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 그림으로 본 고흐의 일생
이동연 지음 / 창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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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순수한 열정과 이를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고독하고 힘겨웠던 삶을 고흐의 작품과 연결지어 조명하고 있다. 

저자 이동연 작가는 「그림으로 본 고흐의 일생」이라고 책의 부제를 달면서, 굳이 책 제목을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을까. 



단순히 이 제목만 보면, 이 책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위인전인지 모른다. 혹시 ‘그림’ 관련이라 추측할지라도 한 화가에 대한 이야기인지, 한 시대를 풍미한 화파의 작품을 도슨트가 이야기하는 책인지, 미술사에 관한 책인지 아니면 미술심리치료책인지 감을 잡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그 깊은 뜻을 알게 되고 잔잔하게 가슴을 울린다.


나는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를 읽기 전까지, “고흐를 안다”고 생각했다. 

후기 인상주의의 거장, 해바라기 화가, 순수한 열정을 불사른 위대한 화가.

10년 간 유화 900여 작품과 드로잉 1,100여 작품을 완성했으나, 단 한 작품만 팔린 비운의 화가. 

고갱과의 공동생활과 귀 자해사건, 동생 테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했던 가난하고 고독했던 삶,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았던 힘겨웠던 삶, 그리고 30대 나이에 권총 자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그림은 1880년대 전후 시대를 훨씬 앞질러 가다 못해, 그로부터 140여 년이 지난 현대까지도 우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최고의 화가.



그렇다. 현재 ‘고가의 그림 작품’ 하면 떠오르는 화가는 단연 ‘고흐’다.

2014년 11월 미국 소더비 경매에서 6,180만 달러(당시 670억 원, 현 시세 763억 원)에 낙찰된 그림 <붉은 양귀비와 데이지>는 고흐의 작품이다. 또한 1990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 다이쇼와제지회사 사이토 료에이 명예회장에게 8,250만 달러(당시 758억 원, 현 시세 1,018억 원)에 팔린 <가셰 박사의 초상>(총 2점이 존재하며 그 중에 첫째 판의 그림)은 고흐 작품 중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작품이다.



또한 전 세계 곳곳에서 고흐에 관한 여러 전시회(실물 전시, 미디어아트전 등)가 끊임없이 열리고 있고, 그의 삶을 다룬 영화, 소설 등이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아마도 고흐는 동서양을 통틀어 대중의 가장 큰 관심을 받는 화가일 것이다.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를 읽고 나서, 그동안 고흐의 유명세에 기대어 “고흐를 안다”라고 착각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고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바로잡고 고흐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고흐는 ‘고독한 화가’가 아니다.


흔히 고흐가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을 지녀 정말로 ‘고독한 화가’일 거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 순수한 열정을 지닌 화가 고흐를 알아보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고흐 주변에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익히 알려져 있는 고흐와 공동생활을 하며 작품활동을 함께 했던 폴 고갱 이외에도, 고흐의 건강을 걱정하며 지중해 여행을 제안했던 폴 시냐크(p178), 고흐의 분투 어린 작업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귀족 출신 화가로 친구이자 고흐를 존경하기까지 한 툴루즈 로트레크(p214) 등의 동료 화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탕기 화구가게의 페르 탕기 영감, 파리의 카페 탕부랭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아를의 카페 드라가르의 주인 마리 지누, 아를의 우체부 조셉 룰랭, 오베르의 라부 부부, 가셰 박사 등이 고흐 곁에서 있었다.




둘째, 고흐는 ‘연애’를 못한 것이 아니다.


고흐가 홀로 미혼으로 살았기에, 여인과 연애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이 책에 고흐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외제니 로이어에 대한 짝사랑과 이별, 미망인 케이 포스 스트리케르에게의 구애와 이별, 창녀 시엔과의 동거와 이별, 12살 연상의 마르호트 베헤만과의 열애와 주변의 반대, 카페 탕부랭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임신과 고흐의 청혼, 그리고 고뇌와 이별, 마르그리트 가셰에 대한 호감과 이별 등 고흐는 애달픈 사랑과 서글픈 이별을 겪었다.




