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작업 2 - 나만의 방식으로 엄마가 되기를 선택한 여자들 돌봄과 작업 2
김유담 외 지음 / 돌고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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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설적으로 돌봄을 통해 인간의 돌봄 역량이 몹시 작고 하찮다는 점을 깨달았다.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돌본 이후에야 내 둘레에 명확히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존재들의 둘레에 있는 경계선도 명확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드러난 태도는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다른 존재에 대한 외면이 아닌 ‘존중‘이었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 타인을 도우려고 할 때 그것이 타인의 경계를 침해하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허황되게 착각하는 (자아가 팽창된)이들이 선의에서 출발해 다른 존재들에 해를 입히고 나아가스스로에게도 해를 입히는 역동을 인지하게 되기도 했다. 책을 읽는 분들 중에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제도, 어떤 관습, 어떤 도덕, 어떤 강요 때문에 자신의 것이 아닌 돌봄을 짊어지게 된 분들이 있다면 과감히 떨쳐내기를바란다. - P22

우리가 돌봄에서 배운 ‘선택‘의 의미는 우리가 학교와 사회에서 흔히 배워왔던 협소한 ‘선택‘의 의미(무한한 시장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상품을 선택해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쇼핑하는 행위)와 다르다. 이 책에서 쓰인 맥락을 종합해보면, 선택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제약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그안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내는 행위이다. 선택은 가성비나 유불리를 따지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과 결심, 그리고 믿음의 행위이다. 자연스럽게 선택에는 그에 따르는 결과를 ‘수용’한다는 뜻이 포함된다. 선택을 온전히 자기것으로 만드는 일은 선택 이후의 수용 과정에서 완결된다. - P24

돌봄의 시간이 치유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작업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를 내지 못한 시간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쌓여 디딤돌이 되고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진다는것을 알았다. 그럴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자꾸만 쌓여갔고, 작업의 시간이 그리웠다. - P112

같은 이유로 살림을 못하는 사람은 돌봄도 못한다. 그리하여 남편은 내가 아플 때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는 게 그의 항변인데, 그 말이 내 귀에는 애초에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의미로 들려서 무척 서운했다.(자기는 안 아파봤나? 필요한 게 뭔지 왜 몰라?) 공간을 보살피는 것, 타인을 돌보는 것, 즉 말하지 않는 대상(사람)의 욕구를 짐작해 대비하는 것은 ‘배려‘ 혹은 ‘센스’라는 단어로 여성에게 부과되어온 감정 노동이다. - P165

나를 믿지 못하고 자책하던 시간을 떠올려본다. 여태껏 내가이룬 것들이 보잘것없어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더 높은 허들을 더 많이 뛰어넘으려 했다. 목표에 깃발을 꽂으면 그때뿐, 또다시 나를 증명해야 하는 시시포스의 굴레로 떨어졌다. 엄마를 향해 자신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며 울고 웃는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얘는 뭘 보고 나를 이토록 믿어주는 걸까. 타인의 돌봄 없이는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는 무력한 아이는 온몸을 다해 보호자에게 의존한다. 나를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원이다. 누가 나를 이유 없이 전적으로 믿어줄 때,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니까 믿음은 성과에 기반한 후불제가 아니라, 근거 없는 선불제였던 것이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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