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문천의 한국어 비사 - 천 년간 풀지 못한 한국어의 수수께끼
향문천 지음 / 김영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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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소한 ‘역사언어학’ 분야를 일반 대중에게 흥미롭게 전해지도록 돕는 데 있어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구성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잘 짜여진 직물과도 같은 책이라 생각된다.
한마디로 “생소한 역사언어학의 대중화 실현에 초석과 같은 책”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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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문천의 한국어 비사 - 천 년간 풀지 못한 한국어의 수수께끼
향문천 지음 / 김영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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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단어에 눈길이 갔다. 바로 비사(祕史)이다.

 

왜 비사라는 단어를 썼을까?

천 년간 풀지 못한 한국어의 수수께끼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혹시 우리 한국어의 탄생과 관련하여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훈민정음에 관한 속이야기라든가, 일설에 전해지는 녹도 문자, 신지 문자, 가림토 문자 등과 관련된 내용이 쓰여 있는 책일까?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에 걸쳐 변화된 한국어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내용일까?

 

여러 의구심을 품은 채로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를 읽었다.

 

아래는 [들어가며]에서 저자가 한 말이다.

언어는 진화합니다. ... 역사언어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것이 진화생물학과 참 닮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p15) ... 종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변화는 필연적이며 합리적인 동기를 늘 가지고 있습니다. ... 이 책에서는 언어 변화의 수많은 동기 중에서도 언어 교류에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p17)”

 

역사언어학’? 내게 매우 생소한 학문 이름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통일신라 751년 발간),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문서인 직지심체요절’(고려 1377년 발간)의 나라이다. 특히 조선은 역대 최강의 기록 강국으로, 훈민정음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조선왕조 의궤 등 다양한 기록물이 존재하며, 이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2023년 기준 세계기록유산 18건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아시아 1, 세계 5위에 해당된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기록에 진심인 나라이기에, 중국 25사와 같은 역사서 체계나 일본 사서들처럼, 분명 각 시대별 사서나 주요 서적들이 기록되고 간행되어 풍부했을 것으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고조선~고려시대 사이의 기록물이 오랜 역사에 비해 너무도 빈약하다. 수많은 전란, 조선 태종 시기 분서(焚書) 사건, 세조예종성종에 이은 고대역사서를 비롯한 각종 서적들의 수집(분서를 했는지 불확실하지만, 당시 긁어모았다는 상고사의 역사서적은 현전하지 않음), 일제강점기의 수탈 등으로 인한 영향이 클 것이다.

각 시대별 국가의 역사는 문헌 비교, 발굴 사료 등을 바탕으로 고증비정하여 해석해볼 수 있겠지만, ‘언어는 어떤가.

언어는 사람의 음성으로 내뱉는 말소리이기에, 과거에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였고 어떻게 발음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만약 문자로 기록되어 있더라도 발음방법을 알아내기가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말의 경우 고대에 고유 문자체계가 미비하여 한자를 차용하여 기록했는데, 발음방법은 고사하고 원래의 표기조차도 파악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언어의 유래, 표기, 발음 등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이를 알아내고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역사언어학이다. 이 학문은 언어학, 고고학, 역사학, 인문지리학 등이 총동원된 독특한 학문이라 하겠다.

 

우리나라는 고래(古來)로 우리만의 언어체계가 있었고 이는 현대의 한국어로 이어졌다. 다만 고대의 기록물이 현저히 적어서 한국어의 유래, 표기, 발음 등에 관한 역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는 한국어의 이와 같은 불가사의한 역사로 이끄는 책이다. 그래서 비사(祕史)’라는 단어를 선택했던가보다.

 

이 책에서는 한국어의 시대구분을 아래와 같이 하고 있다.



직관적으로 볼 때, ‘현대 한국어와 중세 한국어는 직선적인 관계’(p26)에 있고 수많은 문헌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관찰’(p26)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현대 한국어와 중세 한국어가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면, 비록 삼국시대에도 한자를 빌려 자국어를 표기하는 수단이 활발히 사용되었지만 고대의 표기 전통이 단절되었더라도 중세 한국어와 고대 한국어도 연결되어 있어야 할 것(p26)이라고 저자 향문천은 말한다.

 

고대 한국어 자료와 이해가 결여된 현 상황에서 그나마 신라 향가(鄕歌)로 대표되는 문헌 자료가 남아있어, 그간 잘 연구된 중세 한국어를 향가에 투영시키는 방법으로 고대 한국어 신라어를 연구하였다는데, 향가를 중세 한국어의 시각에서 보려는 불가피한 시도는 신라어와 중세 한국어의 관계에 대해 착시 효과를 낳게 되었다(p27)고 지적한다.

 

나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면서 신라어가 그대로 고려시대 중세 한국어로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것 자체가 착시라는 뜻이다. 전혀 뜻밖의 주장이었다!