셋째, 고흐가 화가로서의 그림 실력 이외에 ‘그 어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고흐는 본래 꿈이 화가가 아니라 파브르 같은 곤충학자였다. 그리고 외국어에도 재주가 있어서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네덜란드어만큼 할 정도였다.(p15)

고흐는 경제적 활동을 한 바 있다. 16살에 구필 화랑에 입사하여 능력있는 화상(畫商)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 산업혁명 현장에서 본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에서 받은 충격과 시류에 맞는 작품에만 거액을 투자하는 고객에 대한 회의감 등으로 인해 23살에 그만두었다.(p23) 이후 영국 램스게이트 학교 프랑스어 보조교사, 도르드레흐트 서점일을 하였다. 이어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도 다녔으나 정통교리와 현실이 유리되었다고 이의를 제기하며 그만두고, 벨기에 남부 보리나주 탄광촌에 전도사로 가서 월급까지 털어가며 진심으로 광부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자 했다.(p26-28) 그러나 고흐를 파송했던 전도협회는 ‘전도사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고흐를 해고하였고, 고흐의 순수한 열정이 무시되는 순간 ‘삶 속의 신앙’이라는 그간의 신념이 무너졌다.(p29) 그리고 27세에 종교인의 길을 버리고, ‘화가’를 택하였다.(p30)


“그래, 내 그림으로 사람들을 어루만지자... 한 장의 그림이 천 마디의 설교보다 더 감동이지. 그림을 본 사람들이 고흐는 마음이 참 따뜻하다고 말하게 하자.”(p31)


고흐는 브뢰셀 왕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네덜란드 「헤이그 화파」의 거장 안톤 마우베를 찾아가 지도를 받았으며, 파리로 가서 페르낭 코르몽 스튜디오에서 수학하였다. 

이렇듯 화가를 결심하기 전, 고흐가 거닌 인생경로가 무척 새로웠다.



넷째, 고흐는 ‘오롯이 동생 테오의 지원’만을 받은 것은 아니다.


고흐와 네 살 어린 동생 테오 반 고흐는 20여 년간 9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p11) 서로를 신뢰하고 공감하며 우애를 나눴다. 테오는 화가의 길을 걷기로 한 고흐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주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오로지 동생 테오만이 고흐를 지원한 것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고흐의 여동생 빌레미나는 정서적으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로트레크와 시냐크 등 동료화가의 도움과 응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화구상인 탕기 영감은 고흐의 그림을 받고 화구를 가져다 쓰게 해주었고(p79), 가셰 박사에게 정신과 진료를 자주 받았는데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진료비와 약값 대신 <붉은 양귀비와 데이지> 등의 그림을 받아 주기도 했다. 고흐가 아를로 갔을 땐 “힘겹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을 무너뜨리지 맙시다. 고흐는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라오.”(p101)라며 늘 고흐를 응원하고 가족처럼 대했던 조셉 룰랭도 있었고, 생면부지의 고흐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고흐가 거주할 노란집도 소개하였으며 고흐가 요양원에 입원하는 동안 고흐의 작품을 보관해주는 등 고흐를 돕고 교감하며 지지해준 지누 부인도 있었다.(p89)




다섯째, 고흐가 완전히 미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귀를 자른 기행, 정신착란, 미친 사람처럼 그림에만 매달리던 삶 등으로 고흐의 삶을 이해하곤 한다. 물론 정신적인 문제는 지니고 있었다. 현기증, 발작, 충동조절장애, 환각, 환청(p167)에 시달렸다. 이유가 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렀건만 홀로 계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기는커녕 자기 생활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 모든 부담은 오로지 동생 테오의 몫이었다. 고흐는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어떨 때는 4일 동안 식사는 두 끼만 하고, 외상으로 산 빵과 커피, 그리고 술로 때우기도 했다.(p166) 그렇게 음주량이 늘고 경제적인 궁핍, 정신적 불안정 등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고흐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그림들은 도무지 팔릴 기미가 없었다.(p167) 그만큼 현실은 암울하기만 했다. 게다가 화가공동체를 꿈꾸며 폴 고갱과 공동생활을 하던 중 9주 만에 고갱이 떠나면서 우발적으로 귀를 자르는 자해를 저질렀으며 신경증적 불안 증세까지 보였다.(p168)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 스스로 생각할 수 있었고 판단할 수 있었으며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기도 했다. 고흐는 《건강 매뉴얼》이라는 책을 비롯한 의학서적을 읽으며 건강한 정신과 몸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흔들리거나 좌충우돌하지 않고 화가의 번뜩이는 영감을 캐치하여 그림으로 표출하면서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p171)

