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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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애도는 상실로 인해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바뀔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라고 주디스 버틀러는 말한다. 가정이든 일터든 사회든 국가든,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소수자들은 애도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상투적인 ‘괴물’이미지에 고착된 채 트랜스젠더라는 하나의 범주로 살아야 하는, 그래서 시간성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래서 "몇 가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존재인 트랜스젠더에게 죽음은 가능한가? 애도할 수 있는 개인 혹은 역사를 지닌 존재로서의 죽음이 트랜스젠더에게 가능한가?"라고 묻게 된다. 존재에게 시간성이 있다는 것은 "특정 이미지나 특정 순간의 모습으로 일평생이 판단되거나 박제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하면서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주체로 인식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트랜스젠더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어렵고, 또 더욱 절실한 모순 속에 빠져든다. 시간성이 탈각된 그 죽음의 장소를 피해 공동체 내부에 자리를 얻고 싶다는 욕망은 ‘패싱‘을 원하게 만들고, 그래서 수술 후 패싱이 수월해지면 트랜스젠더 공동체를 떠나게 된다. 트랜스젠더 노년을 만나기 어려운 건, 심한 우울증 등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하면서 ‘늙어가는‘, 즉 "자신의 모든 역사를 책임"지는 트랜스젠더가 드문 까닭도 있다. - P215

주류가 트랜스젠더의 범주화를 위해 동원하는 젠더 담론을 파열하기 위해서는 성기 중심적인 신체 규범으로 환원하지 않는 정체성과 욕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트랜스 이론가이며 활동가인 샌디 스톤은 이를 위해 패싱을 포기하자고 제안한다. 트랜스젠더의 몸에 기입된 새로운 조형성의 힘을 탈환하고, 그것의 차이를 재전유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행동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패싱을 포기하는 것, 의식적으로 ‘읽히는‘ 것, 스스로를 큰 소리로 읽는 것, 그리고 이 문제적이고 생산적인 읽기를 통해 자신이 쓰인 담론들에 스스로를 쓰기 시작할 것, 그럼으로써 사실상 포스트 트랜스젠더가 되는 것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모든 역사를 책임질 때 가능하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의 나이듦은 발명되어야 할 정치적 의제다. - P216

10대에겐 20년 뒤의 자기 모습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고, 30대에겐 또 30년 뒤의 자기 모습이 물음표였던 것이다. 오늘의 내 삶은 내일의 내 삶과 어떤 모습으로 만날까? 서로 몰라보는 건 아닐까? 지속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이동의 역사로 삶을 이해할 때, 방향과 좌표의 설정은 움직임의 핵심이다. 참조할 수 있고, 신뢰와 희망으로 기댈 수 있는 집단은 하늘의 별자리 같은 것이다. - P227

"한국 정치에서 진보 정당 활동을 통한 변혁은 내 생애에선 불가능하다, 내지는 내 생애를 훨씬 넘어서도 상당 기간 어렵다, 라고 생각할 땐데. 그러면 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 소신껏 살 것인가 묻는 거지. 그건 당연히 빈곤 바닥이지! 당연히 여기가 제일 바닥이고, 여기에 쐐기가 있으니, 여기를 포함하지 않은 변혁은 변혁이 아닌 거다. 그렇다고 할 때, 나는 어디서뭘 할 거냐. 어쨌든 세상은 망해갈 거고, 그 중간에 나도 망할 거야. 죽을 거야. 그렇다면 죽기까지 여기서, 가능하면 최대한 즐겁게 함께하자." - P245