 

후기 신라어에 나타나는 2가지 개신(改新 : 언어 요소의 변화)이 중세 한국어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p29)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본문에 이어진다.

 

그리고 일본어는 백제어의 후예라는 말을 수도 없이 접했기에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p36-42)

 

또한 반도 왜어라는 생소한 단어가 등장하고, 고대에 한반도에 왜어가 존재했다고 한다!

책에서는 한반도에 한때 존재했던 일본류큐어족 언어의 흔적이라고 언급하는데, 언어학자 존 휘트먼(John Whitman)이 고고학적 연구를 토대로 논증했듯이 일본류큐어족 집단인 야요이인이 산둥반도로부터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이주했으므로, 반도 왜어의 존재는 흔들림 없는 사실(p50-51)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페이지 107-119[대륙에서 온 일본어족] 꼭지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최근에 성남시 복정동 일대에서 발견된 유물(한성 백제시대 서울 지역에 고대 일본인 거주 가능성을 시사, 한겨레 2024.03.07.), 전라도 영산강 일대에서 발굴된 왜계 장고형 무덤 등이 일본류큐어족 집단의 한반도를 통한 일본 열도로의 이주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개인적인 추측을 해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고대 한국어라는 것이 무엇인가.

 

국어학계의 한국어 계통론의 전통적인 통설에서는 부여(夫餘)계 언어와 한()계 언어로 구분하고,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등을 그 갈래로 나누고 있다. 고조선 이래 삼국시대가 존재했으므로, 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저자 향문천은 다른 주장을 펼친다.

부여계와 한계를 구분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를 구분하는 주된 근거였던 삼국사기》〈지리지의 지명 자료를 세심하게 바라보면,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를 굳이 서로 다른 분류 체계로 나누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p46)

이에 저자는 고대 한국어라고 통칭하면서, 한국어의 계통수를 간략화 하여 소개한다.(p57)

 


 

[2. 고대 한국어의 중심성]에서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가 간, 민족 간에 일어난 단어의 차용, 차용어를 다루고 언어 간 친연 관계 등을 살핀다.

 

한반도 주변에는 다양한 세력이 존재해왔습니다. 한민족의 조상은 그들과 화친을 맺기도 했고, 교역을 하기도 했으며,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원하건 말건 주변 세력과의 접촉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고대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생한 언어 접촉은 한국어사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베일에 싸인 고대 한국어의 난제를 해결할 중요 실마리를 만들었습니다.”(p60)

 

우리의 메주와 일본의 미소가 같은 단어에서 나왔고, 이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역사는 적어도 1,300년 정도 된다(p67)고 한다. 게다가 여진만주어에도 미수가 존재한다.(p69)

저자는 백제를 경유해 미소라는 식품과 단어를 차용했을 일본어와 고구려를 통해 미수를 차용했을 여진어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 언어가 동질적이었거나 아주 가까웠다고 짐작할 수 있다’(p71)고 말한다. 기타 수십 페이지에 걸쳐 멧돼지, 오이, 염통, 부처, , 구두, 보리, 송골매, 업진살, 선지, 순대, 수라상, 냄비, 담배, 고구마 등의 차용어를 상술(詳述)하면서 저자는 말한다.

 

이처럼 차용어의 존재는 집단 간 문화 교류의 살아 있는 증표입니다.”(p77)

 

특히 [윷놀이로 보는 동물 어휘] 꼭지(p120-127)를 통해 도, , , , 모의 어휘 유래를 살펴볼 수 있었고, [심마니들의 은어] 꼭지(p130-132)에서 은어들이 중세 한국어에서 직선적으로 이어지거나 여진만주어로부터 차용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김치의 명칭이 외국에 전래된 사례도 소개한다.



김치가 옛날 쓰시마 방언에 유입되어 사용되었던 사실을 문헌 왜어유해(1782년경 조선 숙종 때 발간, 사역원 일본어 어휘집)으로부터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김치의 명칭이 외국어로 전래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p136)

 

[3. 고유명의 세계]에서는, 언어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인명지명관직명 등의 고유명을 통해 고유어의 가치를 선보인다.

 

고대 한반도 국가들은 ... 구어에서는 고대 한국어를 구사했다고 하더라도, 문헌상에 나타나는 언어는 한문이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고대 한국어에서 고유하게 사용되었던 사람의 이름땅의 이름관직의 칭호 등은 한문으로 번역될 수 없었고, 이들은 주로 차자 표기, 즉 한자의 발음을 빌려서 적는 형태로 문헌 기록에 남았습니다. 때문에 고대 한국어의 비밀을 밝히는 데 고유명이 갖는 가치는 대단합니다.”(p158)

 

경주 금관총에서 2013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네 글자 명문이 새겨진 환두대도가 발견되었다.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 연구자에 따라 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 자비 마립간 등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역사학고고학 관점에서는 의견만 분분할 뿐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저자 향문천은 이렇게 단언한다!

