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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김은식 지음 / 이상미디어 / 2009년 4월
평점 :
드디어 제목만으로도 나를 설레게했던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 을 읽었다. 기대한만큼이나 만족스러웠고, 한 때 '해태타이거즈'를 마음에 품었던적이 있다면 반드시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미소지었고, 갈수록 아련한 추억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안타까움이 겹쳐져 뭉클해지기도 했다. 이런 좋은 책은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 귀찮지만 꼼꼼한 리뷰를 적어볼까 한다.
날카로운 군사정권의 기억과 짓밟힌 광주의 恨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군사정권은 무시무시했다. 그들은 합법적 권력을 획득하지 못했기에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불사했고, 그 아래서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억눌릴 수 밖에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민주화를 위한 요구가 일어났지만 군사정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들은 시민에게도 총부리를 겨눴다. 그러나 오직 한 곳, 빛고을 광주는 저항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군부는 서울에서는 협박과 회유로 '서울역 회군' 을 성공시켰지만, 광주시민들의 분노와 의지는 굴복시키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자국민에게 총을 쏘는 군대' 를 출동시켰고, 그 더러운 죄악을 덮으려고 김대중이라는 희생양을 전면에 내세웠다. 예나 지금이나 찔리는것이 많은 자들이 언제나 벌이는 수법, '이 모든건 내 책임 아니라 너 때문이다' 라는 책임전가를 강화하기 위해 김대중에게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씌우고 김대중과 광주시민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며 왜곡된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전라도는 왜곡된 이미지의 수모를 겪어야만 했고 소외된 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아야만 했다.
소외된 약자의 두 영웅,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
'영웅은 난세에 나온다' 라고 했던가. 그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외자' 로서의 부당한 차별을 묵묵히 견딜 수 밖에 없었던 약자의 땅, 호남에 희망이 되어주는 두 사람의 영웅이 있었다. 첫째는, '광주민주화운동' 때 광주사람들과 똑같이 핍박받고 광주사람들과 똑같이 민주화를 갈망하던 정치인 김대중이었고, 둘째는, 역설적이게도 군부의 적극적인 시도로 창설된 프로야구팀 중에 하나였던 '해태타이거즈' 였다.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은 약자의 기반에서 출발했지만, 끊임없이 견딜 줄 알았고 '희망' 의 이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무적의 해태타이거즈
창단해서 매각되기까지 20년동안, 그리고 특히 1983년부터 1997년 사이의 15년 동안 아홉 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8할의 승률을 기록하며 아홉 번 모두 우승했던 팀, 여섯 명의 정규시즌 MVP와 46명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했고, 공수 주요부문 타이틀 수상자만 46명을 배출했던 팀. 어떤 기준으로 보나 역대 최강이었던 팀, 해태타이거즈. (p7)
해태타이거즈는 프로야구시즌 출범당시 삼미와 함께 꼴찌로 뽑혔던 팀이었다. 그러나, 시즌 첫 해부터 4위까지 치고가는 이변을 낳기 시작하더니 선동열이라는 괴물투수의 활약과 함께 83년 첫 우승을 기점으로 총 9번의 우승 기록을 쌓는다. 선동열은 분명 해태타이거즈의 핵심이었지만, 야구는 투수의 방어만으로는 승부를 낼 수 없는 법. 타이거즈는 선동렬외에도 각 팀의 에이스급으로 활동할만한 좋은 선수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해태타이거즈가 칭송받는것은 그들이 보여준 승리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정신 때문이다. 시는 쓰는자의 것이 아니라 읽는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야구도 그것을 하는 선수들의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관중들의 것이기도 했다. 그런점에서 해태타이거즈의 야구는 억눌렸던 호남인의 감정분출통로였고, 약자가 지닌 의기소침함을 날려주는 희망의 찬가이기도 했다. 실제로 '부라보콘을 팔아 연봉을 주는' 가난한 팀이었던 해태는 그 자체로 소외된 호남정서를 대변하는 팀이었고 그들의 승리는 그렇게 간절한 소망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배고프지만 날카로운 눈빛의 타이거즈, 돌보는 이 없어도 스스로 덤불을 헤쳐나가고야 마는 강인한 정신력이 해태타이거즈가 가진 힘이었던 것이다.
인동초, 김대중
'양김시대' 라는 말이 있었을만큼 박정희, 전두환을 이어져오는 군부정권의 반대세력으로 김영삼과 김대중만큼 두드러지는 민주화인사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보는 조금 엇갈렸다. 김영삼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유학, 그리고 그곳에서 거물정치인을 만나서 최연소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엘리트 정치인이었다. 반면, 김대중은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상고를 나왔고, 선거에서도 연거푸 떨어지는등 밑바닥부터 경험을 쌓아온 서민형 정치인이었다. 그들의 그러한 배경과도 맞물려 김영삼은 머릿수로나 영향력으로나 우세했던 영남을 연고로, 김대중은 억압과 소외의 상징과도 같은 호남을 연고로 삼았다. 영남인들이 김영삼을 대표로 민주화를 열망했듯, 호남인들은 김대중을 대표로 민주화를 열망했다. 김대중은 '광주민주화운동' 을 향한 군부정권의 억압에 광주시민들과 함께 고통당했으며, 호남인에게 그런 김대중은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하고 함께가는 존재였다. 늘 김영삼에 비해 한발짝 늦어졌던 김대중은 대통령의 자리 역시 김영삼에게 이어받는다. 하지만, 순서가 대수랴.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언제나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던 호남인에게 있어서는 희망의 상징이었고, 겨울을 인내하고 찾아온 봄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 우리와, 해태타이거즈
해태타이거즈는 IMF위기와 함께 해태제과가 부도위기를 맞으면서 해체되기에 이른다. 모기업의 경제적인 위기로 인한 해태타이거즈의 몰락은 더 이상, '이기고 싶다' 라는 소망과 '할 수 있다' 라는 의지만으로는 승리하기 힘든 세상을 방증하는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려 직장을 잃고, 점점 더 퍽퍽해지는 삶의 최전선으로 내던져진 수많은 이 땅의 '루저looser' 들의 삶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해태타이거즈의 영광과 찬란하게 빛났던 기록들은 자본의 손아귀에서 모래처럼 잡히지 않고 사라져가고 있었다. 해태타이거즈는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이었고, '그래서 약자와 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 번 물어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했던 그 몸짓' (p253) 을 지녔던 팀이었다. 그리고 지금 강자의 발목을 물어뜯을 용기마저도 잃어버린 채 패전투수처럼 쓸쓸한 어깨를 지닌 채 삶을 견뎌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해태타이거즈는 다시금 '희망의 상징' 이고 '약자의 심장' 으로서 기억된다.
그들은 와서, 전설이 되리라
혹시, 당신도 돈 앞에 무릎꿇고 약자의 설움으로 이를 악물어 본 경험이 있는가. 아니면, 모두가 안될거라고 고개를 내저었던 순간에도 스스로를 믿고 도전의 질주를 멈추지 않았는가. 여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거칠고 척박한 세계에서 간절한 소망과 열정으로 진정한 챔피언으로 기억되는 한 야구팀이 있다. 이 책은 분명 해태타이거즈의 팬들을 위해 기획된 책이기도 하지만, 호남으로 대표되었던 약자의 정서를 공유하고 그들과의 연대를 시도하는 모든 소외자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거대한 자본권력 앞에서 고개를 떨구어 본 적이 있는 모든 자들에게 이 책을 진심으로 권한다. 해태 타이거즈.. 그들은 와서, 전설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