더군다나 고흐 스스로 생폴 요양원에 입원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1년가량 요양원 생활을 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와 같은 대작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여섯째, 고흐의 거칠고도 섬세한 독자적 그림 스타일이 혼자만의 수련을 통해 완성된 게 아니다.


고흐에게 미술은 그야말로 취미였다고 한다.(p15) 그러나 고흐가 아홉 살에 그린 <다리>라는 제목의 그림 한 점은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잘 그렸다. 이미 이때부터 고흐는 화가로서의 재주가 드러났던 것이다.(p16)



고흐의 그림을 보면, 거친 붓 터치와 세심한 묘사라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의 기법을 병행할 수 있는 놀라운 경지에 달해 있다. 그 최고봉에 달한 작품으로 <도비니의 정원>, <건초 더미>, <황혼의 풍경> 등이 있다.(p250)

고흐는 이런 경지에 그저 혼자만의 수련을 통해 다다랐을까? 이 책에 고흐가 영향을 받은 내용들이 상세하게 나온다.


최초에 동생 테오가 조언하였다.


“형의 그림이 왜 안 팔리는 줄 알아? 지금 인기 있는 그림은 인상파들이 그리는 역동적이고 밝은 작품들이야. 그런데 형의 그림 색감은 어둡고 너무 투박해.”(p69)


이런 테오의 조언을 받아들여, 고흐는 느루아르, 모네, 드가, 쇠라 등 당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만남을 가졌다. 폴 세잔 <펜뒤의 집 오베르>는 고흐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p69) 고흐는 이들이 그려내는 밝은 색조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빛에 따라 변하는 대상의 인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인상파 화법에 만족하지 않고, 고흐는 <센강의 다리>라는 작품을 통해 ‘보이는 대상에 자신의 감정과 열정을 담아내는 화풍’을 추구하였다.(p76)



고흐는 렘브란트의 정서적 진정성이 넘치는 그림 <성 가족>을 좋아했다.(p144) 고흐는 성스러운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는데, 종교화도 현실처럼 그리는 렘브란트를 좋아했던 것이다.(p146)


“고흐는 어떤 것이든 미화하는 것을 싫어했고, 삶의 실체적 진실로만 화폭을 채워 나갔다.”(p51)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색채론》을 읽으며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했고, 그 뒤 해가 갈수록 색조가 밝아지며 신선해졌다.(p145)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의 리얼리즘적 특징을 웅변하는 대표작으로 꼽힌다.(p54) 



고흐는 밀레의 자연주의 화풍을 좋아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에는 밀레의 <낮잠>을 90번이나 모사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고, 급기야 같은 주제로 <정오의 휴식>을 그렸다. 밀레보다 거칠고 더 투박하다.(p211) 고흐는 이 작품에 왜 그리 감동했을까? 고흐는 자발적인 노동과 휴식의 자연스러운 순환의 모습에서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p212)

고흐와 고갱은 9주간 화가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아를의 노란집에서 공동생활을 하였다. 성향도 그림 스타일도 달랐고 심지어 격렬한 토론을 자주 펼치기도 하였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동료였다.




일곱째, 고흐가 당대에 혹평을 받았기에 그림이 안 팔린 게 아니다.