 

하지만 역사언어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사지왕은 자비 마립간이어야 합니다.”(p163)

 

이사지왕의 비정(比定) 과정에서, 역사언어학의 본색이 그대로 드러난다. 역사학, 고고학을 통해 드러난 이사지왕 명문, 역사서 삼국사기문헌과 인문지리서 지리지등을 통한 근거 발굴, 실제 지명(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옛이름 노사화현’,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옛이름 노사지현) 확인, 언어학의 음운변화 확인 등 다양한 학문 분야가 총 동원된 것이다.

 

( )(이 사) nɛsɛ[네세] : 자비롭다 ɛ[]>o[] 음운변화 nosɛ[노세] 자비

 

“‘자비롭다, 너그럽다라는 의미의 고대 한국어 nɛsɛ[네세]nosɛ[노세]는 같은 단어의 통시적 변종이며, 이사지왕의 의미는 자비 마립간과 일치하므로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 새겨진 명문 尒斯智王(이사지왕)은 자비 마립간을 가리킵니다.”(p166)

 

이외에 신라의 국호가 해상경로를 통해 서역으로, 육상경로를 통해 북방으로 전해진 경위를 밝히고 있다. 특히 나는 서울이라는 단어가 신라 서라벌에서 유래되었고 한민족()’의 어원이 크다는 의미를 갖는 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 향문천은 페이지 188-200에 걸쳐서 그에 대해 나의 상식을 완전히 깨뜨려버리는 주장을 펼쳐서 너무도 흥미로웠다!

 

[4. 격변하는 근대]언어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근대 일본이 서양에 공식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54년에 미국과 체결한 ·미 화친 조약(神奈川 條約, 가나가와 조약)’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 전부터 서유럽 일부 국가들과 종교적, 문화적, 상업적 교류를 하고 있었다. 1540년 이전에 포르투갈인이 일본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유럽식 화기를 전파하였고(p216), 1549년에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세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를 진행하며 일본의 언어사인쇄사종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뒤이어 스페인, 네덜란드도 일본을 방문한 바 있는데,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항구를 통해 일본과 상업 교류의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포르투갈일본어 사전 일포사서(日葡辭書), 네덜란드일본어 사전 하루마와게(ハルマ和解, 波留麻和解)등이 그 시기에 편찬되기도 하였고, 일본 내에서 네덜란드의 학문이란 뜻의 난학(蘭學)이 융성하였다. 특히 서양 학문에 대한 관심은 서양의 학술용어에 대응되는 번역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 시기 산소질소탄소금속용해시약 등 새로이 고안해낸 신어(新語)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p215-219)

 

현대 일본어는 화장실을 토이레(トイレ), ‘여권을 파스포토(パスポート)라고 하는 등 수많은 외래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왜 근대기 일본은 번역주의를 취했을까?(p219)

 

그 당시 일본어에는 추상어가 없으므로 일본어를 계속 사용하면 도저히 서양 문명을 일본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며 영어를 일본의 국어로 삼아야 한다.”는 초대 문무대신 모리 아리노리(森有礼)가 주장하였는데, 이에 자유민권운동투사인 바바 다쓰이(馬場辰猪)영어를 국어로 받아들일 경우 인도-영국 식민지-의 상황처럼 계층 간 이원화된 언어 습관이 생겨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기에 국민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바바의 의견대로 서양의 추상적 개념에 대응되는 수많은 번역어를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한다.(p221)

 

이런 이유로 자유개인사회권리주의 등의 추상 어휘들이 한자로 이루어진 수많은 근대 번역어로 고안되었고, 이렇게 탄생한 신조어는 현대 일본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상 어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와 중국어에도 대거 유입되어 동아시아 공통 어휘로서 자리잡게 되었다.(p224)


 

실제로 한국어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데,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를 기준으로 보면 한국어 어휘 가운데 한자어가 무려 전체의 53%를 차지한다(p236)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가 한자문화권이다보니 한자어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서 놀라운 점을 저자 향문천은 알려준다!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 한자어의 상당수가 근현대 일본에서 창조된 번역어라는 사실입니다.”(p236)

 

물론 근대 중국을 통해 들어온 화학, 전기, 염증 등과 같은 한자번역어들도 다수 있으며, 뜻 번역이 아닌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단어들이나 중화요리 명칭 등에 대해서도 후술한다.

 

그리고 일본제 속어가 우리 생활 중에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고 한다!

 

현대 한국어에 대한 일본어의 영향은 어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각종 숙어와 관용 표현에까지 이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어 화자는 이쪽 방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극히 드뭅니다.”(p293)

 

우리가 문학 작품에서 접하는 관용구,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날마다 접하는 굳은 표현들 속에 일본제 속어가 있다는 것.

