 현존하는 한 아무리 사소하고 점잖은 표현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 P40
<시사IN>과 아르스 프락시아가 디시인사이드 ‘메르스갤러리’와 나무위키의 ‘메갈리아’ 항목을 분석한 결과, 여성혐오를 당한 여성들의 감정적 반응은 ‘공포’로 귀결되는 반면, 남성혐오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쪽의 검정선에는 공포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남혐과 여혐이 사회에서 작동하는 기제가 똑같다고 볼 수 없고 남혐을 여혐과 비교하여 ‘그게 그거고 다 나쁘다’는 식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 P44
침묵과 무시가 대안일 수는 없다.
회사 회식자리다. "전 동성애가 참 싫어요. 뭐 우리 회사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서 차별받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다른 직원들이 맞장구를 친다. "맞아 맞아. 난 솔직히 소름끼쳐. 그렇다고 차별하면 안 되겠지만 말이야." 옆에는 동성애자 직원이 있다. ‘차별하면 안 된다’는 명제에만 동의한다면 ‘동성애 반대’, ‘동성애에 비판적’이라는 말을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동성애에 비판적이다"라는 내용의 칼럼이 신문에 실려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이 차별을 조장하고 소수자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면 이 엄중한 현실을 외면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이 아무런 제지 없이 발화되는 사회를 두고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듣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민감하냐고 타박할 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사회적 현실을 고려하여 발언하는 게 윤리적으로 옳다. 그것이 공적 인물의 공적 발언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공인은 자신의 발언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세심하게 고려하여 신중하게 발언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 차별의 맥락이 있는 한, 표현의 수위와 상관없이 혐오표현은 차별을 재생산하고 공고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혐오표현의 개념을 넓게 설정할 필요가 있고 동시에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혐오표현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 P49
증오범죄란 무엇인가
증오범죄 여부를 가리는 것은 ‘편견의 동기’다. 편견, 혐오, 혐오표현, 그리고 증오범죄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이 증오범죄도 저지른다. - P95
혐오표현도 표현인 이상, 이른바 ‘사상의 자유시장’에 맡기자는 주장이 있지만, 사상 시장에서의 ‘자유롭고 평등한 경쟁’을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 숙의의 잠재성을 과대평가" 한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실제로 시장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은 소수자이고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공정한 경쟁’을 기대하기 어렵다. 다수자들이 공론을 장악한 상황에서 소수자들 스스로 혐오표현이 맞서 싸울 수 있겠냐는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고 제3자인 청중들이 혐오표현이 발붙일 곳이 없도록 충분히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혐오표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현실의 권력관계를 인정하고 시장의 실패를 방치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 P147
형성적 규제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반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교육과 홍보를 통해 인식을 제고하고, 소수자 집단에 대한 각종 지원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형성적 규제는 궁극적으로 혐오 표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하는 역할도 한다. 예를 들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청소년 성소수자 상담센터를 지원한다면 청소년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퀴어문화축제를 지지하고 지원한다면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규제를 ‘금지하는 규제’와 대비되는 ‘지지하는 규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입은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형식적인 자유가 주어져도 소수자가 실제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진정으로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국가 개입의 목표는 바로 이 ‘진정한 자유’와 ‘실질적 평등’의 실현을 위해 소수자의 ‘자력화 empowerment’를 지원하고 시민사회의 대항 담론을 활성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것은 금지와 처벌을 위한 개입이 아니라, 개인의 권한을 강화하고 그들의 대항표현을 지원하는 개입을 말한다. 이를 통해 소수자 및 그와 연대한 시민사회가 혐오표현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혐오표현에 대처하는 가장 원칙적인 방법이다. - P152
형사범죄화로 인해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에너지가 처벌에만 집중된다는 문제도 있다. ‘합법’이라고 인정하면 사회는 그것을 ‘문제없음’으로 받아들이고 문제 해결을 위한 추가적인 노력을 회피하곤 한다. 반면, ‘불법’으로 판결하여 처벌에 성공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착시현상이 생기고 국가는 자기 역할을 다했다는 면죄부를 얻어 더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등한시할 수 있다. 법이 발화자 처벌에만 머무른다는 것도 문제다. 혐오표현의 원인에는 복잡한 정치, 사회, 경제적 배경이 깔려 있어서 이런 것들을 도외시한 채 혐오표현의 ‘발화자’만 처벌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범죄를 낳은 것은 ‘사회’인데, 처벌받는 것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된다는 문제다. 금지와 처벌로 인해 겉으로는 법규제가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수면 아래에 있는 혐오와 차별은 언제든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 P160
증오범죄자들은 흑인, 여성, 성소수자를 고립시키고 배제하려고 한다. 이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은 차별과 배제를 획책하는 이들을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몫이기도 하지만 법과 정책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며,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자가 일관되게 견지해야 할 입장이기도 하다. - P201
혐오표현이 빈곤, 불평등, 실업 등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결부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일자리 문제’와 연결시킨다거나 ‘세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 동성애에 반대해야 한다거나 5.18유공자의 공무원시험 가산점에 대해 "공부해봐야 소용없다"고 선동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단기간에 극복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위기가 혐오와 만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편견이 항상 발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관련되면 쉽게 폭발할 수 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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