고흐가 살았던 1880년대 전후는 ‘밝고 경쾌한 인상주의 작품이 유행하던 때’였다.(p62) 

그래서 1890년 1월 「벨기에 브뤼셀 20인 전」에 고흐 작품 6점이 전시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고흐 작품을 “색채가 강렬하고 야만적”이라고 혹평하였다. 고흐에 대한 비판적인 비평은 딱 그때까지였다!

그간 고흐를 알아본 사람들은 이렇게 그를 평가했다. 세가토리가 보기에 고흐는 ‘보헤미안이고 낭만적이며 혁신적인 예술가’였다.(p84) 고갱은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고 “화가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였다.(p122)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그림의 주요 고객인 부자들은 고흐 그림에 냉담하였으나 신세대 화가들은 고흐 그림에 열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붓꽃>(p195)과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p117) 두 작품이 1889년 9월에 열린 「앵데팡당 전」에 전시되었는데 큰 호평을 받았다.(p195-196)

「벨기에 브뤼셀 20인 전」에서 알베르 오리에는 고흐 작품이 “진흙 속 진주”라 알아보았고, “수렁에 빠진 예술계에 새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 극찬하였다.(p216)

이때 화가로 활동했던 안나 보흐가 고흐의 작품 <붉은 포도밭>을 구입하였다.


“이 그림이 너무 뛰어나 제 작품 활동을 못할 지경이랍니다.”(p218)


1890년 3월에 열린 「앵데팡당 전」에 고흐의 유화 10점이 전시되었을 때, 동생 테오가 기쁜 소식을 알렸다. 


“형. 이미 형은 성공하고 있어. 형의 그림이 얼마나 관심을 끄는 줄 알아? 모네도 전시된 작품 중에 형의 그림이 으뜸이라 했고, 다른 화가들도... 감탄했어.”(p224-225)



여덟째, 고흐는 ‘해바라기 화가’만이 아니다.


고흐는 “해바라기는 고흐에게 삶의 환희를 상징하는 태양이었다. 별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이라도 태양은 반드시 떠오른다. 고흐는 그러한 자신의 인생 철학을 해바라기 그림에 담았다.”(p120)고 할 만큼, ‘해바라기 화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해바라기만을 연작으로 그린 건 아니다. 사이프러스 연작 그림을 통해 ‘수직으로 올라가는 생의 의지’를, 올리브나무 연작을 통해 ‘성숙’을 표현하였다.




마지막으로, 고흐가 자살을 한 것이 아니다.


자살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타살에 무게를 두고 있다.

고흐라는 화가에 대한 화단의 평가와는 다르게 고흐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고, 테오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p244) 고흐는 아픈 동생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짐만 되는 자신의 처지에 더 깊은 자책감에 휩싸인다.(p245) 

그러던 중 바람이 부는 밀밭 어딘가에서 총소리 한 방이 들렸고, 고흐는 새하얘진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고 기거하던 하숙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틀 뒤 숨을 거두었다.

이 부분에서 이동연 작가는, “분명한 점은 자살은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페이지에, 고흐가 남긴 한 줄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림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p269)


왜 책 제목을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는지 알게 되는 문장. 그 깊은 뜻을 알게 되고나니 잔잔하게 가슴을 울린다. ‘고흐’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강조한 것이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여전히 고흐는 시대를 초월하여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11년 6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오르세미술관전 – 고흐의 별밤과 화가들의 꿈>, 2014년 5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르세미술관전 –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이 열린 바 있다. 그 당시에 관람을 하질 못해서 아쉬웠다. 근래에는 2021년 2월 제주에서는 <빛의 벙커 : 반 고흐 미디어아트전>이 열렸고, 작년 8월 강릉에서 <그대, 나의 뮤즈 반 고흐 to 마티스 미디어아트전>이 열렸다. 연이어 올해 들어 구미에서 <자신을 사랑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미디어아트전>과 양평군립미술관 <지지 않는 별, 빈센트 반 고흐 미디어아트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엔 꼭 고흐를 감상하러 가봐야겠다.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을 읽은 지금, “고흐를 제대로 안다”라고 자부할 수 있기에 고흐의 세계를 더 깊이 있게 접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가 클 것이기에 무척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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