 

 

한국어 문어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일본의 문장가들이 사용하던 숙어적 표현을 직역해 한국어에 번역차용해온 것입니다. (또한) 에 대한, 에 의한, 에 관한 등의 불완전 동사 표현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번역차용한 결과입니다.”(p294)


이를 통해 일제 치하의 35년 간 한국어가 굉장히 다대한 변화를 겪었고, 일본어로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책 뒷부분 [부록]은 꽤 두껍다. 거란 소자, 한자의 약자 제정사 등이 실려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출판된 계기가 재밌다.

“2020821, 김영사로부터 한 편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한중일 언어 인문학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써보지 않겠냐는 출간 제의였습니다.”(p303)



 

저자 향문천은 현재 역사언어학을 중심으로 하는 콘텐츠로 176천여 명 구독자를 보유한 지식 유튜버이지만, 2020년 당시엔 구독자 7만여 명의 작은 유튜브 채널이었다고 한다. 하필이면 군입대와 맞물렸고, 질적으로 양적으로 높은 수준의 정보를 체화하기 위한 폭넓고 깊은 자료 조사를 거듭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원고를 갈아엎어 가며 약 3년 동안 저술에 집중하여 20242월에 드디어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소한 역사언어학분야를 일반 대중에게 흥미롭게 전해지도록 돕는 데 있어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구성면에 있어서도 이 책은 상당히 잘 짜여진 직물(織物)과도 같은 책이라 생각된다.

 

한 마디로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생소한 역사언어학의 대중화 실현에 초석과도 같은 책이라 할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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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청색지시선 7
이어진 지음 / 청색종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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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는 읽을 때마다 내 뇌리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내 심상에 ‘시어’와 ‘시 표현’ 등이 알알이 맺히는 특이한 경험!
이어진 시인의 내면이 자유로이 펼쳐져 있는 초현실적 시 세계!
시를 곱씹어 읽으면, 마음의 도화지에 판타지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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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청색지시선 7
이어진 지음 / 청색종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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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라는 시집 제목이 이상하리만치 눈에 들었다. 우선 동요 도깨비 나라가 떠올랐고, 혹부리영감과 같이 도깨비가 등장하는 전래동화가 떠올랐으며,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 도깨비가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집도깨비가 왠지 모를 이질감이 들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들고, 그래서 눈에 들었던 것이다.

 

시집 제목만으로 추측하건대 시어(詩語)가 풍겨낼 수 있는 은유와 활유, 의인, 대유, 중의 등을 비롯하여 시()가 품을 수 있는 무궁무진한 상상력, 거칠 것 없는 표현력 등이 판타지를 이루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느낌의 현대적인 도깨비 나라를 구축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를 책 제목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기에, 톺아볼 요량으로 시집 책장을 열었다.


 

시집의 목차는 총 4()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 제목이 가히 수상하다.

 

내 차가운 심장에 기름을 부어 줘

장미의 팔을 잘라먹는다는 소문이었다

팔을 비틀어 던지고 더 먼 공중에서 솟아나기를

하늘의 동공 안에 코끼리 한 마리 앉아 있었고

 

~! 목차만으로도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냄새가 풍겼다.

 

~ 이어진 시인의 시를 보러 가자.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궁금하기만 하였다. 장 표지를 넘겨 시 수선화의 첫 줄을 보자마자, 이거 장 제목이잖아?! 싶었다.

 

내 차가운 심장에 기름을 부어 줘 풍선을 타고 하늘을 오를 수 있게(p13) - 수선화에서


혹시나 하고 다른 장 제목도 시구(詩句)를 따온 것인지 찾아보았다.

: 그것은 장미들이 소풍을 와서 떠들어대던 음악 소리였는데 / 내 귀가 자꾸만 흘러내려 장미의 팔을 잘라먹는다는 소문이었다(p50) - 장미 이후의 산책에서

: 팔을 비틀어 던지고 더 먼 공중에서 솟아나기를, 오독은 존재하겠지요(p92) - 공중의 새에서

: 하늘의 동공 안에 코끼리 한 마리 앉아 있었고 돌아서면 새벽, 보다 더 선명한 동물원의 바깥이, 밀담을 나누며 저물었네(p139) - 코끼리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에서

 

4개의 장 제목은 그냥 만들어서 써 붙인 게 아니었던 거다. 실제 이어진 시인의 시 속 구절을 따와서 붙인 제목이었다. 이게 이어진 시인의 뜻인지, 편집자의 의지가 반영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이 시집의 분위기를 잘 연출(?)해내는 장 제목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만큼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속의 시들에 관심과 흥미가 더욱 증폭되었다.

