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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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규범 체계에 맞서 자신이 처한 실존의 총체적이고도 구체적인 상황 한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몸의 외침과 목소리의 외침 사이에 어떤 차이도 알지 못한다. ‘그림자‘로 존재하고 일하며 느끼던 사람들이 이름을 부여 받고 권리를, 자신의 몫을 찾는 과정은 언제나 동시에 언어 투쟁의 과정이다. - P211

돌봄권이라는 새로운 권리는 돌봄의 주체를 구성해내는 데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각자가 시민의 자리에서 돌봄권의 주체로 자신을 재발명해야 한다.
권리를 외친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설명하는 행위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면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사회적 인프라, 자기와 돌봄자를 고립과 빈곤으로 내모는 노동시장과 복지 수준, 사회문화적 감수성과 태도, 24시간 요구되는 돌봄을 몇 시간에 한정하려는 사회서비스, 돌봄을 가족의 책임과 성별화된 역할로 돌리는 지배적인 통념. 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P212

자기는 의존하지 않는다고, 자립적이라고 자부해온 사람들이 돌봄의존자의 ‘외침‘과 소통하면서 보편적 의존성과 관계 속의 자율성을 깨닫는 것이 한 축이라면, 돌봄에 의존한다고 해서 침묵의 세계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외침은 계속된다는 것, 그 외침이 기존의 권리 체계를 보다 인간화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데 핵심 요소라는 것이 다른 한 축이다. 일방의 결단이나 실천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면서 서로에게 적응하며 변화하는 것이 돌봄권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 P214

그런데 자기결정/권과 관련해 ‘조력사(안락사, 존엄사)’가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소위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결정한 내용만을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고 여기고, 그 결정권을 소유 가능한 것으로 해석하는 문제는 더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태의 ‘자기‘가 있다. 그는 언젠가 사고, 노화, 질병 등으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신체 능력을 상실할 ‘자기‘를 염려하고 혐오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가 되면 살고싶지 않으니 깔끔하게 살다 떠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미리 결정해놓는다.‘ 이때 자기결정권의 주체는 병들고 신체·정신 장애가 있고 늙은 자기를 분명 자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럴 때 이성적 자기가 ‘행사하는’ 것만 자기결정이고 취약한 상태의 자기가 ‘행사할 수도’ 있는 그것은 자기결정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마치 이성에 따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만 ‘자기‘가 유지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특정 맥락에서 자기가 포기하려는 것이 치료나 삶인지, 누군가가 해줘야 할 마지막까지의 돌봄인지 묻고 싶다. - P222

돌봄과 관련해 우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을 쌍방향에서 행하기, 즉 호혜적으로 순환시키기, 돌봄이 필요한 의존적 사람을 돌봄 실천의 경계 밖으로 내치는 것을 금지하기, 돌봄 수행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시민 개개인의 주체성 형성에 필수 요소가 되게 만들기 등등이 주관의 상태, 자발성, 처지, ‘숙명‘ 등을 넘어서 객관화를 동반하는 문화적 코드와 사회적 대본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 동학의 발전소는 ‘신뢰의 호혜성‘이다. 상품의 교환을 넘어서 신뢰가 계속 호혜적으로 이어지고 파생됨으로써, 신뢰는 정동적으로 전염되고 더 많은 신뢰와 사회적 관계/연대를 생산한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에서 ‘사회적‘은 societal(제도와 구조), socius (벗과의 교제)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지닌다. - P250

그래서 그냥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 아니라 ‘정의로운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다. 시민들 ‘모두‘가 참여해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가면서 고치고, 또 새로운 상상력으로 다른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사회, 시장으로 빠르고 넓은 길이 나는 것을 막고, 작은 모색의 골목들을 만드는 사회가 돌봄 사회이기 때문이다. - P282

누구나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일 권리가 있다. 현실은 다르다. 많은 사람이 국적, 인종, 성정체성, 젠더, 지역, 신체 상태 등을 이유로 정치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이 배제는 구조(societal, 통합된 사회적 체계)와 벗들과의 관계(social, 사회적 교제), 두 차원에서 일어난다. social 차원의 두툼한 연결을 통해서 societal 차원의 방어벽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벗들이 함께 하는 장소인 사회에서는 ~하기(doing)와 있기/존재하기 (being) 사이에 적대적인 경계를 세우지 않는다. 신자본주의 문화에 물든 우리는 임금 생산노동을 하는(doing) 사람만이 존재한다고(being) 생각한다. ‘그냥 있을 뿐인‘ 사람은 사회구성원으로 세지 않는다. 그러나 ‘하기‘와 ‘그냥 있기‘ 사이를 돌봄이 매개할 때, 존재는 실존이 된다. ‘그냥 있기‘란 없으며 존재하기의 무수한 형태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하기와 있기가 돌봄을 통해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어 ‘삶’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돌봄을 어딘가에 뚫린 구멍, ‘하기‘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한 대책쯤으로 여기는 건 심각한 오류다. 쓸모 있는 생산을 하는 사람도 하지 않는 사람도,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이런 존재는 관계적 실존을 산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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