시민사회가 포기한, 아니 처음부터 외부로 범주화한 홈리스들이 아랫마을에 합류해서 활동가들, 당사자 활동가들과 이룬 돌봄 공동체는 시민사회에 부여된 최선의 공동체라는 위상의 모순과 허구성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며, ’사회적인 것‘을 토대에서부터 새롭게 고민하게 만든다. 신뢰에 토대를 둔 협력과 연대의 관계가 아니라면 사회를 사회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적인 것의 재사유를 급진적으로 일궈내지 않으면 이 사회는 언제나 저 ‘자리‘를 필수적 외부로 전제할 것이다. 서울역 광장이나 쪽방 마을, 아랫마을 등 홈리스 현장에서 마주치는 돌봄은 물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난잡한 돌봄‘을 구현한다. 전 지구적으로 불확실성과 불안, 위험은 끊임없이 경계를 만들고, 누군가를 ‘우리‘와는 다른 ‘그들‘로 지목해 이 경계 밖으로 밀쳐낸다. 이미 존재하는 무수한 경계들 외에도, 돌봄의 자격을 두고 가속화하는 편 가르기도 있다. ‘난잡한 돌봄‘이야말로 위기로 점철된 현재의 시대적 요청이고, 강도 높은 급진성으로 밀어붙여야 할 실천이다. 이것은 현재 기준에서 볼 때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는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 돌봄이다. 어떻게든 연고 없는 홈리스의 안전‘망‘이 형성되게 마음 쓰는 아랫마을에서 이런 확장적 돌봄을 감지할 수 있다. 사회에서 들리는 홈리스 관련 소문은 모두 삶의 막다른 골목과 최악의 불행, 그리고 폭력의 난무와 일탈로 지지직거리지만, 정작 홈리스 사이에는 서로의 경계를 지우며 ‘이웃 간의 돌봄‘이라 불러 마땅한 실천이 있다. - P248

당신이 어느 곳으로 가는가. 그 움직임과 이동이 주름의 형질을 정한다. 50이 넘어, 60이 넘어 매우 낯선 곳, 새로운 장소로 몸을 이동시키는건 쉽지 않다. 그곳이 늘 ‘예외‘로,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혐오의 정동으로 터질 듯 부풀어 있고, 실패의 모든 부정적 감각이 폭력적·악의적으로 투사되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몇이 되었든, 내가 어디로 끌리는가. 최현숙의 말을 빌리자면 어디로 ‘꼴리는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고 유희적으로 그러나 진지하게 묻는 건 포기해선 안 되는 자기 돌봄이다. 몸이 무거워지고 심리가 ‘취약해지는‘ 나이일수록 이 촉수가 중요하다. 이끌리는 곳이 어디인지 촉을 제대로 세울 수 있을 때 자기 삶이 ‘해명될‘ 기회도 늘어날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의식 못하고 산다. 끌려서 도착한 어떤 장소의 그 사람들이 내 삶에서 해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점들을 일깨워줄 수 있다.
자기 해석이라고도, 자신이 저자가 혹은 편집인이 되어쓰는 한 편의 생애 서사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해명‘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싣고 싶다. 해명은 해명되기를 기다리는 질문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최현숙의 해명 이야기를 들으며, 내 안에서 시간을 두고 곰삭히며, 나는 나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내가 해명해야 할, 나의 살아온 내력의 질문이 뭔가를 계속 묻는다. 이런 방식으로 늙는 과정은 해명의 쐐기를 거쳐 해방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늙은이‘가 되면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것 아닐까. - P255

몸이건 정신이건 굼뜬 건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더구나 노년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느릿느릿‘의 리듬을 용납하지 않는 속도-발전주의가 빼앗아 간 반성적 내면이나 자율, 정서, 특정한 일의 속성이 얼마나 많겠는가. 아픈 몸이나 늙은 몸, 장애가 있는 몸이 느리게 천천히, 자율과 의존의 감각을 적절하게 협상하면서 살 수 있는 문화적·물리적 환경이 우선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연령대가, 서로 다른 몸들이 공존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이 다른 몸들이 평등하게 서로 ‘몸‘ 정체성의 지각이 되어주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노년의 몸이 특히 속도에 있어 제멋대로 조종되지 않는 특징을 나타낸다면 그 몸은 다른 생애 단계에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 가능한 반성의 토대다. - P264

정신적 탄성은 고통스런 현실이 주는 슬픔이나 좌절, 분노에 면역이 되어서 가능한 게 아니다. 똑바로 직면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욕망과 포기 사이에서, 자립과 의존 사이에서,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자존심과 수치심 사이에서 ‘흔들리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모든 균형 잡기에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감각으로 이끄는 힘은 물론 일시에 이뤄진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살면서 그 끈을 놓지 않았던 삶과 죽음의 의미, 타자들과 시도했던 무수한 연결의 시도들이 바로 그 힘이다. 늙어서 갑자기 누리는 자기결정권 같은 건 없다. 늙는 일의 선행 학습은 ‘나 이제 정말이지 아주 늙어버렸네‘ 라고 절감하는 그 순간까지 평생 진행되어온 것이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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