 

시를 다 읽고 잠시 멍하였다. 시들이 무엇을 표현하는 것일까.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일까. 직관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의 저자 이어진 시인의 시세계는 뭐라 표현해야 할까. 뭔가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지만, 왠지 어색하고 기괴하며 환상적이기도 하여 상식선에서 해석해 내는 게 어려웠다. 그래도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속에는 분명 뭔가가 있다는 은 느껴졌다!

 

다시금 시들을 차근차근 읽고 또 질근질근 씹으면서, 내 머리에 떠오른 시의 이미지들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를 나만의 자의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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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차가운 심장에 기름을 부어 줘 / 눈꽃 나라의 부츠를 신겨 줘 / 성냥의 입술이 필요해 / 내 뿌리의 근원을 깨물어 줘 / 생애 첫 꽃봉오리를 내밀 수 있게 내게 구두를 신겨 줘 / 하얗고 순한 발톱이 필요해 / 붉은 바지가 필요해 / 붉은 모자가 필요해 / 냉정한 마음을 감출 수 있는 화창한 얼굴의 파리한 감각이 필요해(p13-14) - 수선화에서 발췌


수선화는 알뿌리식물인 수선화가 봄을 향해 움트고 꽃피우려는 소망을 노래한 시이다. 첫 시부터 당혹스러웠던 것은 마침표 하나 없이 한 행으로 엮인 형식 때문이었다.

 


창문의 각도는 시인의 무의식을 자동기술한 듯한 창작기법으로 인해 언뜻 이해가 안 되었다. 어스름했던 밤이 새벽을 거쳐 아침이 되어가는 시간의 흐름과 바깥 풍경, 동튼 해의 움직임에 따라 창문에 스미는 빛의 각도에 맞춰 생활하는 현실 사람. 그 사이의 간극을 자연스레 이분화(二分化)해서 묘사한 것 같다.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작품 󰡔인간의 조건󰡕이 연상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계단의 깊이100층 계단이 있는 산길을 오르는 고된 여정과 흰구름 어린 정상에서 느끼는 환희, 시인이 시를 쓰는 고충과 그 과정의 서사... 이중 묘사가 어우러진 시 같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심금󰡕이 연상되기도 하였다.

 

물속에서는 추억인지 아픈 기억인지 모를 회상 신(scene), 내가 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 물속에서일렁이는 여러 가지 모습과 현상들에 비추어 묘사하는 듯하였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는 도깨비 나라에 빗대어 쓴 현실 이야기일까. 그저 책을 읽다가 도깨비 나라에 들어선 상상 혹은 꿈 이야기일까.

 

나를 수집하는 방식은 나의 일상과 글쓰기를 소재로 쓴 시로 무심결에 읽으면 그림 같고 시어와 시구를 음미하며 읽으면 에세이 같은 정녕 시인을 수집한 시라는 생각이 들었고, 꿈에서 보내 온 황매화는 식탁에서 빵을 먹다가 지난밤 꿈속에 나타난 동생을 떠올리는 상황 묘사인 듯하다.

 

구름의 시구름액체를 가지고 연애 중결혼 후를 비유하여 대비시킨다. 기체와도 같은 창공의 무한히 자유로운 질감의 구름과도 같은 연애의 시기(혹은 열정)’와 대비되는 잔이나 병에 담겨 있어야만 하는 액체와도 같은 결혼 이후(혹은 이별)’의 그와 나의 상반된 모습. 그 두 시기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흐른다.

 

장미 이후의 산책은 장미를 참 좋아하던 화자가 말하는, 소풍과도 같았던 장미 이전의 삶과 낯설고 익숙지 않은 장미 이후의 삶을 당신, , 눈사람, 빙수, 바닷속, 장미 등의 소재를 가져다가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장미의 전설은 아이의 잉태와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장미에 비유한 듯하다.

 

어떤 사과의 여행을 읽으니, 어쩌면 동요 󰡔사과 같은 내 얼굴󰡕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는 아이,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교감하는 엄마가 느껴졌다.

 

강은 슬픔이 창백한 악기에는 감염, , 파리한 입술, 창백한 악기 등의 소재가 어떤 슬픔을 드러내는 것 같다. 화자는 봄 어느날 밤 음악을 들으며 강물과도 같은 어떤 슬픔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 같다.

 

피아니스트는 상당히 몽환적이다. 여름날 그를 생각하며 피아노를 친다. 쇼팽의 이별 노래.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 얼음 같은 눈물. 그 눈물이 살살 녹아 집이 젖고 물에 잠길 정도라고 그득한 슬픔을 표현한 듯하다.

