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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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를 혐오하거나 피하고, 그에 무심하거나 편견을 갖고 그것을 욕망하는 모든 일은 단순하고 1차원적인 반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체에 대한 혐오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부정이고 그에 대한 무심함이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아닐까?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며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을 투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 P266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을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그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오랜 기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라는 요구와도 같다. 따라서 합리적/정당한 편의 제공은 장애인이 사회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서 자원분배를 평등하게 하는 정의 실현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의만이 문제라면 계단이 10개 있는 회사에 장애인이 다니게 되었을 때 동료직원들이 그 장애인을 번쩍 안거나 업어서 사무실까지 옮겨주는 것만으로도 ‘정당한 편의’ 제공이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은 ‘정당한 편의 제공’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그런 방식은 장애인을 사무실로 들어가게는 하지만, 그가 휠체어를 자기 몸의 일부로, 일종의 ‘스타일’로 삼아 오랜 기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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