 

우리라는 이름의 거울또한 거울 속에 거울이 있고 내 모습이 그 속에도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의미 해석을 하기엔 담긴 의미가 너무 다중적이다. 거울 속 인물이 나를 비추는 나이며, 현실의 나와 거울 속 나가 우리인 것인지. 거울을 통해 비추고 싶은 내 마음속의 당신이며, 나와 당신이 우리인 것인지. 거울 그 자체가 당신이며, 나와 거울이 우리인 것인지. 거울에 투영된 현실의 당신이며, 깨지기 쉬운 거울의 속성을 매개로 한 현실의 우리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지. 왠지 이상(李箱) 시인의 시 󰡔거울󰡕이 떠올랐다.

 

의자와 복숭아를 읽다보니, 第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第二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중략)”으로 이어지는 이상 시인의 󰡔오감도 烏瞰圖󰡕가 떠올랐다.

오래 앉아 있어서 의자에 복숭아가 생겼습니다/복숭아는 붉습니다 복숭아는 부드럽습니다/복숭아는 아름답습니다(중략)”(p106)

의자 위 엉덩이 자국에서 복숭아를 연상하고, 과수원, 복숭아꽃, 복숭아밭 등 그 의자에 앉아 뭉게뭉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유목의 습관이라는 제목에 걸맞지 않게 시 소재는 사뭇 기묘하다. ‘입술 이지러진 곳에 해당화’,‘식도를 타고 내려오는 건 염소들의 짧은 다리’,‘양의 피’,‘어린 정령들’,‘빛의 처녀들’,‘핏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풀의 잘린 손’,‘유령의 발소리’,‘비릿한 체취등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속엣말을 도무지 모르겠더라. 자의적 의미 해석 또한 어려워 다시금 곱씹어 읽으며 시구들을 이미지화하다보니, 이건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같았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작품 󰡔기억의 지속󰡕 같달까?


 

코끼리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에서 마치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아기 코끼리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연상되었다. 그리고 이를 흐뭇하게 보고 아이의 코를 어루만지며 교감하는 엄마의 모습도 떠올랐다. 특히 하늘의 동공 안에 코끼리 한 마리 앉아 있었고(p139)라는 시구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잘못된 거울󰡕이라는 작품 이미지가 느껴졌다.

 

달의 수화에 등장하는 은 그냥 숲일까? 아니면 닳고 닳을 정도로 오랜 연인일까? ‘숲의 신호음이란 것은 달이 뜬 밤을 뜻하는 시간을 뜻하는 단순한 알람이어서, 숲으로 산책 나간다는 것일까? 아니면 달의 수화라 이름 붙여준 연인이 보고 싶다는 무언의 자각일까? ‘달의 수화란 것은 어쩌면 떠나간 님에 대한 그리움의 매개가 아닐까?

 

동백을 사랑하는 손은 도화지에 연필로, 물감으로 동백을 그려내는 과정이 청각적, 시각적으로 표현된 묘사가 인상적이다. 그런데 동백은 그냥 꽃일까? 아니면 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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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에서 보이는 특징이 몇 가지 있다. 간추려본다.


 

첫째, ‘초현실주의를 표방한 시

이어진 시인의 시는, 마침표 하나 없이 죽 이어진 한 행()으로 표현되었거나 연() 나눔 없이 몇 개의 행을 열로 이어낸 자유산문시가 대부분이다.

물론 개중에는 연을 나눈 시도 있다. 웃지 않는 나무들, 장미의 전설, 목련의 , 달을 위한 소나타, 웃지 않는 나무들, 첫눈 오는 날의 몽상, 검은 피아노의 흰 파도, 기린이 자라는 꿈, 눈사람, 봄의 왈츠, 가로수, 열애 중, 코끼리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 동백을 사랑하는 손등이 그러한데, 14편에 불과하다.

이러한 시의 형식과 함께, 시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다소 어렵다. 한 번 두 번 읽어서는 언뜻 의미 해석이 안 된다. 이유가 있다.

시 형식의 파괴와, 꿈인 듯 몽상인 듯한 기묘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시 내용의 표현... 이어진 시인의 시들이 바로 초현실주의적인 시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surrealism 超現實主義)’는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의 문학예술사조이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ealisme)을 발표한 1924년부터 그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브르통은 무의식과 꿈이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발로이며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라 규정하였다.

우리나라에도 1920~1930년대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오감도 烏瞰圖󰡕, 󰡔건축무한육면각체 建築無限六面角體󰡕, 󰡔거울󰡕 등의 시와 소설 󰡔날개󰡕 등으로 유명한 이상(李箱) 시인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어진 시인도 이상 시인에 버금갈 정도 되지 않을까?


둘째, ‘자동기술 기법이 적용된 시

초현실주의 작품에 주로 쓰이는 기법인데, ‘의식의 흐름 기법과 비슷하다보니 혼용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자동기술 기법은 작가가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그대로 표현하는 기법으로, 직접 작가의 내면을 그려 보이며, 주로 에서 많이 쓰인다. 이 기법이 적용된 이상의 시를 예로 들어 본다.

 

󰡔건축무한육면각체 建築無限六面角體󰡕 - 이상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

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

비누가통과하는혈관의비눗내를투시하는사람

지구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의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

거세된양말(그여인의이름은워어즈였다)

빈혈면포,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평행사변형대각선방향을추진하는막대한중량

마르세이유의봄을해람한코티의향수의맞이한동양의가을

쾌청의공중에붕유하는Z백호.회충양약이라고씌어져있다

옥상정원.원후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모아젤

만곡된직선을직선으로질주하는낙체공식

시계문자반에에내리워진일개의침수된황혼 (중략)

 

의식의 흐름 기법은 등장인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기억, 자유 연상, 마음에 스치는 느낌을 그대로 적는 기법으로, 주로 소설에서 내적 독백, 무의식적 기억 등에 쓰이곤 한다. 이 기법이 적용된 이상의 소설을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날개󰡕 - 이상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 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낏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精神奔逸者) 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을 영수(領受)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諸行)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쯤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중략)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에는 잠의 나뭇가지, 벚꽃 크로키, 내 귓속을 한동안 응시, 심장의 여행, 독감, 남애리 바닷가, 날마다, 장미, 질주하는 계절, 내 안의 물소리, 달의 수화등등 자동기술 기법이 적용된 초현실적인 시들이 죽 들어차 있다. 이어진 시인의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그대로가 표현되어 있어서 꿈인 듯 몽환적인, 시인의 내면이 시어로 얽혀 있어서 너무도 주관적인 시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시를 읽어내고 의미를 파악하는 게 쉽진 않다.

 

셋째, ‘판타지가 펼쳐지는 시

이어진 시인의 시를 읽어내고 의미를 파악하는 게 쉽진 않더라도, 여러 번 곱씹어 시어와 시구, 행과 행을 음미하며 머릿속 도화지에 하나하나 갖다 붙이고 이미지화하면 뜻하지 않게 한 편의 그림 작품과도 같은 화면이 현상되곤 한다.

이미 내 경우 그런 현상을 경험하였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창문의 각도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 계단의 깊이는 르네 마그리트의 󰡔심금󰡕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유목의 습관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기억의 지속󰡕, 코끼리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잘못된 거울󰡕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 외에도 여러 다른 시들 속에서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호안 미로(Joan Miro) 등이 연상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마치 시()가 그림()으로 보이는 경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면 판타지 세계를 묘사한 듯한데, 이어진 시인의 시들을 통해 연상되는 그림 또한 판타지 그 자체였다.

 

이 외에도 질주하는 계절에서는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이상한 기분을 읽을 때는 왠지 모르게 영화 󰡔록키 Rocky (1977)󰡕에서 주인공 록키 발보아와 친구의 여동생인 에이드리언 페니노와의 첫 데이트 때 첫 키스 장면을 에이드리언의 시선에서 묘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검은 피아노의 흰 파도는 영화 󰡔피아노 The Piano (1993)󰡕의 한 장면 느낌이, 비를 추모하는 방식은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를 떠올리게 하였다.

 


넷째, ‘매력적인 표현이 인상 깊은 시구

이어진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시구 표현들이 눈에 띈다.

 

내게 나뭇잎을 떨구어 주는 나무들, 네가 건넨 백지 수표에는 거리의 음악들이 쏟아졌다(p16) - <창문의 각도>에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계절엔 나뭇잎이 무심결에 허공을 응시한다(p52) - 심장의 여행에서

내 몸에 살고 있는 책의 갈피를 넘겨 보았다 갈피마다 묻어 있는 빨간 단풍잎, 가을의 손가락을 닮아서 들여다 보았다 파란 잎을 보냈는데 붉은 태양의 손가락을 닮은 뒷면을 보내왔다(p76) - 첫눈 오는 날의 몽상에서

가슴께에서 단풍잎이 바스락거렸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줍고 있는 손, 몇 해 전에 떨어뜨리고 간 파란 꿈들이 붉게 물든 문장이겠지(p76) - 첫눈 오는 날의 몽상에서

아이들이 사탕을 입안에 넣고 지구를 굴리고 있다 지구는 아이들을 등에 태우고 아이들을 살살 녹여 먹고 있다(p131) - 사탕에서

빗줄기가 여름 내내 쏟아졌다 천둥 번개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안녕? 하는 날씨로, 내 웃음을 바라보며 유리창에 죽죽 금을 그었다(p137) - 전주곡에서

 

우리나라에 첫 문장으로 유명한 시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 󰡔깃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노천명 󰡔사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 󰡔서시 序詩󰡕

손끝으로 원을 그려 봐/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원태연 󰡔손끝으로 원을 그려 봐󰡕

 

이어진 시인의 시 중에서도 첫 문장이 인상 깊은 시구가 눈에 띈다.

 

내 차가운 심장에 기름을 부어 줘 풍선을 타고 하늘을 오를 수 있게(p13) - 수선화에서

나는 실어증에 걸린 커피를 즐겨 마시는 습관이 있다(p24) - 나를 수집하는 방식에서

폭설 안에 감기 기운이 앉아 있다(p60) - 독감에서

내가 너의 악보를 건드리자 너는 화들짝 꽃을 피운다(p62) - 어떤 사과의 여행에서

음악에 감염된 오후다(p85) - 강은 슬픔이 창백한 악기에서

온몸에 바람을 팽팽하게 채워 넣고 네 궤도를 공전한다(p103) - 별의 눈물에서

당신은 나의 어항 속에서 지느러미를 흔들며 건너편 숲을 향해 헤엄쳐 갑니다(p108) - 어항 속 당신에서


 

다섯째, 친근하게 다가오는 의외의 시도 존재

이어진 시인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초현실적인 시만 쓴 건 아니다. 예상 밖에 다소 쉽게(?) 읽히거나 친근하게 독자에게 다가오는 시도 있다.

 

사과와 토마토를 위한 노래같은 경우, 사과와 토마토를 즐겨 먹다보니 점점 젊어진다면서 이들의 유익성을 유머스럽게 표현하여 재미졌다.

나의 얼굴이 없어진다고 한다/내가 사라진 자리에/한 알의 사과가/한 알의 토마토가/생겨난다고 한다 누구세요 당신/점점 젊어져서 죄송합니다/사과와 토마토의 탓이라고(p34)

 

가로수라는 시는 장욱진 화백의 작품 󰡔가로수󰡕를 모티브로 쓴 것이다. 이 시는 여러 다른 초현실적인 시들과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한 편의 동시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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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를 읽고 또 읽고 다시금 읽었다. 읽을 때마다 내 뇌리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우선,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내 심상에 시어시 표현등이 알알이 맺히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아무래도 이어진 시인의 시들이 초현실적이다 보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이 시집은 한 두 가지 정도로 의미 해석이 되는 게 아니라 다의적 다중적 해석이 가능한 시들의 집합체이다. 그렇다보니 이성적 머리로 해석하려고 하기보다는, 시를 읽을 때마다 그때 그때 심상에 떠오르는 이미지로, 느껴지는 감성으로 감상하면 좋을 것 같다.

 


다행(?) 책 말미에 이성혁 문학평론가의 󰡔사랑의 씨앗을 대지에 심기 위한 여정󰡕이라는 해설꼭지(p151-175)가 있으니, 이어진 시인의 시 세계를 좀 더 심도있게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는 상당히 압축적이면서도 서사적이고, 서사인 것 같으면서도 서정적이며, 서정적이면서도 자동기술이고, 그에 따른 탁월한 입체적 묘사력과 심리의 회화적 형상화가 돋보인다.

시를 공부하는 학생, 시를 쓰고자 하는 지망생이나 시인을 꿈꾸는 시 입문자분들이 읽으면 좋은 시집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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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어진 시인께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는 마치 (시어)로 그린 초현실주의 그림 작품과도 같은 시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추후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 작품과 콜라보로 시화집을 내보는 것을 추천해본다.

한 예로 시가 지나간 자리에 명화가 남아-윤동주×김소월이 노래하고, 반고흐×모네가 그리다(2020, 뮤즈MUSE), 김소월×천경자 콜라보 진달래꽃(2023, 문예출판사) 등의 시화집이 선보인 적이 있다. 꽤 괜찮은 기획이라 생각된다.

저작권 조약인 베른 조약에 따르면 작가 사후 50년까지, 미국 저작권기한연장법에 따르면 작가 사후 70년까지 저작권이 보장된다. 예를 들어 르네 마그리트(1898.11.21.~1976.8.15.)의 경우 최장 사후 70(~2046.8.15.) 이후에 저작권이 풀릴 것이니, 이때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를 재출간하려 한다면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과 매칭하여 시화집 출간을 기획해보는 것을 추천해본다.

 

참고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의 시 중에서 수선화사과와 토마토를 위한 노래같은 시는 왠지 유명해질 거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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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위한 짧은 소설 쓰기 수업 - 쓰면서 생각을 키우는 스토리의 힘 사춘기 수업 시리즈
정명섭.이지현 지음 / 생각학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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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기 노하우와 경험이 담긴《사춘기를 위한 짧은 소설 쓰기 수업》은,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춘기 청소년, 글쓰기를 좀 더 잘 하고 싶은 사람, 늦깎이 신진 작가를 꿈꾸는 성인, 글쓰기 수업을 위해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학교 선생님 등에게 더없이 좋은 노하우집이자 안내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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